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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봉 여사 영정
 김학봉 여사 영정
ⓒ 인터넷언론인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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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막내 동생 김학봉(향년 90세) 여사가 2019년 2월 24일 오전 별세했다. 11남매(9남 2녀) 중 막내다. 첫째 약산의 월북 후 10명의 형제와 사촌 등은 연좌제의 사슬에 얽매여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한국전쟁 당시 약산의 형제 4명과 사촌 5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고, 약산의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고 한다.

11남매의 막내로 34년 터울인 약산과 두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던 김학봉 여사도 종로 경찰서로 끌려가 신문을 받았고, 자녀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고인은 살아 생전 북에 남아있을 약산의 가족을 만나보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또한 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도 번번이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김학봉의 둘째 아들 김태영씨가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 회장과 '임시정부 건립위원회' 이사로 약산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약산의 발자국

일제에 맞서 무장독립운동 펼쳤던 약산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 후 북에 머물렀다. 약산의 월북으로 남은 가족은 연좌제의 사슬에 얽매여 고통의 세월을 살았다. 누가 민족주의자며 항일투사인 약산을 북으로 내몰았고, 약산의 가족들을 온갖 고문과 고통으로 시달리게 만들었을까.

중국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의열단을 조직해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 투쟁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냈던 독립투사가 약산은 왜 월북을 했으며 남과 북 양쪽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약산 김원봉 장군에게 일제는 100원(지금 돈 약 320억 원)의 현상금을 걸만큼 두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거액의 현상금에도 신출귀몰하며 무장항쟁을 펼쳤던 약산이 귀국해서 악질 친일역적 노덕술에게 체포돼 수갑이 채워진 채 당시 수도청장 장택상 앞으로 끌려간다.

노덕술은 약산의 뺨을 때리고 갖은 수모와 고문을 한 뒤 돌려보냈다고 한다. 송건호의 책 <의열단>에 의하면 중부경찰서에 구금돼 갖은 수모를 당한 뒤 집에 돌아온 김원봉은 "전 의열단원 유석현에게 가서 꼬박 3일간을 울었다"라고 한다. 대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투사가 친일역적 경찰 노덕술에게 잡혀 수갑을 차고 끌려가 온갖 모욕을 당했으니 그 울분은 짐작하고도 남을만 하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라며 분노하던 약산은 "여기서는 왜놈 친일파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라며 분노했다. 그러다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김구와 함께 월북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던 약산은 연방평화제를 주장해 김일성의 눈 밖에 나고, 1958년 박헌영 등 연안파를 숙청할 때 함께 숙청당했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항일독립투사의 가족

그렇다면 약산 김원봉은 골수 공산주의자여서 북으로 간 것일까. 송건호의 책 <의열단> 252쪽에 의하면 '약산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닌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였다고 평가된다.

약산이 북에 남았던 원인은 친일 역적들을 제대로 처단하지 못한 당시의 남쪽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만일 약산이 골수 공산주의자였다면 처음부터 김구 선생과 남한으로 오지 않고 김일성과 함께 북으로 갔을 것이다. 민족주의자요, 목숨을 걸고 항일무장 투쟁을 벌인 약산 김원봉을 '월북해서 북의 건립을 도왔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 서훈을 할 수 없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외세에 의한 국토의 분단은 땅만 갈라놓은 것이 아니다. 분단으로 인해 삶도 사람도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도 감정도 갈라졌다. 외세에 의해 억지로 갈라져야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남았을 뿐인데 말이다.

최근 약삼 김원봉 장군의 서훈 추서를 위한 청와대 청원을 시작한 젊은이가 있다.  분단 71년 만에 남과 북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휴전선 철조망이 걷히고 지뢰가 제거되고 있다. 휴전선만이 아니다. 이제 고정관념의 벽도 허물어야 한다. 남과 북의 분단을 허물려는 노력은 다각도로 이뤄져야 한다.

밀양 사람 약산 김원봉, 철저한 민족주의자며 항일독립투사였던 약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독립운동의 공로룰 인정하고 서훈을 추서하는 것이 분단의 벽을 허물어내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될 것이다.

혁혁한 공을 세운 항일독립투사의 가족임에도 제대로 대접을 받기는커녕 온갖 고난 속에 살다 한을 품고 떠난 약산 김원봉의 마지막 피붙이 김학봉 여사에게 늦은 사죄의 뜻으로라도 약산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서훈 추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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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