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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70)씨는 두레박으로 퍼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 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씨는 내 엄마다. - 기자말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 스틸컷.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 스틸컷.
ⓒ 드림이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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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부스러지고 빗으로도 안 빗겨지고

나는 곱슬머리이다. 공들여 손질하지 않으면 머리가 단정해 보이지 않는다. 고등학교 땐 부스스한 머리 모양 때문에 우스운 별명까지 생겼다. 콤플렉스까진 아니어도 머리 손질에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게 불편했다.

헤어드라이기로 겨우 숨을 가라앉혀 보지만 시간 대비 효과는 적었다.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로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이 부러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멋을 내기 위해 요란한 파마를 하거나 긴 생머리 가발을 쓰고 다녔다. 곱슬머리는 떼어낼 수 없는 내 운명이었다.

그런데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1990년대 말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가 나온 것이다. 기존 스트레이트 파마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입소문에 기대를 갖고 미장원을 찾았다. 과연, 마법 같은 찰랑거림에 잠시 내가 정말 생머리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 후 20년 동안 매직 파마를 하고 살았다. 내 삶은 매직 파마가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그러고 보니 올해 일흔인 엄마는 파마가 대중화되기 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 기억 속 엄마의 머리는 언제나 파마 머리였다. 반 곱슬인 엄마에게도 파마는 혁명이었을까?

"여덟 살 때쯤인가, 하여간 어렸어. 동네에 나랑 동갑인 친구가 있었어. 걔네 언니들이 많았는데 걔한테 파마를 해줬나 봐. 그걸 보더니 엄마가 '너도 해'라고 했지. 나는 그게 뭔지 잘 몰랐고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힘들었던 기억이 나. 머리는 엄청 무겁고, 막 뜨겁기는 하고, 잠은 오는데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지. 얇은 쇳덩어리 같은 걸 머리에 이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머리 모양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지 않은 걸 보면 파마약을 안 쓰고 그냥 말기만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타서 부스러지고 빗으로도 잘 안 빗겨졌던 생각이 나네. 이후론 한 적이 없고 늘 단발머리였어. 스무 살 넘어서 남들 파마 많이 할 때도 나는 돈이 아까워서 못했지.

그러다가 막내 낳고 머리를 잘랐는데 너무 짧게 자른 거야. 남자 같다고 사람들이 파마라도 하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20년 만에 파마를 했지. 그 뒤부터 쭉 파마머리를 하고 살았어. 변화? 글쎄. 어차피 여자 머리는 손질을 많이 하니까 파마를 했다고 해서 더 편해진 것도 없었어. 그냥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하는 정도지. 지금은 머리숱이 없어져서 파마를 꼭 해야 돼. 아니면 푹 꺼져서 볼품이 없어. 파마는 필수야."


여학생들 '머리지지기' 폐지 운동?

우리나라에 처음 파마가 들어온 건 1933년이었다. 오엽주씨가 일본에서 '불파마'를 도입해 서울 종로화신백화점 안에 미용실을 열었다.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이 주요 고객이었다. 이 무렵 일본과 홍콩의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선 파마가 꽤 유행한 모양이다. 1938년 <향항 여학생들 머리지지기 폐지운동>이란 제목의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다.
 
'파마넌트 웨이브'를 폐지하자는 운동이 일본만이 아니고 최근 향항(홍콩) 지나여학교 간에도 제창되어 모던걸에 일대 공황을 주고 있다. 머리가 꼬실거리고 귀에는 귀걸개(귀고리)를 하는 것은 야만인으로 할 일이다. 더욱이 이 시절에 외국제품을 사용하여까지 인류 문화에 역행하는 것은 인테리의 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에 사용할 돈으로 구국공채를 사자는 것이 그의 취지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개개인의 머리 모양과 장신구를 두고 '야만인'이라거나 '인류 문화에 역행'한다고 말하는 건 무척 과하게 느껴진다. 여성의 외모에 공동체가 기준을 들이대고 관여하는 뿌리 깊은 관성을 엿볼 수 있다.
 
 미용실
 미용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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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양극단으로 나눠진 파마의 유행

해방 직후 불파마 값은 쌀 한 가마니 값에 달할 정도로 비쌌다. 그래서 고위직 인사의 부인이나 개화된 집안의 여성 등 특수층이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1995.2.6. 한겨레)
 
'불파마'란 생경한 이름은 외부에서 열을 가해 주어야만 곱슬곱슬한 모양이 형성되었던 파마 약 때문에 붙여졌다. 파마 도구인 로트(인두)에 머리를 말고 약을 바른 뒤 새끼손가락 굵기의 숯을 담은 불그릇을 올려놓아 약이 마르기만을 기다렸는데, 불이 꺼질세라 부채질까지 해야 했다. 더군다나 과묵한 손님들이 아무리 뜨거워도 내색을 하지 않아 파마가 끝난 뒤 화상이 나거나 탈모가 된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위 기사)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었던 파마는 6.25 전쟁이 끝난 뒤 정반대 위치에 있던 또 다른 여성 무리의 머리 모양을 바꿔놓았다. 전쟁 후 유엔군이 우리나라에 남았고, 미군부대 주변으로 미국문화가 형성되었다. 바로 '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던 기지촌 여성들이다.
 
'딸라'를 벌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양색시들에게 외모에 대한 투자는 필수였다. 레인보우 클럽 옆의 레인보우 미장원에서 '고데 머리'를 하면 '순희'는 '에레나'가, '정애'는 '마가렛'이 되었다. (<인생극장> 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
 
하지만 신문들은 기지촌 여성을 문화와 경제의 일부를 형성한 주체로 다루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범죄기사, 사회 문제를 다룬 기사에나 일부 드러날 뿐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사회학자 노명우는 그의 책 <인생극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먹고살기 위해 '양색시 경제'를 만들어냈지만 부끄러움의 정서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의 보상 심리와 보호 심리의 이중주가 펼쳐졌다. 부끄러움을 감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양색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동원되었다.

... 관념상으로는 여전히 '대장부'여야 했던 전후 한국 남성은 미군 앞에서는 '가부장'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보호하지 못한 여성들 앞에서만 가부장의 지위를 흉내 냈다.

... '양공주'가 달러벌이의 최전선에 있고 남자들은 후방에서 그 달러에 의존하는 기생 경제를 이루고 있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한국 남자에게 동시에 벌레 취급을 받았던 양색시들에게 남은 건 위악뿐이었다.
 
미군의 영향으로 여성의 머리모양은 1950년대를 거쳐 '현대화'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1960년대엔 파마머리를 손질하는 방법이 신문에 곧잘 등장했고 1970년대 들어 '여대생의 헤어스타일' '발랄하고 청순한 멋을 고교 졸업생의 의상과 미용' '머리 손질과 올 가을 유행'이란 제목의 기사들이 자주 실렸다.
 
땋았던 긴 머리는 층진 머리를 곱게 다듬어 밑에만 살짝 웨이브를 준다. 이때 주의할 점은 전체적으로 파마를 하지 말도록. 너무 인조적인 머리는 나이가 들어 보인다. 단발머리는 그냥 두면 촌스러워 보이므로 옆머리만 살짝 커트하여 굵은 파마를 한다. 머리를 감은 후 뒤로 넘겨가는 듯이 빗어가며 말린다. 뒷머리는 파마를 하지 말고 그대로 다듬기만 한다. (1976.1.17. 매일경제)
 
파마를 하되 옆머리와 밑 부분만 살짝 웨이브를 줘야 하고, 머리도 신경 써 말려야 한다. 여성의 머리 모양이 대체 무엇이기에 귀한 지면을 할애해 이토록 자세히 소개하는 걸까. 여성의 외모가 공공재였던가? 또한 너무 인조적인 머리는 나이가 들어 보인다니, 여성은 나이가 들어 보이면 안 되는 큰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읽는 것만으로도 갑갑함이 밀려오는, 여성의 외모와 유행을 다룬 기사는 이후로도 신문 지면에 꾸준히 등장한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담긴 '파마'

1980년대 들어 파마를 하는 남성도 부쩍 늘었다. 특히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큰 인기를 얻으며 주인공 까치 머리 모양의 파마가 젊은 남성 사이에서 유행했다. 1990년대엔 파마 모양이 다양해지고 유행도 빠르게 변했다. 개성 넘치는 머리 모양이 대거 등장했다.

1997년 말 터진 IMF는 여성들을 값싼 노동시장으로 내몰았다.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하는 반면 자격증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특히 미용사는 전문직 가운데 비교적 쉽고 빠르게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고 곧바로 활용이 가능해 인기를 끌었다. 미장원은 창업에 큰 비용이 들지 않고 직원을 두지 않아도 운영이 가능했다.

빠르게 증가한 미장원의 수는 현재 한계를 넘어 포화상태가 된 지 오래다. '양색시'가 전후 달러 경제를 이끌었듯, 동네 골목마다 자리한 '1인 미장원'에서 여성들은 온종일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말고 감기며 한 가정의 경제를 이끌었다. 파마머리의 역사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요즘은 여성의 외모 문제로 시위를 벌이거나, 파마한 사람을 '술집 여자'라며 나무라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전히 굳건하다. 여성은 과연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꾸미는 외모 가운데 '오로지 나'의 욕구를 반영한 부분은 얼마나 될까. 오늘도 내일도, 아침마다 고데기로 곱슬머리를 펴는 나에게도 던져야 할 질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천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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