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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비로 청사 모습이다. 2층 외벽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당시부터 대한민국의 상징은 태극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비로 청사 모습이다. 2층 외벽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당시부터 대한민국의 상징은 태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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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탄핵을 전후하여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지도력의 공백에다 파벌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안창호 등이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는 데는 국민대표회의 외에 달리 길이 없다고 믿고 여기에 전력을 쏟았다. 임시정부측으로부터 조직적인 반발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대회 소집을 추진하였다. 

다행히 동조자(세력)가 많았다. 박은식 등 14인의 〈아 동포에 고함〉이라는 지지선언과 베이징의 신채호ㆍ박용만 등 군사통일주비회, 그리고 여준ㆍ이탁ㆍ김동삼 등 만주 액목현 회의 지도그룹, 여기에 1921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 멤버들도 이를 지지하였다.

미국이 주도한 태평양회의에 큰 그대를 걸었던 이승만그룹의 외교독립론이 무산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때마침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에 23개 단체 52명이 참가(소련ㆍ중국ㆍ일본ㆍ자바 등 5개국 144명), 대표 중 한국인이 36퍼센트가 될 만큼 다수가 참가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여론을 발판으로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4월 24일 각계 인사 129명의 서명을 받고 발회식을 열어 임시정부의 단점, 시정책, 혁신과제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측은 내무부 통첩을 통해 "불온 언동에 대한 주의"를 발표하는 등 여전히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반대하였다.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를 적극 추진한 데는 임시정부내의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1920년 훈춘사건(간도참변)도 한 변수가 되었다.

3ㆍ1혁명 후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이 지역에 병력을 투입할 구실을 찾았다. 일제는 마적 수령 장강호(長江好)를 매수하여 마적단 400여 명으로 하여금 훈춘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 습격으로 훈춘의 일본영사관 직원과 경찰 가족 등 일본인 9명이 살해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삼아 마적토벌이라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르고 한인회와 독립단 조직을 파괴시켰다.

특히 독립군의 활동기반인 조선인 교포의 학살에 역점을 두었으므로 훈춘에서만 250여 명의 조선인 교포가 참변을 당했다. 이 사건을 시발로 하여 일본군의 만주지역 조선인 교포 학살행위가 그치지 않게 자행되면서 독립군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1900년대 초 자유시 풍경. 흑룡강 지류인 쩨야강 연안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통과함.
 1900년대 초 자유시 풍경. 흑룡강 지류인 쩨야강 연안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통과함.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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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벌어진 자유시참변(일명 흑하사변)도 국민대표회의 개최의 요인으로 대두되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수라세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부대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불상사였다. 이 사건으로 사망 272명, 포로 864명, 행방불명 59명 등 막대한 한인 교포의 희생이 따랐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임시정부의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으며, 결국 국민대표회의 개최로 중지를 모으게 되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1921년 3월 15일 국민대표회촉진회를 조직하면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동시에 정부 명칭을 폐하고 위원회제도 또는 당의 조직으로 변경할 것을 1차적인 대회개최의 목표로 삼았다.

5월 19일 대회 소집에 찬동하는 300여 명의 명단이 확보되고, 6월 6일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열어 회의소집 예정일과 대표자격, 대표선출구역 등을 확정하였다.

주비회는 또 대표를 지방대표와 단체대표로 나누고 단체는 다시 보통단체와 특수단체로 구분했다. 지역대표는 국내 26명을 포함하여 모두 47명, 보통단체는 종교ㆍ노동ㆍ청년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데 회원 100명 이상일 경우 1명, 1만 명 이상일 경우 2명의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회의에 참가할 지역 및 단체는 135개이며 대표는 158명이었으나 자격심사를 받아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국내, 상해, 만주일대, 북경, 간도일대, 노령, 미주 등지의 대표 125명으로 확정되었다.

1923년 1월 3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민국로(民國路)의 미국인 예배당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일제의 방해와 교통사정 등으로 개회 당일 참석자는 62명이었다. 대회는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각지의 대표들이 속속 참석하고 열기도 뜨거웠다.

회의에서는 의장에 김동삼을 선출하고 안창호와 윤해가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평균 3일에 1회 꼴로 열린 회의는 독립운동 대방략에서부터 시국문제, 국호 및 연호, 헌법, 위임통치사건 취소, 자유시참변, 통의부사건, 기관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회의는 군사ㆍ재정ㆍ외교ㆍ생계ㆍ교육ㆍ노동 등의 6개 분과로 나누고, 헌법기초위원회, 과거문제조사위원회 등 2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독립운동단체에서 부담하고, 찬조금으로 한형권이 모스크바의 레닌에게서 받아온 기금으로 충당하였는데, 이 자금문제를 둘러싸고 한때 회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회의가 계속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과 시국문제의 토론에서 각 지방과 단체, 개인 사이에 이견이 대두되었다. 대별하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해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으로 나뉘었다.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회의는 팽팽하게 논전을 펼쳤다. 3월 20일 이후에는 정식 회의를 그만두고 비공식 접촉을 가지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공백기간이 지난 뒤 4월 11일부터 회의가 재개되었지만, 결국 다시 임시정부 처리문제로 돌아왔다.

63회 회의가 열린 5월 15일을 끝으로 더 이상 양대 세력의 활동모임은 없었다. 결렬을 눈앞에 둔 6월 4일에 안창호ㆍ손정도ㆍ정신ㆍ왕삼덕 등 개조파와 신숙ㆍ윤해 등 창조파 및 중도의 김동삼이 합석하여 타협책을 마련하느라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마져도 결렬되었다.
  
 안창호 선생이 서거한지 80년. 드라마로 화려하게 복귀한 선생의 조명이 드라마에서뿐만이 아니길 필자는 바란다.
 안창호 선생이 서거한지 80년. 드라마로 화려하게 복귀한 선생의 조명이 드라마에서뿐만이 아니길 필자는 바란다.
ⓒ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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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이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과 대표회의 회원 합동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기관을 조직한 뒤 종전의 헌법과 기관을 일체 폐지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또 그를 비롯한 개조파 대표는 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의 비공식 연합회에서 헌법회의를 구성하고, 그 조직이 완료되면 양쪽이 해산하며 헌법회의 결정사항을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공포하도록 하자는 안을 마련했지만, 모두 임시정부측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다.

국민대표회의는 비록 결렬되고 말았으나 독립운동사에 차지하는 그 의미는 적지 않았다. 

1) 이 회의는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모임이었다. 일제의 위협과 장소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각 지역, 단체가 대거 집결하였다. 

2) 독립운동계가 안고 있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임시정부의 재평가와 지난 독립운동의 공과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3) 192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성향과 동포사회의 분포뿐만 아니라 성향과 방략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4) 임시정부가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 회의의 자극으로 임시정부는 1925년 2차 개헌을 단행하는 등 체제정비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5) 독립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었다. 이념의 벽을 넘어 전민족의 역량을 한일투쟁으로 결집시켜야 할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민족협동전선 운동이나 유일당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6) 참가한 모든 대표들이 임시정부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정부조직 자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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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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