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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박에 '맥주'와 '소시지', 아니면 '축구'라고 답할 것이다. 더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테고, '벤츠'나 'BMW', '폭스바겐'과 같은 자동차를 우선 손꼽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난 '하이델베르그'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대학이 주인인 도시
 
하이델베르그 성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겨울 풍경 하이델베르그의 구 도심의 모습으로, 대부분이 대학과 관련된 건물이거나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다. 강 건너 '철학자의 길'이 나란히 있으며, 하이델베르그 성 너머 산등성이에는 철학자 막스 베버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하이델베르그 성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겨울 풍경 하이델베르그의 구 도심의 모습으로, 대부분이 대학과 관련된 건물이거나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다. 강 건너 "철학자의 길"이 나란히 있으며, 하이델베르그 성 너머 산등성이에는 철학자 막스 베버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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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지리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독일의 도시라면 수도인 베를린이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뮌헨과 세계적인 환경도시인 프라이부르크가 먼저 나와야 합당하다. 하다못해 손흥민, 구자철 등 우리나라 축구선수가 뛰었던 함부르크나 레버쿠젠, 아우크스부르크를 떠올리는 게 당연해 보인다.

솔직히 그 이유를 대라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지만, 언제부턴가 하이델베르그는 독일이라는 국가보다 더 먼저 뇌리에 박힌 도시였다. 적어도 내게 냉정하고 이성적이라는 독일에 대한 선입견은 이 도시가 주는 인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확히 독일 땅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이델베르그는 어려서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버킷리스트'였다.

순전히 '대학' 때문 아니었나 싶긴 하다. 인구가 고작 15만 명 남짓에 불과한 독일의 이 소도시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자리하고 있는데, 명실상부 도시의 '주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386년에 개교했으니 햇수로 무려 633년이나 됐다. 우리로 치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해보다 6년이나 앞선 시기다.

솔직히 지금의 독일은 하이델베르그에 많은 빚을 졌다.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이자, 세계 유수의 대학이 벤치마킹하는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대학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하이델베르그가 도시 이름인지는 모를지언정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생소해 하는 이는 없다.

홀로코스트의 전범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강조한 한나 아렌트, 사회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막스 베버, 독일 통일의 밑돌을 놓은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등이 이 대학 출신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사랑의 기술>의 저자인 에리히 프롬,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 극작가 서머싯 몸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런가 하면, 이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한 교수들 역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물들이 숱하다. 변증법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헤겔, 나치와 불화하고 협력한 극단의 두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와 하이데거, 공공의 의사소통 이론을 정립한 하버마스 등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강단에 섰다. 오로지 철학 한 분야만 거론해도 이 정도다.

구도심에 흩뿌려진 대학
 
화학자 분젠의 동상 19세기 중반 스펙트럼 분석법을 발견한 화학자 분젠의 동상이 하이델베르그대학 심리학연구소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대학이 배출한 숱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 좌우로 상가가 즐비한 중앙도로에 세워져 있어서 스쳐 지나칠 수도 있다.
▲ 화학자 분젠의 동상 19세기 중반 스펙트럼 분석법을 발견한 화학자 분젠의 동상이 하이델베르그대학 심리학연구소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대학이 배출한 숱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 좌우로 상가가 즐비한 중앙도로에 세워져 있어서 스쳐 지나칠 수도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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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뒤에 굳이 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냥 하이델베르그라고 하면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누군가 이곳에 산다고 하면, 십중팔구 하이델베르그 대학생이거나 직원, 아니면 대학에 기대 생계를 꾸리는 상인들이다. 또 부러 이곳을 찾는 여행자라면 대학을 견학하거나 도시의 학구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이유에서다.

이번 한 달 가까운 독일 여행(1월 10일부터 24일간) 계획을 세우면서 교통편도 불편한 하이델베르그를 가장 앞세운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직항 노선이 닿는 독일의 허브 공항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자면, 인근의 만하임까지 고속열차를 타고 간 뒤 기차를 다시 갈아타야 한다. 직통 노선이 있긴 하지만, 편수가 드물어서 환승하는 방법이 시간을 절약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슴 설렌 이방인을 마치 반기기라도 하듯 도착한 날 서설이 내렸다. 그것도 펑펑 내렸다. 기온이 비교적 높아 수북이 쌓이진 않았지만, 내리는 눈만으로도 고즈넉한 고성 도시의 풍광과 어울리며 중세 시대의 겨울왕국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도시의 중심인 중앙 기차역에서 북동쪽으로 2km쯤 떨어진 구도심에 '흩뿌려져' 있다. 걷다 보면 대학과 관련된 건물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마치 주소 팻말처럼 붙어 있어 과연 대학의 도시라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입구에 줄지어 선 상가나 일부 주택을 제외하면, 죄다 대학의 부속 건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당과 교회 등 종교시설을 포함해 구도심 자체가 대학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관광객들 말고는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 대부분이 젊은 대학생들이라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와는 달리 활기가 넘친다. 근래에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는 네카르 강 북쪽에 대규모로 새 캠퍼스가 조성되면서 많은 학교 시설이 옮겨가긴 했어도 여전히 대학의 중심은 이곳이다.

관광명소 '학생감옥'? 작위적인 느낌도...
 
마르크트 광장에서 본 하이델베르그 성 또 하나의 중심으로, 이곳에서 하이델베르그 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이델베르그 성은 신교와 구교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으로,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마르크트 광장에서 본 하이델베르그 성 또 하나의 중심으로, 이곳에서 하이델베르그 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이델베르그 성은 신교와 구교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으로,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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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광장이 있다. 이곳에는 크기도 모양도 비슷한 두 개의 광장이 오누이처럼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마르크트(Markt) 광장'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Universitat) 광장'이다. 이름으로 추측하건대, 한 곳은 시장이 섰던 곳이고, 다른 한 곳은 대학의 중심이라는 뜻일 테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학 광장은 현존하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박물관과 '학생 감옥', 도서관, 학생 식당 등으로 에워싸여 있다. 대학의 분위기를 만끽하자면 이곳 한 군데로도 충분하다. 교사라는 직업 탓일 테지만, 그중에서도 대학 도서관은 어느 도시를 가든 반드시 들러 반나절 이상 시간을 할애하는 필수 답사코스다.

박물관과 '학생 감옥'은 입장권을 끊어야 들어갈 수 있다. 괜히 안 가면 서운할 것 같은 곳이지만, 그래선지 그곳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뿐이다. 지금도 졸업식 등의 공식적인 행사가 열리는 박물관 2층의 홀을 제외하면 딱히 지금 대학의 모습과 연관시킬 만한 게 없다. 말 그대로 관광지일 뿐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다.

특히 '학생 감옥'은 관광안내책자마다 대학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이라며 필수 여행지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거라곤 벽과 천정을 도배하다시피 한 어지러운 낙서 자국뿐이다. 학칙을 어겨 근신하던 당시 대학생들의 것과 관광객들의 것이 뒤섞여 눈살만 찌푸리게 만들 뿐이다. 그 흔한 안내판조차 없는데다 망가진 의자와 침대 등이 널브러져 있어 언뜻 작위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관광지' 하이델베르그 학생 감옥 옛날 규칙을 위반한 대학생들을 격리시켜 근신하도록 만든 공간으로,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소이다. 벽에 온통 낙서가 되어 있는데, 당시 학생들의 것도 있지만, 관광객들이 덧입힌 것도 많다. 한국어 낙서도 숱하다.
▲ "관광지" 하이델베르그 학생 감옥 옛날 규칙을 위반한 대학생들을 격리시켜 근신하도록 만든 공간으로,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소이다. 벽에 온통 낙서가 되어 있는데, 당시 학생들의 것도 있지만, 관광객들이 덧입힌 것도 많다. 한국어 낙서도 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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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얼마나 세심하냐면

늘 깨닫는 거지만, 관광지로 분한 곳에서 대학의 분위기를 느낀다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시간을 내어 도서관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다. 비싼 입장료도 없고, 우리나라의 여느 대학들과는 달리 들어가 서가에서 자료를 열람하든, 책상에 앉아 공부하든, 하다못해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든, 조용히만 한다면 눈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가를 돌아다니며 우리나라와 관련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즐겁고, 짐을 꾸리며 챙겨간 책을 가지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읽는 것도 재미있다. 슬쩍 곁눈질해가며 현지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도서관 곳곳의 다양한 시설을 둘러보는 것조차 여느 관광지에서 만끽할 수 없는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색 바랜 붉은 벽돌과 장식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있는 외관만 봐서는 낡고 허름할 듯하지만, 도서관 내부는 전혀 달랐다. 입구의 정문은 여전히 '중세'의 모습 그대로지만, 오르는 계단은 '근대'이며, 열람실은 최첨단의 '현대'라고나 할까. 바깥에서 보는 경관과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은 시대를 넘나들 만큼 사뭇 다르다.

도서관 내부를 살펴보면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공부할 마음이 없이 들어와도 일단 자리에 앉으면 공부를 하고 싶어질 정도로 세심하다. 당장 열람실 출입구 자동문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드나드는 이들은 많아 쉴 새 없이 여닫히지만, 방해된다는 듯 힐끗힐끗 쳐다보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아예 열람실이 배치부터가 독특하다. 여느 곳과는 달리 입구 근처에 도미노처럼 늘어선 서가와 휴게 공간을 두고, 그곳을 지나야만 자습 공간에 닿을 수 있게 했다. 출입구의 들락거리는 소음이 앉아서 공부하는 곳까지 들릴 수 없도록 배치한 듯하다.

열람실의 창가 쪽으로 방음시설을 한 소규모 협동학습실을 설치해둔 것도 눈에 띈다. 적게는 두 사람에서 많게는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서 토론이나 세미나를 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비어 있는 방이 없을 정도로 공부의 열기가 뜨거웠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전혀 새어나오지 않아 신기했다.

바닥에는 약간의 쿠션감이 느껴지는 양탄자가 깔려 있는데, 이 또한 발자국 소리를 막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열람실을 뛰어 다니지 않는다면, 적어도 귀로는 누가 오가는지 알 수 없다. 그도 모자라다고 여긴 건지, 각 층마다 귀마개를 판매하는 자판기까지 설치돼 있다.

구호가 아닌 환경
 
대학 광장 전경 하이델베르그의 중심으로, 대학박물관과 도서관, 생명과학대학, 음악대학 등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 대학 광장 전경 하이델베르그의 중심으로, 대학박물관과 도서관, 생명과학대학, 음악대학 등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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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붙어 있는 학생 식당에서도 그들을 위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멘사(Mensa)'라고 불리는 학생 식당은 대학 학생회가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시설로, 원래 이곳 대학 광장과 조금 떨어진 네카르 강변에 있었다. 물론 지금도 성업 중이지만, 도서관 바로 옆에 '분점'을 새로 냈다. 그만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셈이다.

이곳의 음식 가격은 차등 적용된다. 같은 음식이라도 학생이 가장 싸고, 교직원과 관련 방문객, 일반 관광객 순으로 비싸진다. 대략 30% 정도 비싼 가격이지만, 그래도 주변의 일반 식당과 비교하면 저렴한 편에 든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의 대학은 등록금도 무료인데, 밥값마저 그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연관성은 없겠지만, '멘사(MENSA)'는 상위 2% 안에 드는 고지능자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천재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멘사가 이곳 하이델베르그를 비롯한 독일 대학의 학생 식당을 뜻하는 단어라는 건 흥미롭다. 이곳에서 그들과 뒤섞여 식사를 하노라면, 여행자도 대학생처럼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느낌이다.

이틀간의 여정을 마치고 하이델베르그를 떠나는 날, 이곳이 대학의 도시라는 뜻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대학에 기반을 둔 도시라기보다는 '누구든 이곳에 오면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발동하는 곳'이라는 뜻은 아닐는지. 전통 학문과 첨단 과학기술이 융합된 독일에서 하이델베르그는 가장 '독일스러운' 곳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대학을 넘어 우리 교육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하이델베르그는 요란한 홍보 캠페인은커녕 우리네 대학 캠퍼스 곳곳에 나부끼는 현수막도 아예 없지만, 어느 곳보다 학구열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세상을 선도하는 대학교육의 목표는 '구호'가 아닌 '환경'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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