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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부 건물
 종친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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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부에서 기무사를 거쳐 미술관이 되기까지

경복궁 동쪽에 종친부(宗親府)가 있었다. 여기서 종친이라면 국왕의 직계가족과 일가친척을 말한다. 이들을 관리하는 부서가 종친부였으며, 종친부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430년이다. 그 후 1905년까지 업무를 수행했고, 이름이 종부시(宗簿寺), 종정부(宗正府)로 바뀌었다. 이들 종친부의 일을 수행한 건물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건물이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이다. 이들은 기무사령부가 이곳에 들어오면서 1981년 인근 정독도서관으로 이전된 일이 있다. 그리고 기무사가 이곳을 떠나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면서 2013년 다시 원래 위치로 이전 복원될 수 있었다. 이 건물을 지나 새로 만들어진 현대미술관으로 가다보면 보게 되는 작품이 최정화의 '민들레'다. 이것은 7,000여개의 식기를 연결해 만든 꽃으로, 백성(民)의 땅(土)에서 나왔다(來)는 의미를 지닌다.

 
최정화의 '민들레'
 최정화의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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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현재 4개의 전시가 열린다. 윤형근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전, 최정화의 <꽃, 숲>전,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전이다. 뒤샹은 초현실주의와 다다계열의 작가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표한다. 윤형근은 단색화를 통해 시대정신을 표현했다. 최정화는 우리의 삶과 관계있는 물건으로 대량소비사회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 설치작가다. 파로키는 영화를 공부한 필름 앤 비디오아트 작가다.

윤형근의 미술 인생
 
윤형근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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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은 평생을 사회와 부딪치며 살아간 행동하는 예술가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국립대학교 설립안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다 제적되었다. 6․25사변때는 보도연맹에 끌려가 죽을 뻔도 했다. 전쟁 후인 1954년 김환기의 주선으로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편입해 1957년 대학을 졸업했다. 1956년에는 6․25사변때 피난가지 않고 부역한 죄목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58년 청주여고 미술교사로 취직하면서 미술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때 가까이 지낸 친구가 시인 신동문과 철학자 민병산이었다. 1960년 3월에는 김환기의 딸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가 장인과 사위 사이가 된 것이다. 4․19의거 후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되어 학교를 떠난다. 1961년 숙명여고 교사로 다시 취직했고, 1962년 제2회 <앙가주망>전에 출품한다.
 
1962-65년경 작품
 1962-65년경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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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신문회관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다. 이때 작품 49점을 출품했다고 한다. 그리고 홍익대 강사로 출강했고, 1967년 서교동으로 이사해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1973년 그는 또 한 번 인생의 시련을 겪는다. 숙명여고에서 부정입학이 이루어졌고, 이를 참지 못한 윤형근 교사가 2월 19일 교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 때문에 21일 그가 레닌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이유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에 윤형근은 숙명여고에 사표를 낸다. 다행히 1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이후부터 요주의 인물이 되어 1980년까지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때 입학한 학생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딸 등이었다.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73년 7월 7일자 《동아일보》다. 기사의 제목은 <모 일류여고에도 말썽. 수석 차석 등 우수합격자 일부 학생 첫 학력고사서 최하위 성적 나타나>다. 기사에 S여고라고 나오는데, 이 학교가 숙명여고다.
 
1972년 작품
 1972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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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후인 지난 2월 19일 열린 교직자회의석상에서 윤 교사(45)가 입시부정설에 대해 교장에게 해명을 요구한 일이 있는데, 이틀 후인 21일 윤 교사는 레닌모를 쓰고 다닌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경찰에 송치됐다. […] 윤 교사가 구속된 사유라는 레닌모는 미술교사며 화가인 윤 교사가 아틀리에 등에서 작업모로 쓰는 것으로 […] 아내가 만든 것이라고 검찰에서 진술, 무혐의 석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윤형근은 타의로 전업작가가 되었고, 5월 18일 제2회 개인전을 명동화랑에서 연다. 이때부터 윤형근의 작품에서는 색이 없어졌다고 한다. 1974년 6월 17일 제3회 개인전을 역시 명동화랑에서 열었다. 7월 25일 장인 김환기가 뉴욕에서 사망했고, 12월 27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앙데팡당>전에 "다색과 청색 No. 39"를 출품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조셉 러브(Joseph Love)가 윤형근의 작품에 감동해 그의 해외진출을 돕는다.
 
1974-76년 작품
 1974-76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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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17일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한다. 1976년 6월 제5회 개인전을 일본 무라마츠(村松)화랑에서 열고, 11월 제6회 개인전을 문헌화랑에서 연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고, 불의를 견디지 못한 그는 12월 부인 아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1981년 빌라 코로(Villa Corot)에서 있은 연합전시회에 참가한다. 1982년 파리에서 귀국했고, 1983년 서교동 집을 새로 지었다. 이때 설계 감독 그리고 감리를 직접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4년 경원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90년 경원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이후 해외전시를 활발하게 가졌다. 1991년 5월 윤형근 개인전을 보기 위해 온 저드(Donald Judd)가, 그의 그림 3점을 구입 미국에 알리게 되었다. 1991년에는 일본, 1992년에는 영국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가가 되었다. 1996년에는 아트바젤 페어에 작품을 출품했고, 11월 <Umber-Blue>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Umber-Blue’
 ‘Umber-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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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윤형근전에 나온 작품들이 대부분 'Umber-Blue'다. 엄버는 암갈색을 나타내는데, 땅을 상징한다. 블루는 파랑색을 나타내며 하늘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둘이 합쳐지면 오묘한 검은색이 나온다. 이 검은색을 윤형근은 마포나 면포에 죽죽 그어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단색화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무심의 경지' '순수의 미학'이 된다. 이를 작가의 말로 표현하면 <천지문(天地門): 하늘과 땅 사이>가 된다.

천지문과 심간(深簡) 등 시공(時空)이라는 주제에 천착
 
천지문을 상징하는 ‘Umber-Blue’
 천지문을 상징하는 ‘Umber-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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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해주기도 하고 연결해주기도 한다. 그 문은 상하로 이루어진 기둥과 벽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문은 안과 밖이건, 위와 아래건, 사이에 있는 존재다. 그 문이 처음에는 막혀 있다 차츰 공간이 드러난다. 막혀 있는 공간은 검은색과 푸른색 계열이고, 열려 있는 공간은 면포나 마포의 고유색이다.

윤형근은 이것을 희비애락(喜悲哀樂)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기쁨 속에 슬픔이 있고, 슬픔 속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예술은 슬프다고 말한다. 그림에서 어두운 부분이 비애라면 밝은 부분은 희락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어두운 부분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이들 문의 기둥이 1980년에 가면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것은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기울어진 문, 천지의 이치가 무너져가는 세상, 그 문으로 검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심간(深簡): 심오하면서도 간결한
 심간(深簡): 심오하면서도 간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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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윤형근은 공간의 문제에 더해 시간의 문제를 다룬다. "이 땅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선지 그의 작품은 깊이와 단순성을 더해간다. 이것을 심오하면서도 간결하다는 의미에서 심간으로 표현한다. 영어로는 The utmost Depth and Simplicity가 된다.

이제는 검은 사각형을 하나 또는 두 개 캔버스에 그려낸다. 캔버스 전체를 암갈색으로 칠해 내려간다. 캔버스의 절반을 수평으로 칠해간다. "살아있는 한 생명을 불태운 흔적으로서, 살아있다는 근거로서, 그날그날을 기록할 뿐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들 죽었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죠셉 러브(Joseph Love)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있구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2004. 5. 8. 윤형근"

재현된 아틀리에에서 그의 삶을 다시 확인하다.

 
윤형근 아틀리에
 윤형근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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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8에서는 윤형근의 아틀리에가 재현되어 있다. 윤형근은 1983년 자신이 설계한 서교동 집에서 2007년까지 살다 죽었다. 24년 동안 함께 했던 작업공간과 생활용품 그리고 작품이 이곳 갤러리에 옮겨 진열되고 있다. 그가 사용했던 가구, 도자기, 작품, 일기, 사진, 도록, 책, 글씨, 편지, 책상과 의자, 화구 등이 있다. 그리고 전뢰진, 도널드 저드, 김환기, 추사 김정희, 아내 김영숙, 최종태의 작품도 있다.

김환기 작품은 '20-X-69 #126 뉴욕'이다. 제목으로 봐서는 1969년에 그린 126번째 작품이다. 붓으로 줄을 그어 하얀 네모를 만들고 그 안에 검은 점을 찍었다. 이곳에는 수화 김환기가 윤형근에게 보낸 편지가 한 묶음 있다. 그 중 수화의 마지막 편지가 펼쳐 있다. 1974년 7월 10일 뉴욕의 연합병원(United Hospital)에서 쓴 편지다. 수화는 이틀 후인 12일 수술을 했고, 수술이 잘못되어 12일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 25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수화 김환기의 마지막 편지
 수화 김환기의 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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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면 별 병들 생기나 보다. 한 3년 견뎌왔는데 결국은 병원에 들어와서 나흘째 된다. 휴양하는 것도 같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같고 창밖으로 하늘과 바다를 바라다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내일 척수를 수술하면 언제 퇴원할지 모르겠다. 이 여름은 병 핑계로 쉴 수밖에. 병원의 식사는 훌륭해서 좋다. 걱정들 말라. 수화"

그리고 윤형근은 1975년 1월 13일 뉴욕의 김환기 화실을 정리하며 사진을 찍고 다음과 같은 글과 스케치를 남긴다. 스승이자 아버지(장인)인 수화 김환기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다.

 
뉴욕 김환기 화실 사진과 스케치
 뉴욕 김환기 화실 사진과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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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화실 남쪽 구석
물감 놓는 곳
병원에 가시기 전에
1975. 1. 13
아버지가 정돈해 놓은 대로
형근 찍음"

태그:#MMCA서울, #윤형근, #단색화, #UMBER-BLUE, #천지문과 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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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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