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혹자는 아픈 곳이 중심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세상의 중심은 어디일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몰랐던 중국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에 퍼져 나간다고 믿었다.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이다. 하지만 세상물정을 모르고 우쭐대던 중국인들은 한때 유럽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여기저기 물어뜯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사돈 남 말 한다"는 말은 우리 선조들이 세웠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도 쇄국정책으로 사방에 물어 뜯겼던 아픈 역사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한때 찬란한 문명을 일으켰던 잉카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에서 돼지를 키웠던 피사로가 이끄는 200명 군대에 8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렸던 잉카황제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혀 처형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고 살던 잉카인들은 쿠스코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겨 '쿠스코', 즉 '배꼽'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쿠스코는 황금에 눈이 먼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에 처참하게 찢겼다.
잉카전설에 따라 퓨마 형상을 한 쿠스코... 훌륭한 석조건축물
남미여행 7일차는 쿠스코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잉카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발 3395m에 자리한 쿠스코는 잉카제국 제9대 황제 '파차쿠티'가 정비했다. 쿠스코는 크게 북서와 남동으로 구분한다. 북서반부는 '위쪽'이라는 뜻으로 '아난쿠스코', 남동반부는 '아래쪽'이라는 뜻으로 '우린쿠스코'라고 부른다.
도시의 두 부분은 다시 각각 둘로 나뉘어 네 구역을 형성한다. 도시는 중심부에 있는 '꼬리칸차'에서 방사상으로 뻗어나가 41개의 선상에 328개의 성소가 배치되어 있다. 꼬리(Qori)는 '황금', '깐차'(Kancha)는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황금이 쌓여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꼬리칸차' 신전의 온갖 도구는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16세기 이곳에 쳐들어온 스페인 군인들은 황금을 몽땅 떼어간 후 신전의 지붕을 해체하고 남아 있는 석축 위에 산토도밍고성당을 지었다. 1550년에 짓기 시작한 성당은 100년이나 걸려 완공됐다.
그 후 1650년과 1950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성당은 부셔졌으나 잉카인들이 세웠던 석축은 오늘날까지 끄떡없이 남아 있다.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잉카 석조건축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 있다. 쿠스코 중심인 메인광장에서 대성당과 라꼼빠니아 데 헤수스 성당을 지나 꼬리칸차 방향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관광객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다. 이른바 로레토 길(12각 돌)이다.
서로 먼저 사진을 찍으려고 다투는 관광객들을 헤치고 들어가니 건축을 지탱하는 석벽들이 나타났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12각 돌. 각진 부분을 손으로 세어보니 12개다. 기계가 없던 시절 인간의 손으로 이 같이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을까? 쿠스코에 있는 태양 신전이나 수많은 담벼락, 싹사이와망 요새, 마추픽추, 오얀따이땀보 등 잉카인이 만든 석조건물의 정교함은 그 어떤 건축물에도 비할 수 없다.
잉카인은 수십, 수백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들을 면도칼이나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도록 맞춰 "외계인이 쌓았다"라고 추측하거나 "잉카인들은 돌을 부드럽게 하는 풀을 알고 있다" 등의 억측을 낳게 할 정도였다.
그릇에 대한 일반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잉카인들의 토기문화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문명, 특히 잉카문명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발달한 토기문화이다. 잉카인들의 예술혼을 보기 위해 잉카박물관을 방문했다. 잉카박물관은 찾기 쉽다. 쿠스코 메인광장 한 쪽에 있는 대성당 왼편 길을 따라 50여m 올라가면 된다.
입장권을 끊고 박물관에 들어가니 잉카고대 유물이 부문별로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된 그릇들을 마주하니 우리가 일상 보았던 그릇에 대한 개념과는 판이했다. 사람형상을 한 그릇, 퓨마 모양을 닮은 그릇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그릇에는 다양한 색깔을 칠한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흙으로 만든 토기를 토기, 도자기, 사기 세 개로 분류하지만 이곳에 전시된 토기를 설명하는 글에는 세라믹이라고 씌어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사진촬영금지'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잉카의 뛰어난 토기들을 사진에 담고 싶은 욕망이 들어 담당 직원을 찾아가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촬영하고 싶다"며 명함을 내밀자 고개를 끄덕여줬다.
플래시가 터지지 않는 핸드폰으로 하나씩 사진을 찍으며 유리창 앞에 붙은 설명문을 읽는 동안 잉카인들의 토기에 감탄했다. 다양한 모양의 인간과 동물뿐만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문양까지 그릇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흔히 중국과 고려자기를 세계 최고라고 들었다. 그러나 잉카인들의 토기를 바라보면서 오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서 두 시간여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서 잉카 문명에 무지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누가 이들을 미개한 원주민이라고 했는가? 잉카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문화적 야만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굴까?"가 궁금해져 자료를 찾아봤다.
몬테시노스와 라스카사스 신부... "이들 인디오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까?"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100>에 의하면 정복자들이 신대륙 원주민들에게 행했던 '야만'에 대해 일부 스페인 성직자들은 강하게 비판했다. 도미니크회 성직자인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에스파뇰라섬에서 행한 설교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당신들은 자기 땅에서 평화롭게 사는 원주민에게 그토록 천인공노할 전쟁을 벌여 왔습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몬테시노스 신부의 설교를 들은 라스카사스 신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야만'에 대한 비판에 불을 댕긴 사람은 콜럼버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였다. 스페인의 식민정책을 둘러싼 2개의 노선대립은 카를로스 1세의 지시로 1550년에 열린 바야돌리드 궁정 토론에서 정리된다. 다음은 스콜라 철학자 세풀베다의 주장이다.
군사적 정복이야말로 원주민을 가톨릭교도로 바꾸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원주민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결코 인간이 아닌 문화적 야만인이므로 이들이 선진 유럽문명에 복속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라스카사스 신부가 대답했다.
식민지에서 스페인 국왕이 해야 할 일은 스페인의 정신을 신대륙의 식민지에 심는 것이고 원주민의 토지 소유권 역시 '자연법과 국제법'에 따라 존중되어야 한다. 정복 이전의 원주민 사회는 관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질서를 가진 공동체였다
이 논쟁 후 카를로스 1세는 라스카사스 신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주민 노예제를 폐지하고 원성이 자자했던 엥코미엔다 제도의 세습을 금지시켰다. 엥코미엔다는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 령 식민지에서 스페인 국왕이 식민자에게 원주민 통치를 위임한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통치자들은 원주민들에게 공납이나 부역을 부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