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포기? 포기라는 건 간절해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난 자발적으로 선택했을 뿐이야."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자신이 비혼임을 밝히며 했던 말이다. 그의 말인즉슨, 자신은 결혼이라는 것이 전혀 간절하지 않은데 굳이 결혼을 '포기'한 사람으로 비춰질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와 같은 세대인 나 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애와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경력, 인간관계 등등 소위 행복을 위해 갖춰야 한다는 N개의 요소들에 대한 간절함에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이를 포기하는 청년세대를 'N포 세대'라는 자조 섞인 표현으로 부른다는 사실 또한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다.

그런데 요즘, 이 '포기하는 청년들'에 대한 세대 담론이 이제는 해묵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다가 결혼에 골인해서 아이를 셋 넷씩 낳고 하하호호 사는 게 행복일 것이라고 여겨오던 나였다. 그런데 그게 왜 행복인지, 과연 그것만으로 진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때면 뭔가 막연했다. 반면에 저것들을 추구하지 않는 주변 친구들의 논리는 훨씬 확고했고, 심지어 그러한 선택을 한 자신이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들이 가진 확신의 바탕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기성세대들이 전통적인 행복의 요소로 여겨왔던 많은 것들(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더 이상 간절히 추구해야만 하는 '행복'의 요소가 아닌 것이다. 지금 청년세대가 삶을 대하는 정서는 '행복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행복을 위한 선택'에 더욱 가깝다. 인생의 디폴트값으로 여겨지던 수많은 명제들을 부정하는, 오히려 그 정반대(비혼, 비출산, 1인 가구 등)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생이 진정한 행복의 방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물음이 생긴다. 글쎄, 우리가 행복을 포기한 적이 있었나? 그저 내 행복을 위해 그런 삶의 방향을 선택했을 뿐 아닌가?
  
'N포 세대'에 담긴 꼰대의 철학
청년세대를 빗댄 'N포 세대'라는 표현이 내심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표현에 담긴 꼰대들의 철학에 나를 비롯한 청년들이 더 이상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처음에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포기하는 세대라는 이 단어의 뜻은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을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로, 청년들이 포기하는 이유를 그들의 능력 탓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청년들의 삶의 처지를 비웃을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요새 젊은것들은 뭐가 힘들다고 저리도 쉽게 포기하는 거야? 나 때는 말야..." 

그들이 치러온 자랑스러운 인생 역경의 서막을 알리는 도입부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시대가 흐르고 청년들의 인식이 달라져도 많은 꼰대들은 젊은 세대와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아가 그러한 선택이 그저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지레짐작한다.
  
그들이 정해놓은 행복의 기준을 추구하지 않을 때, 그것을 '포기'라고 표현하는 순간 청년세대의 결정은 능력과 의지 부족의 문제로 정의 내려지기 쉽다. 나아가 '실패'하고, '변명'하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물론 이런 취급은 부당한 것이나, 걱정하지 말자. 우리가 이를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나의 결정은 자유로운 개인의 취향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다양성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랖 넓은 꼰대들이 내 인생에 대해 대놓고 웅앵웅하기 시작하면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고 시크하게 한마디만 던지면 된다. 얼마나 편하고 깔끔한가? 앞으로 포기라는 단어는 배추 셀 때나 쓰도록 하자.
 
    꼰대들의 철학, 그들만의 진리, 그들만의 화법. 지긋지긋하다.
  꼰대들의 철학, 그들만의 진리, 그들만의 화법. 지긋지긋하다.
ⓒ JTBC

관련사진보기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 청년들은 왜 행복에 대해서 기성세대들과는 이토록 다른 기준을 가지게 된 걸까? 이전까지 기성세대들에게 삶의 행복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청년들의 삶에 불행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 '불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청년들이 스스로 '확실한 불행' 속에 나를 던져 넣어야 하는 역설적인 현실 때문이다. 만약 청년이 자기 인생을 요리처럼 마음대로 조리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음, 좋아. 행복해지기 위해 내 인생에 첨가할 만한 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골라볼까? 일단 결혼은 별로야... 출산은 말할 것도 없고! 난 집도 없고 차도 없는데, 결혼까지 하려면 죽도록 일만 해야 할 거야. 운 좋게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고 나면 내 경력은 단절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결혼과 출산 대신 난 취미와 인간관계를 선택하겠어. 내 행복과 질 좋은 삶을 위해서는 그게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느라 아등바등 경쟁으로 내몰리는 삶 자체를 불행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여건들을 달성하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는다. 쿨하게 등을 돌려 나만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여러모로 살기 힘든 '헬조선'을 등지고 '탈조선'을 감행하며, '큰 행복'을 얻기 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추구한다. 당당히 '혼자'의 삶과 소비를 즐기며 '결혼'하지 않고, 혹여나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에 하나 선택의 결과가 생각보다 그리 행복하지 않더라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불행'은 피했으니까(!).
  
다만 불행을 피하는 것이 진짜 '선택'하는 삶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행위가 '선택'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결정은 불행해지지 않겠다는 각오에 떠밀려져 불완전해진 것은 아닌가? 선택에 따른 삶을 살아내는 것은 분명 우리의 몫이지만, 그 선택의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것은 왜일까? 애초에 행복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을 청년세대에게 강요한 것은 기성세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청년들에게 행복해지기 위해 달성해야 할 과제와 목표들만 던져준 채, 그것을 쫓아갈 힘과 방법을 마련하는 것에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방치된 채 행복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불행을 피하는 방법을 먼저 고민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청년들의 행복의 기준이 달라지고 이전의 행복이 우리에게는 불행으로 작용하게 된 데에는 무작정 "아프니까 청춘"이며, "노오력하지 않는 니들 탓"만을 외쳐온 기성세대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모든 선택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까 사실 이 글은 청년들의 세대 담론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이러한 사태에 책임을 가진 이들을 겨냥한 글이다. 청년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 하는 기성세대와 청년 정책을 외면하는 국회, 정부를 향한 분노의 메시지다. 청년들의 힘든 처지를 해결해줄 생각은 1도 없으면서 간섭이나 해대는, 소위 '꼰대'들에게 대놓고 드러내는 냉소와 기만이다. 청년세대의 개인주의가 사회를 붕괴시킬까, 청년들이 결혼을, 출산을 안 해서 인구가 줄어들까 걱정하고, 탈조선의 이유가 헬조선이 아닌 청년들의 덜떨어진 애국심과 나약함 때문이 아닐까 고민하는 그들은 청년 문제에 대해 무능하다.   결국 청년세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청년들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이 불행을 피하는 선택이 아니라, 행복과 또 다른 행복을 저울질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청년들의 불행을 어루만지고 지원해줄 수 있는 청년 정책과 그러한 정책들을 국회에, 정부에 제안하고 요구함으로써 조금씩 이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청년들이여, 우리의 선택을 당당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요구했으면 좋겠다. 모든 선택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덧붙이는 글 | 해당 칼럼은 서울청년정책LAB 블로그 및 페이스북을 통해 2018년 12월 29일 발행된 칼럼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청년오픈플랫폼 Y는 청년문제 해결을 위해 능동적인 민관협치를 통한 자발적 시민네트워크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단법인입니다. 청년정책 연구, 거버넌스 교육 및 공론장 운영등의 사업을 진행합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