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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한반도기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 힘>사무실에서 만난 청년 김선재.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한반도기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 힘>사무실에서 만난 청년 김선재.
ⓒ 권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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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된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수줍었지만 솔직했다. 질문에 답할 적절한 언어를 고르느라 생각을 가다듬는 모습에서는 신중함이 묻어났다. 인터뷰 시작 전까지도 컴퓨터 화면에서 눈과 손을 떼지 못하고 시간을 쓰던, 사무실 공간의 더운 공기까지 바삐 움직이는 듯한 기운을 감지하며 청년 활동가 김선재를 마주했다.

지역의 청년이며 진보단체 활동가인 김선재가 말하는 개인의 서사는 평범하진 않으나 분명 그 흐름 속 당위를 지닌다. 반민주적 현장을 외면하지 않았던 학생 운동 시절부터 카이스트 소셜메이커, 세월호 유리병 편지, 민중당 한빛분회로 이어진 대학생·청년 연대 활동. 멈추지 않고 장애인, 여성, 청년, 학생, 노동자, 도시빈민 등 민중의 생존권 문제와 인권 가치를 실현하는 개별적 단체들의 연대체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 힘' 활동가로 사는 일까지.

어떤 이유로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는 이런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의 선택적 삶 속에서 이 사회의 다양한 비극이 나열되었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를 비롯한 당면한 문제까지 재인식할 수 있었다.

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열악한 근무 환경 속 야간 근무 중 컨베이어 벨트에 낀 스물넷 젊은 청년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 유품으로 발견된 컵라면이 낯설지 않았다. 2016년에도 구의역에서 열아홉 청년이 승강 안전문을 고치다 열차에 끼어 사망했다. 그때도 유품으로 먹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다. 가슴 아픈 죽음의 반복. 연쇄 죽음을 일으킨 주체가 비인간적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강렬한 투쟁의 기억, '죽음'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둘레길 프로그램에서 해설을 맡았던 청년 활동가 김선재. 식민과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고 새로운 현충원을 함께 인식하고자 묘역을 돌며 해설하였다.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둘레길 프로그램에서 해설을 맡았던 청년 활동가 김선재. 식민과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고 새로운 현충원을 함께 인식하고자 묘역을 돌며 해설하였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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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실제 4대강 사업과 환경오염 등으로 강산은 변했지만 자본·권력의 힘으로 인한 고통은 십여 년 전과 지금이 다를 것이 없다.
 
"처음 갔던 집회부터 다 기억나요. 5.18집회, 주한미군 투쟁 집회…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구나. 잘못되었구나. 그전까지의 세계관이 다 깨지는 순간이었어요. 많이 따라다녔어요. 무섭기도 했었고. 아… 무섭더라고요. 평택 미군 기지 반대투쟁 갔을 때는 진짜…"

평택 미군 기지 이전 문제로 2006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국방부는 경찰과 용역 병력 투입을 통해 논을 파헤치고 건물을 부수며 평화롭던 주민들 삶에 폭력을 가했다.
 
"대학 1학년 내내 농활을 갔어요. 거기서 만나 친했던 농민 한 분이 계세요. 전용철 농민이라고. 돌아가셨어요. 그때 여의도에서 쌀수입개방 반대 집회를 열었는데 무리한 폭력진압에 당했고 뇌출혈이 와서 돌아가셨단 말이에요. 충격이었어요.

서울대 병원을 갔는데 중환자실에 계시니까 사람이 많이 못 들어간대요. 저랑 제 동기 한 명이 들어갔는데, 아…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눈만 나와 있는데 의식은 조금 있으시더라고요. 왔냐고 하신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며칠 후에 돌아가셨어요. 전 그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투쟁 열심히 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고 결국 받아냈죠."

2005년 11월 15일 "쌀협상 국회 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에서 경찰 진압에 의해 뇌출혈을 일으킨 전용철 농민이 11월 24일 사망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깊은 고민에 시달렸어요. 누군 죽었잖아요. 그 사건 전엔 배운 것을 실천하는 정도였으니까요. 실천이라고 하는 건 유인물 돌리고 서명운동 하는 게 다였는데. 운동권으로 계속 살 것이냐 말 것이냐. 만약 계속 살 것이라면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 질적으로 고민이 달라진 시기였어요."

충격으로 다가온 비인간적 폭력과 죽음은 그의 대학생활이 처음보다 더 깊숙하게 사회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카이스트는 2006년 부임한 서남표 총장의 '서남표식 개혁'으로 인해 날 선 바람이 불 때였다. 개교 이래 우수학생 유치를 목적으로 등록금 전액을 국비로 지원했던 카이스트는 2007년부터 일정 학점 이하의 경우 차등적으로 등록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8학기에 졸업을 하지 못하면 연차가 초과되었다는 이유로 학업이 제한되었고, 한 번 낙제한 과목에 대해서는 재수강 금지령이 내려졌다. 100% 영어수업도 당시 서남표식 개혁 바람의 일부였다.
 
"동료 학생들 모아서 반대 운동을 열심히 했죠. 1인 시위도 하고 정책 개선 연구도 하고. 학교 안에서 투쟁을 많이 했었어요. 2011년에는 카이스트에서 학생 네 명이 자살을 해요. 서남표 총장을 진작 몰아냈으면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부채감이 들었어요."
 
4.3항쟁 70주년 기념 대전 청년학생 평화통일 창작 전시회(2018.11.30.)는 대전 궁동 욧골공원에서 진행했다. 청년 활동가 김선재가 주축이 되어 기획한 행사였다.
 4.3항쟁 70주년 기념 대전 청년학생 평화통일 창작 전시회(2018.11.30.)는 대전 궁동 욧골공원에서 진행했다. 청년 활동가 김선재가 주축이 되어 기획한 행사였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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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감'이란 말

생소했다. 빚을 지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는 이야기 도중 부채감 이란 말을 자주 썼다. 죄 없는 청년을 통해 한껏 웅크린 언어가 세상에 꺼내진 듯한 기분.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그와 부채감.
 
"처음엔 듣는 것도 싫어했어요. 부채감이란 말은 자기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남들 때문에 한다는 표현 같아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지금 드는 생각은 그래요. 바로 앞서 민주화 세대가 있었고 그전엔 독립운동 세대가 있었고. 일제 식민지부터 해방까지 싸웠던 분들이 수없이 많고, 그분들이 비참하게 돌아가시기도 하셨죠.

산내에 가면 7000명이 묻혀 있는데, 너무 억울한 죽음이잖아요. 이른바 적폐 세력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 많죠. 제주 4.3도 그렇고. 위안부 할머니 오열하는 것 보고 같이 울었어요. 그런 분들의 사연을 알아갈수록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 같이 사는 세상인데 그런 분들의 아픔과 노력을 외면하기엔 너무 미안하잖아요."
   
<유리병 편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전지역의 대학생과 20대 30대들의 모임>을 통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피켓시위를 진행했던 청년 활동가 김선재
 <유리병 편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전지역의 대학생과 20대 30대들의 모임>을 통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피켓시위를 진행했던 청년 활동가 김선재
ⓒ 유리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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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세월호 참사는 그가 군대를 제대한 2016년까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촛불로 탄핵을 이루기까지 박근혜 정권은 절망이었다. 2016년 7월부터 시작하여 세월호 리본 나눔, 엽서 만들기를 비롯한 특조 위원 초청 강연회, 세월호 오픈 스터디 등의 활동을 진행하며 작은 연대를 실천한 유리병 편지. '유리병 편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전지역 대학생과 20-30대들의 모임'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청년들의 마땅한 행동이었고 상징이었다. 웅크린 부채감이 그를 포함한 청년들을 통해 입으로 몸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 모두의 부채감이기도 했다.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힘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힘
ⓒ 권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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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지 않는 힘은 연대에서 온다

김선재가 활동하는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 힘'은 민중이 사회 주체가 되는 진보적 가치를 실천하는 연대체이다. 총 11개의 단체가 함께한다. 노동자, 노점상, 도시빈민, 여성, 장애인, 청년, 학생, 진보 정당 등 각계각층의 삶의 주인들이 모여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행동한다.
 
"민중이란 말은 사실 계급적인 관점이 녹아있다고 생각해요. 지배계급의 모순을 타파하고, 민중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민중의 생존권과 민중진영의 가치를 실현하는 게 목표인 거죠.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면서 쭉 그렇게 갑니다."

고 김용균씨의 죽음 이후 2년 여간 묵혀 왔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심사가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상정된 법안을 두고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이러다 나라 망하게 생겼다"라는 고성을 남발했다는 이장우 자유한국당 의원의 기사를 읽으며 또 한 번 분노한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은, 일반적으로 학습화된 힘의 논리와 확연히 갈라선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힘과 맞서기 위해 연대체를 공고히 하며 죽이지 않을 힘을 키운다. 청년 활동가 김선재의 십여 년 삶이 그랬다.

지난 12월 19일과 20일 대전에서는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님의 추모와 진상 규명을 위한 촛불집회가 있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의 거대한 붉은 물결을 거둬들인지 얼마 안 된 시점, 여전히 휘발되지 않은 힘을 본다.

태그:#김선재, #대전민중의힘, #청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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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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