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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집에 가면 당신 뻘의 부모님이 계십니다

몇 개월 정도, 편의점 심야시간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의 일이다. 새치가 드문드문 나 있는 중년의 남성이 담배를 주문했다. 그는 이런저런 말을 하다 거의 계산을 마칠 때 쯤 '반말을 해서 미안한데, 집에 비슷한 또래 자식이 있어서 그래요.'라고 말을 하며 꽤나 머쓱하게 돌아섰다. 심야 시간대 편의점이 으레 그렇듯, 손님들 중 대다수는 반말을 하기 일쑤이다. 피곤함이 더 커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막상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만약 내가 여성이었으면, 그런 말조차 했을까 싶다)

소위 '청년'이라 불리는 2030들은 어느 장소에서건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봤을 법한 일이다.  '집에 가면 너만한 자식이 있어서'라거나 '내 아들/딸 같아서 그래'라는 말 한번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추측컨대 나름대로 공통점을 표현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혹은 그래서 그대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을 나는 다 이해한다는 표현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저도 집에 가면 당신 뻘의 부모님이 계십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번번이 삼킨다.
 
   물론, 저는 절대로 이렇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절대로 이렇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 웹툰 연애의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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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보다 높은 세대 간 장벽

일부에서만 쓰이던 은어인 '꼰대'라는 표현이 이제는 표준어나 다를바 없이 널리 쓰이고 있다. '부장님'으로 상징되는 50대 이상 남성에 대한 감정은 불편을 넘어 혐오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경험과 배움이 다르고, 살아온 시기가 다르기에 세대 간에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세대 간의 차이가 차별을 넘어 불평등의 수준으로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취업에서도, 내 집 마련에서도, 결혼과 보육에서도 지금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이 부모세대 보다 훨씬 더 암담하다. 문제는 이것을 현실에서 매일매일 체감하는 청년들과 자신이 '청년이었을 때'를 기준으로 청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 사이의 인식차이다. 

당사자에게는 죽을 만치 압박스러운 고통이 치기어린 투정으로 보인다면,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 형성은 고사하고 대화조차도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부모와 자식간에 수많은 갈등과 언쟁이 벌어지는 큰 이유일 것이다. 
 
   청년들이 눈이 높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눈이 높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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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게 아니고,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눈높이가 높은 것이 아니라 급여, 노동시간 등 노동의 질이 낮기 때문인 것이다. 도전의식이 없어서 안정적인 공무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IMF를 통해 실직의 공포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거부터 출산, 보육까지 도저히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출산 후 다시 나의 일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가혹하고, 여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노력은 실로 절박하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발언하고 행동할 때마다 세대 간의 장벽은 한 칸 한 칸 높아질 뿐이다.
 
   그리고 상처는 고스란히 개인이 감수하게 된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가?
  그리고 상처는 고스란히 개인이 감수하게 된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가?
ⓒ 2015 서울청년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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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고 싶은 만큼 대접하라

어디 이것이 부모 자식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문제일까. 분야와 영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참신함은 원하지만 리스크는 회피하고, 과업은 부여하되 지원은 부재하고, 권한은 주지않고 책임만 떠넘기는 사례는 차고 넘치게 볼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은 지금의 문제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지배하고 미래를 제약해서는 곤란하다. 경험이 없기에 미숙하고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렇기에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전에 없던 혁신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청년을 존중한다는 것은 우는 아이 달래듯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어 어려움을 해결해주려 나서는 것이 아니다. 인식 차이를 인정하고, 당사자의 문제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상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는, 초면에 반말을 하지 않고, 내 자식을 투사해서 바라보지 않으며, 작건 크건 권한과 책임을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왠지 불편하고 일방적으로 느껴진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전해지는 이 황금률을 기억하자. '너희가 남에게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중은 일방적이지 않다. 존중한 만큼, 존중받기 마련이다.

덧붙이는 글 | 해당 칼럼은 서울청년정책LAB 블로그 및 페이스북을 통해 2018년 6월 13일 발행된 칼럼입니다. 글쓴이는 김희성 서울시 청년명예시장(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실행위원) 입니다.


태그:#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서울청년정책LAB, #청년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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