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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하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
 조지 하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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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붕괴하던 대격변기에 제41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 부시'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 시각으로 11월 30일 오후 10시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텍사스주 자택에서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닷새 뒤인 12월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하고 국장을 준비하고 있다.

세상과 작별한 아버지 부시에 대한 한국 언론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다. 경제 문제로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탈냉전으로 세계질서가 격변하던 시기에 걸프전쟁에 승리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부시가 미국 현대사에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극 체제의 문을 열어젖힌"이라고?

<한겨레신문>도 마찬가지다. 12월 2일 자 <한겨레신문>은 워싱턴 특파원 명의의 '냉전 해체 이끈 미국 대통령 역사에 잠들다... 조지 허버트 부시 별세'라는 기사에서 "전 세계를 핵 절멸의 공포에 떨게 한 냉전을 극복하고 미국 일극 체제의 문을 열어젖힌"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한 뒤, 부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간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침내 1989년 12월 2일, 미-소의 정상이 전제조건 없이 지중해 몰타섬에서 만났다. 고르바초프는 그에게 '평화로 가득한 새 시대'의 희망을 얘기했고, 부시는 그것이 바로 당신과 내가 만들기로 한 미래의 모습이라고 화답했다. 냉전은 평화롭게 해소됐다."
 
부시에게 냉전 해체의 공을 돌리려 하다 보니, 냉전의 해소 시점을 1989년으로 앞당겨 잡게된 듯하다. 유럽 냉전은 1990년 10월 독일 통일과 1991년 12월 소련 해체로 해소됐다. 부시에 대한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 죽은 이를 후하게 평가해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에서 냉전 해소 시점까지 앞당기면서 덕담을 내보낸 걸까.

부시는 평탄한 시기가 아니라 세계질서가 요동치던 1989~1993년 기간에 세계 최강 미국을 이끌었다. 그런 인물에 대한 평가라면 좀 더 공정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석에서라면 몰라도 언론보도에서, 덕담 일변도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보다 공정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부시가 미국 현대사에 공(功)뿐 아니라 과(過)도 미쳤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제3자 관점을 배제하고 미국인의 관점으로 평가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세계사가 아니라 미국 현대사에 미친 그의 기여도라는 관점에서 평가한다고 해도 결론이 달라지지 않는다.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
 
 유엔주재 미국대사 시절.
 유엔주재 미국대사 시절.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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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은 부시가 대외관계에서 업적을 남겼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켰다. 이라크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1991년 1월 이라크를 상대로 걸프전쟁을 일으켜 대승을 거둔 점을 치적으로 꼽았다.

부시가 1989년(당시 65세)에 노리에가 정권의 전복을 목적으로 파나마를 침공한 것이나 1991년(67세)에 취약한 명분을 내세워 걸프전을 일으킨 것은, 소련의 영향력 약화로 미·소 양강 구도가 흔들리던 상황을 틈타 미국의 유일 지배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였다. 미국인의 관점에서는 업적이라 할 만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제3자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부시는 문제가 좀 있는 지도자였다. 그런 중차대한 시기에 부시가 자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하게 되면, 소련 해체 이듬해인 1992년 11월 대선에서 그가 '외교 문외한'이나 다름없던 빌 클린턴에게 패배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부시는 1970년(46세)부터 유엔주재 미국대사로 일했고, 1973년(49세)부터 2년간 미·중 베이징 연락사무소장을 지냈다. 이 당시의 활동에 힘입어 그는 '외교의 달인'이란 평가를 얻었다.

1992년(68세) 대선에서 부시는 이것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외교의 중요성이 높던 시절이므로 그럴 만도 했다. 역사저술가 조셉 커민스(Joseph Cummins)가 쓰고 번역가 박종일이 옮긴 <미국 대통령선거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부시는 또 클린턴과 고어(클린턴의 러닝메이트)를 가리켜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집 개 밀리가 민주당의 두 녀석보다 더 많이 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기 집 개보다 못하다는 클린턴-고어 팀에게 부시는 결국 패했다. 클린턴이 부시보다 인간적 매력이 풍부하기는 했지만, 걸프전이 벌어졌던 1990년만 해도 이런 결과는 예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90년, 100시간 만에 걸프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직후의 조지 부시에 대한 지지도는 90%에 이르렀다. 그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 위의 책 
  
재선 무난해 보였던 '아버지 부시'가 패한 이유
 
 걸프전쟁 현장을 방문한 아버지 부시.
 걸프전쟁 현장을 방문한 아버지 부시.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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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선이 무난해 보였던 부시가 클린턴에게 패한 것은 1차적으로 경제문제나 양극화 때문이었다. 유명한 저축대부조합 사태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 부실 대출로 인한 저축대부조합들의 집단 파산이 금융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부시 행정부가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영향을 미친 게 또 있다. 부시 자신이 강점으로 자부했던 외교와 관련된 것이다. 냉전이 해체돼 라이벌 소련이 사라진 뒤 미국 외교의 패러다임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그는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것이 재선 실패를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외교 패러다임 정립 과정에서 부시의 리더십이 약했다는 점은, 미국이 유일 최강으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시점에 미국 여론이 양분된 일에서 잘 드러난다.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탈냉전, NAFTA, 그리고 미국 외교정책의 재조정'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편에서는, 경쟁자가 사라진 세계의 황야에서 그동안 미국이 꿈꾸어왔던 이상향을 이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의 채찍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악마가 사라진 세계에서 미국이 더 이상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으며, 미국은 이제 대외문제보다는 국내문제와 개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공화당 내부에서도, 미국은 이제 냉전 시기의 개입주의를 탈피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로 회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 2014년 한국미국사학회가 발행한 <미국사 연구> 제39권에 수록
 
부시는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꿨다. 하지만 국민 여론을 그쪽으로 유도하는 데 실패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국가적 역량을 그리로 투입할 기회를 얻지 못해다. 미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팍스 아메리카나'를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부시는 자기 임기 동안에 소련이 망하는 행운을 맞이했으면서도. 이를 활용해 미국 사회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끌고 가지는 못했다. 되레 대선 기간에 '바보야, 문제는 바로 경제야'라는 구호를 외치며 돌진하는 21세 연하의 빌 클린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미국에게 1991년이란

미국 입장에서 볼 때, 1991년은 1945년 못지않은, 어쩌면 더 좋은 기회였다. 미국은 1945년에 소련과 더불어 '양대 최강'으로 떠올랐다면, 1991년에는 소련 해체에 힘입어 '유일 최강'으로 떠올랐다. 이런 때에 미국 대통령을 지내놓고도 그는 여론을 주도하지 못했다. 기회를 맞고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준비된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인한 부정적 결과가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시는 물론이고 클린턴을 비롯한 역대 후임자들은 미국 일극체제를 확실한 반석 위에 올려놓지 못했다. 냉전이 해소된 뒤에도 새로운 세계질서를 안착시키지 못해 혼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되레 미국은 세계 각국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여전히 최강이기는 하지만,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적 도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촌 상황에 대한 통제력이라는 측면에서, 냉전 이후의 미국이 냉전 당시의 미국보다 낫다고 볼 만한 근거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정착시키기는커녕 유일 최강에 걸맞은 상황 통제력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은 1993년 이후의 북미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유일 최강' 등극 직후에 벌어진 제1차 북핵 위기 때, 부시의 후임자인 클린턴은 북한을 제압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제네바합의로 사태를 봉합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8년간은 북핵 문제에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이로 인해 2018년이 된 지금까지도 미국은 계속 북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부시 입장에서 보면, 1994년에 대북관계가 실패한 것은 외교력이 약한 클린턴에게 정권을 내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제1차 북·미 핵위기가 터진 데는 클린턴의 섣부른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1993년 1월 취임한 빌 클린턴은 부시의 대북정책 기조를 무시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을 수용하지 않으면, 대북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해 북미관계를 크게 악화시키고 말았다.

전임자 부시는 북한의 요구조건을 부분적으로나마 들어주는 방법으로 북한이 IAEA에 핵 물질을 신고하도록 유도했다. 부시가 들어준 요구조건은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중지 및 주한 핵무기 철수였다. 이 같은 부시의 조치는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연결되고, 이 흐름이 그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로 이어졌다.

부시는 이라크나 파나마에 했던 것과 달리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인내심을 발휘했다. 김정은과의 대화를 위해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지시킨 도널드 트럼프에 비해 훨씬 더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죽기 얼마 전에 빌 클린턴(오른쪽)의 방문을 받은 아버지 부시.
 죽기 얼마 전에 빌 클린턴(오른쪽)의 방문을 받은 아버지 부시.
ⓒ 아버지 부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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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구슬려 가급적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부시는 트럼프보다 훨씬 유연하고 포용력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정권을 지켜 대북관계를 계속 관리했다면, 북미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부시는 리더십 발휘에 실패해 클린턴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외교 문외한'이 북한 문제를 함부로 다뤘다가 일을 그르치는 과정을 목격해야 했다. 제네바 합의로 핵문제가 휴전에 들어가면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팽창에도 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전 해체의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패권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부시는 충분히 재선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부시의 리더십 실패와 클린턴의 외교적 실패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그런 일을 자초한 부시를 두고 '미국 일극 체제의 문을 열어젖혔다'고 평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 리더십 부재의 후폭풍... 중국의 부상

부시나 클린턴 이후의 미국이 새로운 질서를 안착시키지 못한 채 되레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은 중국의 급부상에서도 드러난다. 부시 때만 해도 중국은 미국의 라이벌이 아니었다. 그랬던 중국이 얼마 안 가 미국의 라이벌로 급격히 떠올랐다.

지금 중국은 3위권 국가들과의 격차를 벌리며 1위에 바짝 접근하고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추격을 따돌릴 수 없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가 금년 한 해 동안 그렇게 신경질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련 해체 이후 27년 동안 미국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북한·중국과 세계 각국의 도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국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시가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해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제3자 시각을 배제하고 미국인의 관점에 서더라도, 부시는 잘한 것에 비해 잘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 그는 미국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도록 만든 지도자다. 미국 현대사에 미친 부시의 '과'가 '공'을 초과한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 언론들은 죽은 이에게 덕담을 해야 한다는 인정에 너무 이끌리고 있다. 미국 현대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만 평가하고 부정적 영향은 평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시에 대한 언론보도는 절반만 유효한 보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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