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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내년이면 서른. 스스로 '불세출의 천재'라고 생각했던 내가 백수인 채로 30대를 맞이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입시에서 취업까지, 무한 경쟁의 연속에서도 안분지족의 정신으로 살아온 나는 뒤늦은 취업 준비를 시작하며 종종 좌절하곤 한다. 도대체 그 실효성을 알 수 없는 직무능력검사, 즉 'NCS'라는 낯선 시험을 만난 이후로는 더욱.

나는 몰랐다. 실무와 전혀 관계는 없지만, 소금의 농도를 계산할 줄 알아야 어느 회사라도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영희와 유미가 각자 다른 속도로 걷다가 몇 분 만에 약속 장소에서 만날지 알아야만 면접관 앞에서 나를 소개할 자격을 겨우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차, 시험 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계도 있다. 바로 인성검사. 이 단계에서는 무조건 쾌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지만 기꺼이 조직의 규칙을 따르는 '인싸'가 되어야 한다. 인성에 정답은 없다고 하지만 '취준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도무지 그 답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라 슬프다. 나는 내가 아니어야만 '취뽀'('취업 뽀개기'의 줄임말. 얼마나 취업하기가 어려우면 '뽀갠다'고 할까)를 할 수 있다.

억울하다. 고작 인생의 3분의 1을 살았을 뿐인데 이미 늦었다니. 실패할 기회마저 사치라는 생각에 작아지는 버섯을 먹은 슈퍼마리오 마냥 자존감이 쑥쑥 줄어든다. 취업시장에서는 30대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진실도 한몫 한다. 공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면 뭐하나, 내 성별이 탈락 사유라는데.

게다가 취업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인문학을 학부와 석사 과정까지, 총 8년이나 전공했으나 어학연수, 국외인턴 경험도 없는 나는 암담한 게 맞다. 할아버지는 이런 내가 의아한지 "우리 지혜는 많이 배웠지 않느냐"라고 묻는다. 더 멀리서, 더 오래 배운 이들 사이에서 석사학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취업 면접

"실물이 훨씬 예쁘네. 증명사진 다시 찍는 게 낫겠어요. 실물이 500배는 낫네."

대학교 계약직 연구원 면접에서 들은 첫 마디. 그나마 갖고 있는 유일한 경력인 1년짜리 인턴 경험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한 자리였다. 고작 '얼평'이나 듣자고 학교의 연혁, 비전, 해당 학과의 교육 목표와 커리큘럼까지 달달 외워간 것이 아닌데... 이후에도 실망스러운 질문은 계속되었다.

운동은 하느냐. 별명이 무엇이냐. 을(乙) 주제에 감히 불쾌한 티를 내서는 안 되기에 미소를 잃지 않고 열심히 대답했다.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은 사회에서 원하는 긍정적인 인간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멀어서 최대한 밝고 명랑한 이름을 지어내서 말했다. 면접자들은 '어쩐지 그런 것 같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젠 끝이라고 안도한 순간, 방심한 나에게 경고라도 하듯 예상치 못한 질문이 이어졌다.

"카톡 봤는데, 프로필 사진이랑 상태 메시지는 무슨 뜻으로 쓴 거죠?"

사용자가 노동자 혹은 지원자의 SNS를 염탐하여 그를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준 사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채용 과정에서 그 사실을 당당히 밝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티 없이 맑은 교수의 질문인 즉, 오로지 채용 과정에서 연락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기입한 내 전화번호를 제멋대로 기기에 등록하여 메신저 프로필을 살폈다는 이야기다. 

타인의 개인 정보를 남용하여 사생활을 침해한 무례한 행동에 마음속으로는 웃음부터 났다. 내 프로필 사진은 고작 졸고 있는 아기 원숭이였기 때문이다. 대체 그 작고 소중한 원숭이에게 무슨 거창한 의미를 바랐던 건지 아직도 궁금하다.
 
면접 보러 가는 길. 시간이 마땅치 않아 버스에서 초코바로 해결한 점심. 늘 네덜란드에 가보고 싶었는데, 반가웠다.
 면접 보러 가는 길. 시간이 마땅치 않아 버스에서 초코바로 해결한 점심. 늘 네덜란드에 가보고 싶었는데, 반가웠다.
ⓒ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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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 장씩 복사하고, 커피 타고. 한 마디로 보조하는 일인데 괜찮겠어요?"
"외국 살다 온 경험이 하나도 없네요. 정말 없나요?"


위의 두 질문은 부산에 사는 내가 서울까지 KTX를 타고 가서 참석한 한 국가기관 무기계약 연구원 면접에서 들은 것이다. 연구원 채용공고에 나와 있는 직무 설명은 분명 이런 '보조 업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공고와 다르게 입사 후 보조 역할만 하게 될 테지만 국외 체류 경험은 있어야 하고 면접에 앞서 치른 영작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지원자가 되어 있었다.

공고와 다른 것은 둘째 치고, 사무 보조가 외국에서 살다 온 경험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당 기관이 국제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내 위치가 결코 보조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게다가 국외 체류 경험이 필수적이라면 왜 진작 공고에 명시하지 않았을까. 왜 모두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말하면서 내 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는지? 애초에 '너는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한글과 영어를 동시에 배운 데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영어를 접했다. 어학시험 점수만 좋은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현지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한 면접관이 (비)웃었다. 앞서 치른 영작 시험 결과를 본 다른 면접관이 외국에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영어를 잘 하는지 묻기에 대답했을 뿐인데.... 그 (비)웃음이 잊히지 않는다.

어차피 탈락이 확실한 마당에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이 외국에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살다 올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지 않다고. 외국에 살다 오는 것이 곧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나는 바란다. 부디 능력으로 평가받기를. 탈락이라도 좋으니 성별, 외모, 나이와 같이 불공정한 요소를 들먹여 나의 눈물겨운 '취준'에 비극을 더하지 않기를. 채용과정에서 직무와 상관없는 기준이 끼어드는 순간, 나는 바꿀 수 없는 것을 탓해야 하고 그것은 곧 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눈물이 앞을 가려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또렷이 알고 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내 꿈은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고심하며 고른 햄버거 세트와 요즘 정주행 중인 미드로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며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KTX 안에서.
 고심하며 고른 햄버거 세트와 요즘 정주행 중인 미드로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며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KTX 안에서.
ⓒ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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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두 면접에서 공통된 질문을 받았다.

"꿈이 무엇인가요?"

번역가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꿈마저도 평가받는 세상에서 '취준생'들은 꿈꿀 자유조차 없다. '꿈이 없다'고 말했다면 그들은 나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러고 보면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꿈이 없었다. 거듭된 구직 실패로 우울감에 시달리던 나는 매일 울다 지쳐 잠들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희망찬 질문이 '나 같은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초라한 확신으로 변할 때면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왈칵 눈물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헌데 그날은 달랐다. 울면 우는 대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밤새 생각했다. 직업이 아니라, 일을 생각했다. 나보다 잘난 이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나만의 결을 새길 수 있는 일. 동시에 작은 기쁨과 희열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로 번역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나의 일'에 대해 말했을 뿐인데, 면접관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년짜리 계약직 면접에서, 여기서 몇 년 동안 일할 생각이냐고 묻는 무기 계약직 면접에서, 그들은 대체 내가 무슨 꿈을 꾸기를 바랐던 것일까?

태그:#취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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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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