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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러브레터>를 쓴 일본의 소설가 아사다 지로. 그는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는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을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 말이 잘 이해되진 않았다. '하고픈 일은 너무 많지만,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뿐이지 않았을까'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한밤중에 강남귀신>을 쓰고 그린 김지연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사다 지로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한꺼번에 제가 가졌던 모든 게 사라지는 걸 봤잖아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사라질 수 없는 것을 남기자고 했던 것은…"

지난 10월 28일, 서울 성동구 마을문화카페 산책에서 열린 김지연 작가의 강연회에 참석했다. 작가는 어떻게 탄생하고, 무엇을 보고 왜 쓰는가에 대한 탐색이 두 시간 가까이 펼쳐졌다.
 
김지연 작가가 <한밤중에 강남귀신> 원본 그림과 그림책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이 일하는 우리들과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김지연 작가가 <한밤중에 강남귀신> 원본 그림과 그림책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이 일하는 우리들과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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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가졌다가, 모든 걸 잃었다

"저는 구미에서 자랐어요. 맞아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요. 제가 구미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전국 최고의 학교였을 거예요. 지원이 엄청났어요. 교실마다 티브이가 있어서 중앙방송을 했어요. 동물원, 식물원까지 있었으니까요. 옆 동네, 전국서 우리 학교로 견학왔어요. 부모님은 구미가 돈이 되는 동네라면서 이사하셨죠. 그곳에서 사업하며 돈도 많이 버셨어요. 돈을 자루에 넣어오셨으니까. 잘 살았죠. 그러다 대학에 입학한 후 어느 날, 집안이 폭삭 망했어요.

저는 고2 때 미대를 가겠다고 했고, 갔죠. 돈이 많이 들더라고요. 제가 대학 미술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하고 있을 때, 엄마는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었어요. 눈앞서 모든 게 사라지는 걸 보고선, 영원한 걸 남기고픈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졸업하고 결혼했죠. 서른일곱 살이 됐을 때, 그 마음에 대한 답이 필요했어요. 저는 시장에서 자란 사람인데, 시장에 계신 그분들은 미술관에 오실 수 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죠).

그림책을 택한 건, 그게 대중적이었기 때문이었어요. 만 원이면 누구든 접할 수 있는 '작업'이니까. 그림책 학교에 지원했어요. 면접과 포트폴리오 과정을 거쳐 합격했죠. 그 수업이 독하고 힘들어요. 40명을 처음에 뽑는데, 한 학기가 지나면 반이 사라지고, 두 학기 지나면 다시 반이 사라졌어요. 4년간의 수업 끝네 결국 책을 낸 건 저를 포함해 2명이었어요. 크리스마스 때도, 휴가 때도 계속 그렸죠."


김지연 작가가 처음으로 낸 책의 제목은 <부적>. "이 세상에 없는 책을 만들자"는 학교 기획회의 과제였다. 부적을 찾아 자료를 찾고, 전국의 무당을 수소문해 다니며 취재도 했다. "입이 돌아가고, 앉은뱅이가 될 것이야!" 용한 무당들은 야박했다.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부적 책을 냈던 한 무속인에게서 겨우 비밀을 들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진언과 한자 그림들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아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흉계'였다. 혹은 그들 자신도 잘 모르거나. 김 작가가 파악한 우리 부적의 갈래는 두 가지. 복(福)을 기원해 부르거나, 화(禍)와 재앙(災殃)을 막는 벽사(辟邪). 우리 부적은 그 안에서 귀신을 죽이거나 잡지 않고 그저 쫓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착한 심성이 그 안에 있는 것. 

<부적>은 <깊은 산골 작은 집>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판을 따로 냈다. 김 작가는 기원과 벽사의 기본 뜻은 그대로 두되 쉬운 해석을 달았다. 예를 들어 '꿈 부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부적을 가로로 세 번, 세로로
세 번 접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꿈을 마음으로
간절히 빌고 몸으로 노력하면
꿈을 이룰 날이 가까워집니다
꿈이 이루어지면
깨끗한 땅에 묻거나 태웁니다
 
김지연 작가의 판화작 <부적>(위)과 <한글비가 내려요>.  전통문화에는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우리들의 기원과 정서가 담겨있다. <깊은산골 작은집>이 출판문화대상 디자인 부문 수상을, <꽃살문> <한글비가 내려요>가 국제아부다비도서전 한국그림책 선정 51권에 선정되고서 전통문화를 다룬 이 책들은 서서히 인정받았다.
▲ 김지연 작가의 판화작 <부적>(위)과 <한글비가 내려요>.  전통문화에는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우리들의 기원과 정서가 담겨있다. <깊은산골 작은집>이 출판문화대상 디자인 부문 수상을, <꽃살문> <한글비가 내려요>가 국제아부다비도서전 한국그림책 선정 51권에 선정되고서 전통문화를 다룬 이 책들은 서서히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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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사람들도 접할 수 있는 예술

"제가 그림책 학교에 합격한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림책에 대해 제일 많이 알고 있어서였대요. 전 도서관 그림책을 다 읽었으니까요. 그림책 학교 조선경 선생님이 철학과 문학 공부를 엄청나게 시켰어요. 저도 밤새워 공부했죠. 아들이 저를 보고 '해를 두 번 보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로요.

제 두 번째 작품은 <꽃살문>이었어요. 절이나 전통가옥 문에 꽃무늬를 넣어 만들었어요. 어떤 집은 통짜문에 새겼어요. 영주의 부석사와 성혈사 꽃무늬 문은 정말 아름다워요.

이 책을 준비할 때 가족여행을 가면, 애들이 물었어요. '엄마 혹시 이번에도 꽃살문 보러 온 거야?'라고요. 저는 '무슨? 아니야!' 하면서 잽싸게 절에 가서 꽃살문 보고 오고 그랬죠. 불교 문화권인 아시아에선 꽃살무늬가 연꽃과 비슷해요요. 중국은 권력을 과시하는 듯하고, 일본은 섬세함을 강조하죠. 우리는 민가에서도 소박한 소망한 담은 꽃살문을 만들었어요. 그쪽 사시는 분들도 꽃살문을 잘 모르세요. 저만 알기엔 너무 아쉬웠죠."


세 번째 책은 <한글 비가 내려요>. '벼락처럼 갑자기 창제된 한글이 어떻게 그리 쉽게,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 해답은 한글로 지어 만든 수십 개의 노래에 있었다. 정서와 생활을 담아 입에서 입으로 불리며 한글을 배웠던 것. 더 이상 불리지 않는 그 노래들, 사라져 가는 우리의 전통들…

붙잡아 두고 싶은 우리 전통문화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아기들을 위한 초점 그림책도 그렸다. 흑백과 원, 삼각형, 사각형의 단순한 도형을 벗어나 꽃을 그렸고, 생후 6개월 이상 색을 분별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오방색도 넣었다. 기능만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책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꼴딱고개 꿀떡>의 주인공은 방실이예요. 그 아이는 꿀떡을 위해 세상을 여행하죠. 팔이 없지만, 말하진 않았어요. 방실이가 찾아간 총각은 다리가 없죠. 둘은 꿀떡을 얻으려 호랑이에게 가요. 무서운 호랑이죠. 그런데 가보니 호랑이는 순하고, 병들고 늙었죠. 미안해 하는 거예요. 우린 알기 전까지는 두려워해요. 연대와 공동체, 모르니까 두려운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아이들과 함께요."

"모르니까 두려워한다!" 직접 보고 접해야

<한밤중에 강남귀신>은 500년 만에 강남에서 깨어난 귀신 이야기다. 컴컴해야 귀신들이 놀 텐데, 불야성을 이룬 강남에선 맥을 못 추는 것이다.

"강남에서 만난 아이들의 웃옷 앞자락은 음식물이 묻어 더러웠어요. 차 안에서 이동하면서 음식을 먹으니까 그런가 봐요. 아이들은 너무 많이 공부하고, 어른들은 너무 많이 일하는 거예요. 강남의 불빛은 그 상징이죠.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강남에 불을 어떻게 끄지?"

<한밤중에 강남귀신>은 은은하되 화려한 느낌이 드는 과슈(수용성의 아라비아고무를 섞은 불투명한 수채물감, 또는 이 물감으로 그린 작품)로 그렸다. 각박한 현실은 따뜻한 드로잉으로, 귀신이 등장하는 판타지는 판화로 그려 보는 재미를 줬다. 강남 그리고 강남사람들, 귀신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에 '너무 쨍한' 판화만으로는 적합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백 원짜리 도화지에 그린 원화들에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났다. 슬립스틱과 과격한 공격, 한때 대한민국을 휩쓴 '마빡이'의 자학을 따뜻하게 보듬었던 그림책 <개그맨>도 작업했다. 그녀가 붙잡아 두고 싶은 건 전통문화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하려는 마음이 그림책에 담겨 있었다.
 
작품 <꼴딱고개 꿀떡>(위)와 아래 <한밤중에 강남귀신>.  작가는 “시대의 고민과 문제에 대해 아파하고, 공감하려는 이”일 것이다.
▲ 작품 <꼴딱고개 꿀떡>(위)와 아래 <한밤중에 강남귀신>.  작가는 “시대의 고민과 문제에 대해 아파하고, 공감하려는 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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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작가는 강연회 참석자들과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주고받기도 했다.

- <부적>을 포함해 <꽃살문> <한글비가 내려요> 등을 보면, 방대한 자료조사와 현장취재도 하시는 것 같다. 다른 일상의 이야기도 배경에 깔린 지식들이 상당하다. 자료를 조사하고 축적하는 과정을 듣고 싶다.
"우리집 서재에는 한국학, 그 옆에 동아시아, 그 옆에 세계사, 철학, 과학 이렇게 연이어서 책이 꽂혀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박물관을 찾아간다. 그쪽의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도 겁 없이 만나자고 한다. 자료를 조사하다 보면 그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고구마를 당기면 줄기가 나오는 것 같다. 이젠 체계가 어느 만큼 잡혀서 한 이야기를 들으면 줄줄이 프로젝트가 생각난달까."

- 지금은 어떤 책을 작업 중인지 궁금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알렉산드라, 을밀대에 올라가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을 벌인 강주룡, 영화 <창연>으로도 소개된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등. 그들을 오롯이 담은 그림책 <백년아이>(가제)가 나올 거다. 수능일인 11월 15일이 마감일이다. <꽃살문>은 완성하는 데 약 3년, <한글비가 내려요>는 4년 정도 걸렸다. 이 책은 더 큰 작업이어서 오래 준비해 왔다.

'모순적 생각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지성의 한 증거라고 물리학자 파인만은 말했다. 방대하고 엄격한 사실자료 조사를 통해 한 줄기 상상의 이야기를 뽑아내는 이 이야기꾼은 그 증거의 일부이다.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모든 존재가 형태와 개념으로 남은 그의 저 그림책들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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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