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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서울아산병원 내과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태움과 과로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박선욱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후 '고 박선욱 간호사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및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출범했습니다. 지난 2월부터 현재까지 유족에게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는 서울아산병원이 이 문제에 책임있게 나서도록 하기 위해 공대위는 지금까지 서울아산병원 내 문제점을 알리고 전국 어딘가에서 제2, 3의 박선욱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태움과 과로를 겪고 있는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알리고자 합니다. (이 글은 공대위에서 발행합니다.) 

"선배가 죽었대…."

학교 선배가 자살했다. 많이 친했던 선배가 아니었기에, 그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재작년 한창 병원 면접 시기였다. 새벽까지 과방에서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중국어 자기소개까지 준비하고 있던 선욱 선배의 모습은 누가 봐도 너무 열심히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2학년이라 '대형병원에 들어가려면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나도 제2외국어를 배워야 하나?'라고 가볍게 지나쳤다.

병원 입사는 내게 너무 먼일이라 선욱 선배의 모습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4학년이 된 나에게 선욱 선배의 기억은 의미가 달라졌다. '이제야 관심을 가진 내가 참 약았다'라는 생각과 두려운 마음이 뒤엉켰다.

선욱 선배의 죽음으로 나는 불안했고 화가 났다. 그렇지만 간호대학생 4학년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선배의 죽음이 태움이 아니라 내성적인 성격이라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서울아산병원의 벽은 너무도 높았고, 선배의 죽음을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에게 이해시켜야 하는지 하루가 다르게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왜 그녀가 절망의 끝까지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지 찾아보고, 책을 읽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중 하나였다. 엄지 선생님이 쓴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읽으면서 선욱 선배가 왜 점점 힘들어했는지,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명확해졌다. 또, "자신만큼은 자신을 모른 체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 "간호사는 많지만, 당신은 한 명이다"라는 책의 한 문장은 선욱 선배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했을 한 마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 때 뭐 배웠어

지난 5월 박선욱 간호사 추모 집회를 마칠 때 한 기자가 다가와 간단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때 했던 한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어 저희가 정말 몰라서요…. 4년 동안 공부하고 실습하면서 배운 게 정말 많을 텐데 간호사들이 임상 가서는 왜 힘들어하나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아직 길 줄도 모르는데 일어나 걸으라 하고, 간신히 걸으면 뛰라 하고, 허덕이면서 뛰면 이제 날아다녀야 하고" 실습 중 우리가 본 것은 아직 길 줄 모르는 신규 선생님이 걷느라 허덕이는 모습이다. 우리는 실습에서 학생들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고 배운다.

1000시간의 실습을 하고 환자를 돌보기 위해 많은 이론을 공부하지만, 학생인 우리가 정작 배우고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간단한 체온, 혈압 측정, 구강 간호와 같이 간단하고 기본적인 간호뿐이다. 그런데 병원에 입사하면 당장 수없이 많은 약품과 쉴 새 없이 울려대는 복잡한 기계를 다루고,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상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학생 때 해본 기술과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병원에 입사해서 단 6주 정도 교육을 받고 온전히 한 간호사의 몫을 해내야 한다.

항상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허덕이며 뛰어다니는 신규 선생님들을 보면 '나는 과연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선욱 선배의 소식 역시 하루가 다르게 걱정과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분명 선욱 선배 역시 우리와 같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매일 스스로 질문했을지도 모른다. '4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근데 난 뭘 배웠지? 왜 이렇게 가르쳤지'

저는 예비 박선욱입니다

나는 이제 병원 입사를 앞둔 예비 신규 간호사이다. 내가 앞으로 맞닥뜨릴 임상의 온도는 선욱 선배가 느낀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몸이 아픈 환자 그리고 보호자는 일이 능숙하지 못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예민해질 것이다. 선배 간호사 선생님들은 내가 해내지 못한 일들을 해결해주느라 더 정신없이 일하고 지치고 예민해질 것이다.

나는 쉴 새 없이 모두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고, 컴퓨터 앞에서 눈물을 꾹 참으며 퇴근도 못 하고 제일 늦게까지 기록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규 간호사를 괴롭히는 건 뭘까? 환자도 보호자도 선배 간호사 선생님들도 아니다. 바로 간호사 한명 당 10명 이상의 환자를 봐야 하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이 '간호사들만 그렇게 바쁘고 힘든가, 여자들만 모여서 예민해서 자기들끼리 괴롭히고 투정 부린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직장 내 괴롭힘은 절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선배들이 병원에 입사하자마자 줄줄이 퇴사하고, 프리셉터에게 독립한 지 2주 만에 일이 바빠서 화장실에 못 가서 방광염에 걸리는 간호사의 현실이 만든 문제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라고 해도 직장 내 괴롭힘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특히 병원 규모가 크고, 기업에서 운영하는 병원일수록 간호사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처치실 안에서는 혼나고 울고 속상해도 처치실을 나와서 병실에 들어가는 순간 밝게 웃으며 환자를 대해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신규 간호사인 내가 일을 잘 못 하는 것, 선배 간호사가 혼자 10명 이상의 환자를 보면서 신규 간호사도 도와주느라 화를 내는 것, 내가 퇴근하지 못하고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병원은 갑질을 하고 간호사를 괴롭히고 희생을 강요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 가시를 곤두세우고 찔려서 상처를 받는 게 간호사의 잘못은 분명 아니다.

나는 예비 박선욱이다. 난 앞으로 그녀의 마음을 더 공감할 것이고 혼자 무서워할 것이다. 나는 나를 탓하지도, 선배 간호사 선생님을 탓하지 않겠다고 매 순간 다짐한다. 그리고 선욱 선배가 겪었던 현실을 직접 겪으며 서울아산병원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기자는 보건의료학생 매듭에서 활동하는 소연님입니다. 이 기사는 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및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에서 발행한 글입니다


태그:#간호사, #서울아산병원, #박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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