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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감동을 준 그의 아름다운 퇴장

18.10.19 11:12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지난 15일 봉사단체를 이끌고 있는 각 성당의 대표로 구성된 단체카톡방(이하 '단톡방')에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검암동성당 사회복지분과장 10년 동안 장기집권 마치고 물러납니다. 그동안 감사드리고 고맙습니다! 낼 마지막 소임을 마치고 단톡에서도 나가겠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박치복 씨인데, 그만둔다고 해서 미리 글을 올리고 내일 마지막 소임을 마친 뒤에 단톡에서 나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뒤에 새로 분과장이 된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올렸습니다. 당연한 것을 뭐 그리 놀라느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동안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 글은 매우 신선한 충격과 따뜻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글에서 말한 '낼'은 16일을 의미합니다. 그날은 그 카톡방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회의를 하는 날입니다. 내가 올해 1월부터 그 모임의 진행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서 4년 전의 일이 하나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2012년 10월에 동네의 어느 문학단체에 들어가서 활동했는데, 여러 가지 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이랑 달라서 2014년 2월에 그 단체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 모임도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2월 그 어느 날이 바로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아침에 전화기를 들고 회장에게 마치 총알을 쏴대는 것처럼 그만두게 됐다고 일방적으로 말하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있는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움으로 남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없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떠나가는 자의 아름다움을 얘기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떠나가는 자의 아름다움, 그것은 그냥 남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이었기에, 언제나 그것에 대해 말을 할 때에는 어느 자리에서이건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날 제대로 그것을 실천하려면 저녁 모임에 나가서 회원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돌려서라도 말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서 고마웠다고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귀찮다고, 나가기 싫다고 회장에게 전화로만 간편하게 알렸던 것입니다.
 
치복 씨에게 나는 그동안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멋있게 마무리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16일 저녁이 됐습니다. 회의가 열리는 장소에 약속대로 그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미 전날에 올린 글을 통해서 그가 그만둔다는 것을 안 회원들은 환한 모습으로 그와 악수를 하면서 그동안의 수고에 대해서 고마워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새로 된 분과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의 진행을 해야 하므로 급히 물어봤더니, 직장 일이 조금 늦게 끝나서 오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안심이 됐습니다. 새 분과장이 와야만 내가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이벤트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가 시작됐습니다. 각 성당의 대표들은 한 달 동안 활동한 것을 차례대로 보고했습니다. 검암동 순서가 됐습니다. 치복 씨가 일어나서 보고서를 들고 중요한 내용을 천천히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그 순간에 새 분과장이 들어온 것입니다. 며칠 전에 성지순례 때에 기차 안에서 그와 인사를 나눴기 때문에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가 새 분과장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때맞춰서 그가 온 덕분에 치복 씨의 발표가 끝나고 다른 성당이 발표하기 전에 새 분과장을 회원들에게 소개하고 간단히 소감을 들었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의해서 거의 끝나게 될 무렵에 내가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요즈음 성당의 모든 단체들이 힘듭니다. 서로 간부를 안 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다가도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만두더라도 카톡에서 일방적으로 나가거나 회합에 나오지 않고 그냥 전화로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 치복 씨는 그런 면에서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젯밤에 카톡에 먼저 그 사실을 알린 뒤에 오늘 이렇게 후임자와 마지막 모임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치복 씨와 새 분과장을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많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습니다. 전임자와 후임자가 서로 사랑스럽게 안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은 뒤 힘차게 안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임에 참석했던 수십 명의 회원들은 손뼉을 크게 쳐주었습니다.
 
그날 밤에 집에 와서 새로 주소록을 만들고 있을 때 카톡방에 치복 씨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그는 카톡방에서 나갔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중한 당신
당신을 늘 응원합니다'
 
오는 12월이면 나도 임기가 끝납니다. 나도 치복 씨가 보여준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물러나고 싶습니다.
 

태그:#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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