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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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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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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눈 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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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삐빅 삐빅"

매일 자정이면 알람이 울린다. 눈 비빌 틈 없이 일어나 침대 옆 벗어둔 트레이닝복을 걸쳐 입고 문밖을 나선다. 집 앞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겨 전 타임 근무자와 유니폼을 바꿔 입으면 하루가 시작된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낮에 못하는 재고를 정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운다. "띠링" 이 시간에 편의점을 찾는 사람은 셋 중 하나이다. 이미 얼굴에 취기가 올라 술과 담배를 찾는 술꾼, 잠을 못 이뤄 야식을 찾는 사람, 마지막으로 박카스와 담배를 사가는 부류는 새벽 근무를 끝내고 돌아오거나 아침 노가다 현장에 나가는 사람이다.

손님의 발걸음이 다시 늘어나면 해가 뜨기 시작한다. 아침 6시 30분, 다음 근무자와 다시 유니폼을 바꿔 입는다.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하는 삼각김밥을 아침 식사로 챙겨 들고 집에 들러로 세면을 하고 학교로 향한다. 학교를 마치면 돌아와 바로 잠을 청한다. 지금 바로 자야 서너 시간을 잘 수 있다. 가끔 대리운전과 배달 알바까지 하면 두 시간도 못 잘 때가 있다.

한 번은 콧물이 흘러 쓱 닦았더니 피였다. 이럴 때는 대학교에 괜히 갔나 싶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살기 위해 택한 길이다. 입학 전에는 2~3년 일해서 돈을 모아 북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오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갈등도 컸다. 고민 끝에 대학교에 왔지만 야간 알바, 배달, 대리운전을 하며 돈을 모으고 있다. 하루라도 어머니를 빨리 모셔올 수 있다면 코피 따위야 닦아 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함경북도에서 온 김철이다. 북에서는 어머니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이럴 줄 알고 철들라고 철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을까? 어릴 때 싸움박질을 많이 했다. 아버지 없는 애라는 놀림이 듣기 싫었고 누구에게도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더 그랬다.

한 번은 친구 한 명이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맞고 왔다. 그래서 친구 4명이서 되갚아 주려고 그 학교를 찾아갔는데 수십 명에 둘러싸여 엄청나게 맞고만 왔다. 우리는 분에 차서 이를 갈고 한 명씩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혼내줬고 결국 모두를 무릎을 꿇릴 수 있었다. 통쾌히 복수에 성공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나한테 맞은 애들의 엄마들이 우리 집에 몰려와 있었다. 아빠 없이 애를 키워서 애가 그 모양이라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엄마는 말이 없이 빌기만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안 됐고 미웠다. 왜 당하고만 살까. 남들 앞에서 초라한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도 싫었다. 십 년을 넘게 신어 다 닳아버린 신발을 신고 이웃 동네 아줌마들에게 둘러싸인 엄마의 모습을 보기가 싫었다. 그럴수록 난 더 삐뚤어졌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군에 입대했다.

북한에서는 유치원 1년,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 이렇게 11년 동안 학교에 다니는데, 대부분 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18살 때 입대를 해서 만 9년을 복무한다. 나도 17살 때 입대했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서해안 DMZ 최전방에 있는 종심 정찰부대였다. 종심 정찰부대는 한국군의 규모와 활동 등 첩보를 수집하고 관찰하는 부대이다. 한국군으로 따지면 수색부대라고 할 수 있다. 북한군의 신병 교육 기간은 대부분 3개월이지만, 최전방에 있는 우리 부대는 1년을 교육한다.

8년의 군 생활 중 그때가 제일 떠올리기 싫다. 훈련 중에는 '맞서기'라는 것이 있는데 신병 둘을 마주 세워놓고 피 터지게 싸우게 한다. 처음엔 못 때릴 것 같았는데 한 대 맞고 나면 나도 치게 된다. 근성과 악을 키우라는 것이다. 훈련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 할 것 없이 얼굴이 멍과 피로 가득했다.

게다가 고된 훈련이 끝나도 배를 채울 길이 없다. 쌀밥 먹는 날이 손에 꼽혔고 툭하면 영양실조에 걸렸다. 영양실조 상태를 1에서 최악의 3단계까지 '허약'이라고 부르며 구분하는데, 나도 허약 2도까지 걸렸었다. 너무 배고파서 남이 먹다 버린 강냉이를 씻어 먹기도 했다. 다행히 지옥 같던 신병 생활이 끝나니 서서히 이 생활이 익숙해져 갔다.

신병 기간이 지나니 이 생활도 할 만했다. 가끔 재밌는 일도 있다. 우리 부대는 '삐라'가 가장 먼저 떨어지는 황해남도 연안군에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삐라에 날려오는 대남 선전물을 수거해서 소각하는 것도 우리 일이다. 삐라 풍선에는 MP3, USB, 남한 사회 선전과 북한 내부를 고발하는 전단들이 묶여 날라 왔다. 여럿이 다 같이 발견하면 예외 없이 전부 소각시켜야 한다. 하지만 가끔 혼자 삐라를 습득할 때는 MP3같이 돈이 되는 물건을 몰래 내다 팔기도 했다.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USB 하나를 슬쩍 챙겼다. USB 안에는 한국 드라마가 담겨 있었다. 천국의 계단, 시크릿 가든 등이 있었는데 몰래 드라마를 틀어 봤다. 나는 그 날을 시크릿 가든을 처음 본 그 날을 잊지 못한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지" 난생처음 꿈도 꿔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일러스트: 미디어 눈 은성 작가
 일러스트: 미디어 눈 은성 작가
ⓒ 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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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담긴 자유와 여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이 한국에 가면 감옥에 가두고 피를 다 뽑아 죽인다고 하던데… 나도 저런 꿈같은 세상에서 사는 날이 올까? 그 이후 며칠이나 꿈에서 그 세상을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상상의 한국은 가슴에 담아두고 다시 군 생활에 적응해갔다. 6년쯤 되니 군 생활이 몸에 완벽히 익어 생활이 편해졌다. 몸이 편해지니 피곤해진 것은 머리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점점 많아졌다. 제대 후 내 미래를 그려봤다. 17살 군에 들어올 때는 대학교에 가거나 노동당에 입당해서 번듯하게 살아가는 사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진급할수록 내가 꿈꾸던 것은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출신 성분 때문이다.

나는 원래 군에 입대하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신원 불명이어서 그랬다. 입대할 때는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써주신 탄원서 덕분에 간신히 군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신분이 점점 중요해졌다. 나 같은 신분은 간부로 진급도 못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대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고향에 돌아가면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다.

꿈이 무너지고 현실을 깨닫자 마음속에 이상한 울림이 일어났다. 꿈속에서 그리던 한국, 그곳에 가면 꿈꿀 기회가 있지 않을까? 드라마로 봤던 별천지 세상, 그곳에서 한 번 더 꿈꿔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가슴속에 차올랐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며 손가락질당하며 살았는데, 그 아버지가 살아계실 수도 있다.

마침 먼 친척으로부터 아버지가 죽지는 않았다고 흘리는 말을 듣고 직감하게 됐다. 아버지가 탈북했다는 것을. 덕분에 군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은 접어야 했지만 가슴속 한이였던 아버지가 살아만 계시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 꿈,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 상상 속의 한국. 더는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 아직 꿈꿀 기회가 있다면 그곳으로 떠나자. 나는 그렇게 탈북을 결심했다.  

<다음화에서 계속>

취재, 글: 미디어 눈 조은총 에디터   l 삽화: 은성 작가


 
 탈북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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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눈 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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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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