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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퓰리쳐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인 히샴 마타르(Hisham Matar)의 <귀환>은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했던 카다피 군부독재를 헤쳐나온 한 가족에 대한 소설같은 다큐멘터리이다.
 
 히샴 마타르 '귀환'
 히샴 마타르 "귀환"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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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카다피의 지도자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이집트에서 체포된 후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 그리고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나중에는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 자신의 작가로서의 명성과 필력을 십분 발휘하는 아들 히샴 마타르. 그리고 그의 삼촌과 사촌들.

어떤 이는 반군 활동을 하다 사망하고, 어떤 이는 십수년을 영어의 몸으로 투쟁하며 반 카다피 진영의 굳건한 맥을 이어간다. 이탈리아 식민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의 저항정신이 가문의 전통처럼 면면히 흐르며 토해내는 리비아의 현대사가 질곡의 한국 현대사와 너무나 닮아 있어 한 번 잡은 책을 쉬이 내려 놓을 수가 없다.

2011년 아프리카 대륙을 휩쓴 '아랍의 봄'의 도도한 흐름 속에 카다피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독재의 그늘이 사라진 리비아로 돌아가려는 히샴이 카이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얘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법적으로는 영국인이지만 망명객인 저자와 가족들의 평온할 수 없었던 삶이 트리폴리와 벵가지, 카이로와 나이로비, 뉴욕과 런던을 배경으로 시공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저자는 어쩌면 아버지가 1996년 대학살이 벌졌던 아부살림 교도소에서 12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운명을 달리 했음을 본능적으로 직관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살이 벌어지던 날 우연치 않게도 처형 장면이 그려진 마네(Edouard Manet)의 그림 <막시밀리안 황제의 죽음> 앞에 서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필연의 산물이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알지 못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에게 아버지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 대학살 이후 아버지를 보았다는 목격자의 등장은 작가가 독자와의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마련한 문학적 장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디 살아 있기를 바라는 아들의 처절한 염원은 서양고전의 원형이라 불리는 오디세이(Odyssey)에 자신을 빙의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신들의 저주로 20여 년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아버지 오디세우스와 그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아들 텔레마코스. 오디세우스처럼 고난의 여정이 있을지언정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그리는 그런 꿈, 버릴 수 없는 희망!

절실한 꿈의 실현을 위한 아들의 고군분투는 국제기구, 언론, 영국 정부와 리비아 정부에 까지 이어진다. 심지어는 죽음을 무릅쓰고 카다피의 아들 세이프 엘 이슬람(Seif el-Islam)을 만나 담판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아버지의 생존 여부에 대해 책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줄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책을 다 읽고나면  저자가 구축해 놓은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 선명하게 두개의 길이 드러나고 우리는 그 길을 앞서 걸어간 아들과 아버지를 뒤따라 왔음을 넌지시 짐작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귀환'은 매우 중의적으로 쓰였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아들 히샴 자신의 귀환이다. 카다피 정권의 폭압 정치에 항거하는 삶을 살다가 카다피가 축출된 뒤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33년 만에 리비아로 돌아가는 아들의 여정, 이 책의 표면적인 줄거리이다.

성년이 되어 어려서 떠난 조국으로 돌아가는 히샴을 지배하는 생각은 자기가 '리비아로 돌아가는 게 옳은 것인가'였다. 히샴 마타르는 '조국을 떠나지 않거나, 떠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유명작가나 예술가들이 옳았다'고 리비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되뇌인다.

핍박을 받아 떠난 망명객이었고, 해외에서 사는 동안에도 줄기찬 투쟁을 전개해 왔음에도 '조국을 떠나 있었다'는 생각에 이민자와 같은 일종의 부채의식이 작용하는 듯하다. 이민자가 망명객일 수는 없지만, 모든 망명객은 결국 이민자이기 때문이리라.

또 다른 하나는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의 귀환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먼저 고향에 도착해 있을 것임을 신앙처럼 믿는 듯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들의 상상력의 횃불이 자발라가 귀환하는 길을 밝혀줄 수 있음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해 자신은 여기 저기에 점화 장치를 마련해 둘 뿐.

마타르 가문의 식솔들에게는 그들만의 비밀의 장소인 블로타(Blo'thaah)라는 곳이 있다. 할아버지 집이 있는 아지다비야 근처에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면서, 이들 가족들에겐 마음 속 고향같은 추억의 장소이다.

정체를 밝히진 않았지만, 감옥에서 옆 감방의 삼촌과 지인들에게 시를 읊어주며 자신이 "블로타에서 왔다"고 되뇌이던 사람은 아버지 자발라임이 틀림없다. 그런 그가 영혼이 되어서라도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 바로 여기 블로타가 아니었을까?

이제 아버지 자발라가 그곳으로 귀환했음을 믿고 싶은 사람은 단지 아들 히샴만이 아니다. 그래서 작가 히샴이 책의 마지막에서 묘사하는 장면-전투에서 사망한 사촌의 침대에서 낮잠을 즐기고, 숙모가 음식을 준비하며, 사촌들끼리 우유를 마시고 담소하는 소소한 일상-은 고국으로 돌아온 망명객, 아버지와 아들이 가족 모두와 함께 블로타에 모여 텐트를 치고 가벼운 소풍을 즐기듯 평화롭기만 하다. 아니 작가 히샴은 그곳이 자신의 가족들만의 고향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향해 열린 장소'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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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김태완입니다. 이곳에 이민와서 산지 6년이 되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이민자로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그때그때 메모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민자는 새로운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자기 모국에서도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풀어놓고 싶은 얘기가 누구보다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