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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와 조카와 함께 조던의 형제자매는 매우 친하다. 지금은 각자 흩어져서 살지만, 여전히 만나면 쉴 틈 없이 얘기를 나눈다.
▲ 누이와 조카와 함께 조던의 형제자매는 매우 친하다. 지금은 각자 흩어져서 살지만, 여전히 만나면 쉴 틈 없이 얘기를 나눈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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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해외 입양을 반대하는 혐오에 찬 의견을 들으면 소름이 끼칩니다."
 

지난 7월과 8월, 조던 러브가 미국에서 보내온 이메일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메일의 절반 이상은 한국의 '입양, 특히 해외 입양 반대 움직임'에 대한 비판과 안타까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조던 러브, 1985년생(법적 생년), 한국나이 다섯 살 내지 여섯 살 무렵에 미국으로 입양. 척추사지뼈끝형성 이상으로 인한 소인증 환자. 그는 자신이 입양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자기 육체를 사용할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미국에서 받았던 전문적 치료나 보살핌이 없었다면 현재의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왜 해외 입양으로 행복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까? 해외 입양은 많은 아이들에게 한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행복할 수 있는 기회, 가족의 영원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말이지요."
 

인터뷰를 연재하면서 해외 입양이 주는 엄청난 기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직설적으로 해외 입양을 옹호하는 의사 표현을 보자 자꾸만 한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이들 입양인들이 받은 혜택과 기회는 '입양' 자체보다는 입양 부모가 가진 '경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단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자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가난한 이들이 부모될 자격이 있는지를 논할 수 있다는 얘긴데? 이런 엉뚱한 생각 때문에 원고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시 조던 러브의 글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열 번의 수술과 입원, 한결같이 병상 지킨 부모님
 
입양 당시 조던 러브 조던은 한국나이 다섯 살 내지 여섯 살 무렵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입양된 뒤 열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 입양 당시 조던 러브 조던은 한국나이 다섯 살 내지 여섯 살 무렵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입양된 뒤 열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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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척추사지뼈끝형성에 이상이 있는 소인증을 앓고 있었고, 아마도 그것이 제가 버려진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조던은 일산의 어느 거리에서 유기된 채 발견되어 홀트복지타운으로 옮겨졌다. 홀트에서 지낸 지 6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수술 일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한동안 소인증과 관련된 고통스럽고 병적인 증상들을 고치기 위해 계속 수술을 받아야 했다. 부모님은 그가 병원에서 진찰받는 것, 병원에 입원하는 것, 그리고 치료 받는 것을 돕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조던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부모님은 육체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내 삶의 버팀목이었죠. 성인이 된 지금도 부모님과 매우 가깝게 지내며 자주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 가족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조던이 러브 일가에 입양될 당시 이미 그 가정에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친생자녀였고, 나머지 셋은 그가 오기 1년 전에 입양된 자녀들이었다. 조던을 입양한 뒤에도 부모님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동 한 명을 위탁 보호했다. 그리고 후에 그 아이까지 입양하여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자라면서 조던은 친생자녀와 입양된 자녀들 사이에 어떤 차별이나 편견도 경험한 적이 없다. 당연히 부모님이 편애한다고 느껴 본 적도 없다. 그들 형제자매는 매우 친하다.

지금은 각자 흩어져서 살지만, 여전히 만나면 쉴 틈 없이 얘기를 나눈다.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다고 여기며 자랐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중 누구도 부모님과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 속에서 무시당하거나 방치된 적이 없다.

인터뷰를 진행해 나가는 동안, 처음에 품었던 의구심은 점점 사라졌다. 종국에는 그가 얻은 기회가 단순히 경제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복잡하고 힘든 치료 과정에서 그의 부모는 망설임이 없이  많은 시간을 바쳐 그를 돌보고 정성을 다했다. 

자신의 희귀한 질병과 장애가 한국에서 유기된 이유라는 조던의 생각을 상기해보면, 그가 한국과 미국에서 접한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다. 물론 유기 이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정확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장애 때문이었으리라는 추측은 한국 사회 현실을 감안하면 매우 상식적이다.

한국에서 장애로 인한 아동 유기는 경제적 문제만을 의미하거나 생부모의 도덕적 결함 때문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아를 기르는 일은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투쟁을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는 장애에 대한 차별 뿐 아니라, 미혼모와 고아에 대한 차별 또한 심각하기에 '입양'을 경제적 시각만으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차별은 없었다, 도움과 배려가 있었을 뿐
 
조던 러브의 가족들  조던이 러브 일가에 입양될 당시 이미 그 가정에는 5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친생자녀였고, 나머지 셋은 그가 오기 1년 전에 입양된 자녀들이었다. 조던(앞줄 가운데)을 입양한 뒤에도 부모님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동 한 명을 위탁 보호했다. 그리고 후에 그 아이까지 입양하여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 조던 러브의 가족들  조던이 러브 일가에 입양될 당시 이미 그 가정에는 5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친생자녀였고, 나머지 셋은 그가 오기 1년 전에 입양된 자녀들이었다. 조던(앞줄 가운데)을 입양한 뒤에도 부모님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동 한 명을 위탁 보호했다. 그리고 후에 그 아이까지 입양하여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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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등학교까지는 홈스쿨링을 했다. 주로 어머니와 함께 했는데, 열 번의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기간을 거쳐야 했던 그에게 학교에 가지 않으면서도 학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 후 조던은 대학에 진학했다.

홈스쿨링만 했던 그에게 대학 생활은 사회생활에 눈뜨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교실 정리를 어떻게 하는지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도 대학에서 배웠다. 대학 생활은 소인증이란 장애를 딛고 사회생활에 도전할 수 있도록 그를 안내했다.

그가 다녔던 대학은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아니었지만, 그가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했고, 많은 이들이 도움을 줬다. 처음 몇 학기는 전동휠체어가 있어 수업에 필요한 책과 학용품을 옮길 수 있었다. 당연히 대학 생활 동안 장애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조던은 성실하고 진지하게 공부에 몰입했다. 학점도 꽤 높게 유지했다. 한 마디로 성공적인 대학 생활이었다.

그는 현재 홀트인터내셔널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에 자원봉사자로 시작해서 정직원으로 고용되어 10년에 이른다. 현재는 승진하여 IT팀에서 다양한 프로젝트와 연관된 난이도 높은 일을 하고 있다.

그에게 인종차별에 대해서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세계적으로 성인 중에 90cm도 안 되는 사람들은 매우 적기 때문에, 그의 신체적 특성이 너무 뚜렷해서 인종적인 차이나 차별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도 그저 하나의 신체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매우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조던은 정기적으로 'the Little People of America'회의에 참석한다. 이 회의는 전 세계를 돌면서 열리는데, 거기서 그는 함께 소인증을 이겨낼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질병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또 그는 미국 여러 지역을 돌며 갈라쇼에서 기조연설을 하거나 콘서트에서 그의 특별한 경험을 얘기하기도 한다. 뉴스 기사에서도 그의 입양 스토리를 다뤘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단지 입양 경험을 넘어서 공공을 위한 연설을 하는 동기 부여 연설자가 되었다.

입양된 후 조던에게는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여행에서 그가 일산홀트복지타운을 찾았을 때, 자신을 돌봐 주었던 물리치료사를 비롯해서 최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 혹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를 돌본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던은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삶의 한 부분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 방문에서 그는 사회복지사와 함께 자신의 입양 서류들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서류들은 단지 조던이 유기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친생가족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 그에게는 생부모를 찾기 위한 특별한 계획은 없다. 또 생부모에 대한 정보를 모른다는 이유로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생부모들이 자기가 4살이 될 때까지 동안 보듬어준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조던은 그들이 자기를 포기한 것은 그의 장애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말했다.

"저는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힘들었던 과거와 관계없이 저는 그분들을 용서했고, 생부모님들은 언제나 제 삶의 일부라는 것을요. 그리고 지금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요."

"시설 아동, 장애 아동의 '목소리'가 되어 주겠습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한국이란 나라가 아름답고 사람들이 멋진 것에 비하면,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매우 부족해 보인다고 했다. 그 예로 거리에 장애인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었다. 조던은 거리에서 보이지 않던 장애아들을 고아원에서는 많이 보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서슴지 않고 해외 입양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밝혔다. 많은 아이들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유기되고 고통 받을 이유가 없으며, 그들에게 사랑받을 기회, 차별받지 않을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그저 베풀어야 할 선의가 아니라, 그 아동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신념은 우리의 입양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다. 입양 통계를 보면 장애 아동은 국내 입양에 비해 해외 입양이 압도적으로 많다. 결국 해외 입양을 막으면 시설에 있는 장애 아동들 중 다수는 입양의 기회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는 말했다.

"만약 제가 한국을 떠나지 못했더라면, 제 삶은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겁니다. 다수인 비장애인들과는 달리 저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를 충족시키지 어려웠겠죠. 한국에서의 제 삶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활의 불편 이외에도 장애와 관련된 여러 오명과 꼬리표와 싸워야 했을 거고, 교육 받거나 직장을 구할 기회를 잡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을 겁니다.

물론 한국의 장애에 대한 수용력이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 저는 모든 아이들이 제가 누렸던 것처럼 입양을 통해 평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시설의 아이들, 특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대변할 것입니다."


그의 메일은 다시 한 번 우리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 한국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겹쳐졌다.

그들을 붙잡는다고 우리 현실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궤변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들의 목소리와 삶을 찾도록 도울 수 있는 길이 해외 입양이라면, 한 생명의 무게가 온 우주의 무게와 같음을 믿는다면 '아름다운 사람', 조던 러브의 신념에 동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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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공교육, 청소년 독서, 대안 학교, 미혼모 문제,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