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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공히 타이완을 대표하는 관광지라는데, 자이(嘉義) 기차역 앞 직행버스 정류장엔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만 줄을 서 있다. 관광객 차림은 중년의 한국인 부부뿐이다. 타이베이나 가오슝 등지에서 출발하는 당일치기 단체 관광객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관광객들이 눈에 띄지 않는 썰렁한 정류장은 '아리산(阿里山)'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다.

물론, 자이에서 기차를 이용해 산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종착역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 등 가자면 무척 번거롭다. 예전엔 자이 역에서 아리산 입구 역까지 운행되는 기차가 있었다지만, 이 지역이 진앙이었던 1999년 '921 대지진'으로 철로가 끊겨 지금은 자이 역에서 중간 지점인 펀치후(奮起湖)까지만 운행되고 있다.

자이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구절양장의 길이 이어진다. 비유하자면, 구례 읍내에서 지리산 성삼재에 오르는 구간이 2시간 정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얼추 맞겠다. 주지하다시피, 타이완은 면적이 우리나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조그만 섬이지만, 최고봉인 위산(玉山)의 해발고도가 거의 4000m에 육박하는 험준한 산세를 자랑한다.

마치 각오라도 하라는 듯 길가에는 해발고도를 적어놓은 푯말이 교통표지판인 양 세워져 있다. 2000m 푯말을 지나갈 때의 창밖 풍경은 이미 구름이 한참 발아래다. 우리나라의 최고봉인 한라산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을 버스로 오르고 있다는 건 언뜻 경이롭기까지 하다. 오를수록 점점 초록은 짙어지고, 구름 위 하늘빛은 더욱 푸르러 눈이 부시다.

더욱 놀라운 건, 그 험준한 산비탈 곳곳에 우리네 면소재지 규모만 한 마을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다는 것. 알고 보니, 아침 정류장에서 만난 평상복 차림의 승객들은 도회지로 일 보러 간 산마을 사람들이었다. 대체 그들은 첩첩산중에서 뭘 하며 먹고 사는지 궁금하던 찰나, 답변이라도 하듯 창밖엔 예사롭지 않은 장관이 펼쳐진다.

구렁이가 똬리를 튼 모양의 차밭이 산허리를 통째로 감고 있다. 어느새 길가에는 차를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제야 아리산이 타이완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 산지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타이완의 어느 도시엘 가든 '아리산'이라는 브랜드로 차를 파는 카페가 성업 중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에어컨 바람과는 결이 다른 한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여행자들은 긴 팔 점퍼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반바지에 반팔 차림은 몸집보다 더 큰 배낭을 짊어진 한 서양인과 나, 둘뿐이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구름이 몰려와 살갗을 스칠 때는 순간 몸에 닭살이 돋았다.

아리산 여행이 시작되는 기차역 주변은 웬만한 도회지 부럽지 않을 만큼 번화한 모습이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기념품 가게와 식당 뒤로, 우체국과 은행, 시장과 성당 등 거주민들을 위한 공공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마치 처음 남한산성에 갔을 때의 느낌이었다. 가파른 산을 올라 남한산성의 성문에 들어섰더니 별천지처럼 큰 마을이 나타나 적이 놀랐었다.

기실 지형을 봐도 산꼭대기가 평평한 게 남한산성과 흡사하다. 발아래의 구름과 서늘한 기온만 아니라면, 이곳이 해발고도 2000m 이상의 고지대라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 정도다. 언뜻 여느 고산 도시 같은 아리산에서의 트레킹은 등산이라기보다 산책에 가까운데, 그래선지 등산화보다는 가벼운 샌들 차림의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다.

아리산 초등학교 입구 해발 2,195m,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학교라는 팻말이 교문 옆에 세워져 있다.
▲ 아리산 초등학교 입구 해발 2,195m,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학교라는 팻말이 교문 옆에 세워져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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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권은 아리산 초등학교다. 우리 같으면 진작 폐교되고도 남았을 외진 산골짜기에 학교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여느 도시의 학교 못지않은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호텔 등을 제외하면 아리산 풍경구 내에서 가장 큰 3층짜리 건물로, 넓지는 않지만 번듯한 운동장까지 갖추고 있다. 숲의 새소리마냥 울타리 너머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린다.

학교 교문은 아리산의 대표적인 '포토존'이기도 하다. 교문 옆에 해발고도가 2195m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어 여행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곁에는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라는 설명이 짤막하게 소개돼 있다. 모르긴 해도, 티베트나 남미 안데스에 걸쳐 있는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의 학교가 아닐까 싶다.

그렇듯 아리산은 속살을 들여다보면 관광지가 아닌 주민들의 평범한 생활공간에 가깝다.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 위한 작위적인 노력을 굳이 든다면, 아리산 역을 기점으로 마을 내부를 잇는 산악열차가 유일하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아리산의 울창한 삼림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산업철도를 그대로 보존하고 열차를 개조해 관광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리산의 빽빽한 인공림 일제 식민지 시절 남벌로 인해 훼손된 숲이 인공림 조성 등의 노력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 아리산의 빽빽한 인공림 일제 식민지 시절 남벌로 인해 훼손된 숲이 인공림 조성 등의 노력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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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열차는 밖에서 보면 흡사 미니어처처럼 작고 귀엽다. 실제로도 나란히 앉으면 서로 두 발이 닿을 듯 객실이 비좁다. 철로의 간격이 좁은 협궤인 탓이다. 그만큼 철로를 깔기가 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운행 중 창밖으로 팔을 뻗으면 나무에 닿을 만큼 비좁은 길을 요란한 쇠 마찰음을 내며 오르는 게 아리산 산악열차의 매력이다.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운행하는 노선과 삼림욕과 트레킹을 위한 노선 등으로 구분해 운행하고 있는데, 아리산을 찾은 여행자들 중 산악열차를 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리에 비해 요금이 비싼데도 산악열차를 타기 위해 부러 아리산을 찾는다는 관광객들이 허다하다. 열차를 타고 올라간 뒤, 등산로를 따라 다시 아리산 기차역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주민들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인데도 철거하는 대신 보존을 택했고, 식민지 시절 남벌로 훼손된 숲은 해방 직후 인공림을 조성하면서 울창했던 옛 모습을 되찾았다. 당시 남벌에도 살아남은 천 년 수령의 고목들과 그 아들과 손자뻘 나무들이 대가족처럼 어우러져 있다. 열차에서 내려 등산로를 따라 숲에 들면 대낮에도 어두컴컴해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유명세를 타게 되면 으레 새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마련인데, 아리산은 상권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입구 주차장 주변의 몇몇 식당들과 편의점, 등산로 중간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간이매점이 전부다. 더욱이 우리 같으면 일찌감치 관광지 전역을 장악하다시피 했을 텐데, 그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는커녕 다국적기업의 광고판 하나 찾아보기 어렵다.

아리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터전인 정글 같은 숲길을 걸으며 새삼 깨닫게 된다. 관광지의 진정한 생명력은 박제화된 화려함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소박함에 있다는 사실을. 단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대개 한 번 찾고 말지만, 상인들의 호객소리 대신 주민들의 진솔한 삶이 배어있는 관광지라면 몇 번이고 다시 찾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션무 역의 산악열차 아리산을 찾은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기차역으로, 플랫폼만 있는 '공터'이지만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풍광을 자랑한다. 철길 옆 날씨 안내판에 온도가 표시돼 있다.
▲ 션무 역의 산악열차 아리산을 찾은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기차역으로, 플랫폼만 있는 '공터'이지만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풍광을 자랑한다. 철길 옆 날씨 안내판에 온도가 표시돼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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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아리산 트레킹의 종착지는 션무(神木) 기차역이다. 출발지인 아리산 기차역까지 걸어서 내려오기도 하지만, 산에 오를 때 탔던 산악열차의 설렘을 잊지 못해 부러 다시 한 번 타는 여행자들이 많다. 션무 역은 역사(驛舍) 없이 플랫폼만 남은 '공터'일 뿐이지만, 아리산을 찾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곳이다.

열차를 타든 타지 않든, 션무 역 플랫폼에 서면 시간이 멈춰선 듯한 느낌에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모르긴 해도, 이곳에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새뜻한 건물을 지었다면, 되레 그들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아리산이 좋아 동네 마실 다니듯 찾는다는 어떤 이는, 션무 역이야말로 아리산 주민의 모습을 가장 닮은 곳이라고 말했다.

아리산에서 간만에 '쾌적한' 하루를 보냈다. 바쁠 것 없이 흘러가는 산중의 느린 시간이 편안했고, 번잡스럽지 않은 고즈넉한 풍광에 감동했다. 무엇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섭씨 17~18도의 일정한 기온 덕에 마음도 몸도 종일 고슬고슬했다. 같은 시각 국내에선 연일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에 이곳에서의 하루가 괜스레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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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