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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구곡이 옥화구경으로 바뀌었어
서계 이득윤을 배향한 옥화서원
 서계 이득윤을 배향한 옥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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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을 따라 나 있는 옥화구곡은 1607년 청주 미원면 옥화동(玉華洞)으로 낙향한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에 의해 처음 설정되었다. <서계집>에 수록된 행장에 보면, 서계는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본받아 〈서계육가(西溪六歌)〉와 〈옥화육가(玉華六歌)〉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옥화동에 춘풍당(春風堂), 추월헌(秋月軒) 등을 짓고 학문과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서계집>에 이들 시가 수록되지 않아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서계 이득윤이 설정한 옥화구곡은 다음과 같다. 제1곡은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의 만경대(萬景臺)다. 제2곡은 청주시 미원면 계원리의 후운정(後雲亭)이다. 제3곡은 청주시 미원면 어암리의 어암(漁巖)이다. 제4곡은 미원면 월용리의 호산(壺山)이다. 제5곡은 미원면 옥화리의 옥화대(玉華臺)다. 그리고 제6곡과 7곡도 옥화리에 있다. 제6곡이 천경대(天景臺)고 제7곡은 오담(鰲潭)이다.
옥화대에 있는 추월정
 옥화대에 있는 추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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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곡은 미원면 운암리에 있는 인풍정(引風亭)이다. 제9곡은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에 있는 봉황대(鳳凰臺)다. 그러므로 옥화구곡은 청주시 미원면에 7곡이 모여 있고, 괴산군 청천면에 1곡, 보은군 내북면에 9곡이 있다. 이들 옥화구곡을 읊은 시 중에는 이필영(李苾榮: 1853-1930)의 <옥화구곡> '서시(序詩)'가 인상적이다.

하늘이 감춰두고 땅이 비밀로 했던 옥화구곡이 열려   天藏地秘玉華開
선조들이 즐겨 머물며 이미 그 이름을 다 정했다네.    先世槃停已摠裁
구곡의 여울물에 가을 달빛 비추니                         九曲灘頭秋月暎
고기 잡는 어부 뱃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네.          漁人不敢棹歌廻

옥화구경 표지석
 옥화구경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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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400년 가까이 내려오던 옥화구곡이 1990년 청원군 군정자문회의를 통해 바뀌게 된다. 괴산 청천과 보은 내북의 2곡을 빼고, 미원면 내에서만 옥화구곡을 새롭게 설정했다. 그것도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설정했고, 이름도 옥화구경으로 바꿨다. 박대천 상류 미원면 운암리의 청석굴(靑石窟)을 제1경으로 하고, 하류인 어암리 박대소(博大沼)를 제9경으로 했다.

제2경부터 제8경까지 명칭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제2경 용소(龍沼, 옥화리), 제3경 천경대(天鏡臺, 옥화리), 제4경 옥화대(玉華臺, 옥화리), 제5경 금봉(錦峰, 월용리), 제6경 금관숲(금관리), 제7경 가마소뿔(어암리), 제8경 신선봉(神仙峰, 계원리).
제1경 청석굴
 제1경 청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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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경 청석굴은 운암리에 있다. 운암리는 1리와 2리로 나눠지는데, 1리에 대전, 운천, 인풍정의 자연마을이 있고, 2리에 송호, 영평, 청석(다리) 마을이 있다. 운암1리는 달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고, 운암2리는 달천의 지류인 미원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청석굴은 청석마을에 있는 자연동굴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용이 운암리와 옥화리 경계에 있는 용소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제2경 용소
 제2경 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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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경 용소는 그 앞에 펼쳐진 펜션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달천에 놓인 학정교를 건너면서 상류를 보면 절벽 앞으로 깊은 못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용소다. 제3경 천경대는 옥화리에 있다. 밤하늘에 뜬 밝은 달이 거울처럼 맑은 물에 비치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해 천경대라 불렀다. 옥화교 건너편 절벽 앞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달빛이 거울처럼 맑게 비친다 하여 천경대가 되었다.

옥화대에서 옛 선현의 자취를 찾다
세심정
 세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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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경 옥화대는 옥화구경의 백미로 옥화교 하류 300m 지점에 있다. 원래는 개울가 절벽 위 동산에 만들어진 누대가 자연과 어울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마을 한 가운데 옥화서원이, 강쪽으로 추월정(秋月亭)과 세심정(洗心亭)이 복원되어 있다.

옥화서원이 처음 건립된 것은 1717년(숙종 42)이다. 처음에 서계 이득윤을 배향했고, 후에 주일재(主一齋) 윤승임(尹承任), 옥계(玉溪) 박곤원(朴坤元), 돈암(遯庵) 윤사석(尹師晳)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9년에 복원되었다.

서원이 되려면 강당과 사당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사당인 숭현사(崇賢祠)만 있다. 또 서원의 문이 걸려 있어 평상시에는 들어갈 수도 없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사는 음력 3월 29일 춘계제향이 있을 뿐이다. 서원 앞에는 주일재라는 건물이 있어 일종의 강당 구실을 하고 있다. 주일재는 윤승임의 호이기도 하고 그를 기리는 건물이기도 하다. 주일재에는 윤승임을 위해 지은 잠언(主一齋箴)이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썼다.

주일재(앞)과 옥화서원(뒤)
 주일재(앞)과 옥화서원(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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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主一)은 송나라 때 정부자(程夫子) 형제가 논의한 개념이다. '고요할 때는 마음에 머물고(靜而存心), 움직일 때는 일에 따르라(動而應事)'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의 욕심이 날로 사라지고(人欲日消) 모두가 천리로 돌아올(罔非天理)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주자(朱子)는 심법(心法)을 논했는데, '물에 비친 가을달(秋月寒水)' 같기를 바랐다. 이들의 뜻을 받들어 윤승임이 주일로 집(齋)의 명칭을 정했다고 한다.

산쪽으로 올라가면서 왼쪽에 있는 경모사(景慕祠)는 돈암 윤사석을 기리는 사당이다. 돈암은 사헌부 집의를 그만두고 1501년 옥화리로 낙향해 만경정(萬景亭)을 짓고 살았다. 명리를 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주자학을 가르쳐 7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90년대 경모사와 만경정을 새롭게 짓고, 선생의 경의주정(敬義主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세심정에서 옥화구곡과 옥화구경에 대해 토론하는 달래강 탐사팀
 세심정에서 옥화구곡과 옥화구경에 대해 토론하는 달래강 탐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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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 위에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하나는 추월정이고 다른 하나는 세심정이다. 추월정은 서계 이득윤이 지은 추월헌을 모방해 후대에 지어졌다. 추월정에는 1883년(癸未) 송근수(宋近洙)가 찬한 중수기가 있다. '옥화구곡 중 제5곡에 정사를 짓고 당호를 춘풍이라 하고 옥호를 추월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이 건물은 1898년(戊戌) 윤3월에 서계의 9세손 이두영(李斗榮)이 중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추월정에서는 달천이 내려다보인다.

세심정은 주일재가 심법을 논하며 지은 정자다. 세심정에는 을축(乙丑: 1865)년 송근수가 찬한 중건기가 있는데, 이곳에서 세심정을 '주일재 윤공의 옛집(舊居)'이라고 표현했다. 무진(戊辰: 1868) 윤4월 김술현(金述鉉)이 찬한 중건기도 함께 있다.

이곳에 보면 '마음은 본래 비어 있고 형태가 없는 것(心本虛而無形)이어서 어떻게 하면 더럽고 오염된 것(垢汚)을 깨끗이 씻어낼까(滌濯)'를 생각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송근수의 중건기에 비해 철학적이다. 현재 건물은 1966년(단기 4299) 3월 상량을 거쳐 중수되었다.

옥화구경을 돌고 돌아

제5경 금봉
 제5경 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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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리를 지난 달천은 월용리에서 크게 한 번 굽이친다. 월용리는 1리와 2리로 나눠지는데, 1리가 달천가에 있는 월암(月巖)이다. 일명 방축골로 불리며 월암의 남쪽 산이 제5경인 금봉이다. 금봉과 달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그 건너편에 모래사장이 발달해 있다. 그러므로 모래사장에서 바라보는 달천과 금봉의 경치가 아름답다. 월용2리에는 서당골, 옥계골, 가는골(龍巖)이 있다. 월용리라는 행정 명칭은 월암과 용암에서 한자씩 따 왔다.

제6경인 금관숲은 이름 그대로 금관리에 만들어진 숲이다. 금관1리 점말(寬洞) 앞 달천가에 조성한 2,400여 평의 숲으로 유원지 겸 피서지다. 금관숲 상류쪽으로 금관교가 있다. 금관리에는 미원초등학교 금관분교와 금관보건진료소가 있다. 금관분교는 1941년 금관국민학교로 개교해 2001년까지 운영되다, 2001년 분교로 격하되었다. 현재 4학급 편성에 학생수는 16명이다.
제7경 가마소뿔
 제7경 가마소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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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경은 어암리 가마소뿔이다. 어암리라는 행정명칭은 어미(漁尾)와 소바우(小巖)에서 한 자씩 따 만들어졌다. 달천에 놓인 방마루교를 중심으로 동북 쪽에 어미 마을이 서남쪽에 방마루 마을이 있다. 방마루교에서 달천을 따라 나 있는 운암계원로를 내려가다 보면, 건너편으로 붉은빛을 띤 절벽이 이어진 나지막한 산을 볼 수 있다. 이곳이 가마소뿔이다.

가마소뿔에는 후대에 만들어진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에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가 이곳 가마소뿔을 지나다 신부의 가마가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신랑이 신부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으나 그도 급류에 휘말려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마소뿔은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깊은 곳으로 위험을 상징한다. 여기서 뿔은 한자 담(潭)의 순우리말로 깊은 물을 뜻한다.
제8경 신선봉
 제8경 신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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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경은 계원리에 있는 신선봉(642m)이다. 어암리 인봉마을에서 달천 건너편으로 높이 보이는 산이다. 옛날 신선이 놀았다고 해서 신선봉이라 불렀다는데 이 역시 최근에 만들어진 스토리텔링이다. 제9경은 다시 어암리에 있는 박대소다. 한자로 풀면 넓고 크게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라는 뜻이다. 미원면 구간의 달천에 있는 마지막 절경으로, 푸른색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 깊은 못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달천의 미원면 구간을 박대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중부매일신문>에 연재되는 기사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태그:#옥화구경, #옥화대 , #옥화서원, #추월정, #세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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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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