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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노정 시인의 빈소.
 고 박노정 시인의 빈소.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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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 떠돌이 백수건달로 / 세상은 견뎌 볼만하다고 / 그럭저럭 살아 볼 만하다고 / 성공만이 미덕인 세상에서 / 끝도 시작도 없이 / 가랑잎처럼 정처없이 / 다만 가물거리는 것들과 함께."

고(故) 박노정 시인이 쓴 시 <자화상> 전문이다. 이런 시를 썼던 박노정 시인이 지난 4일 저녁 숨을 거두었다. 이틀 뒤인 6일 저녁 빈소가 있는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으로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는 고인이 활동했던 관련 단체들이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연 것이다. 구중관 소설가를 비롯해, 이창희 전 진주시장, 박대출 국회의원, 류재수·서은해 진주시의원, 문화예술계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함께했다.

추모제는 고인 묵념에 이어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가 고인의 약력보고를 했다. 이어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은 조사에서 "박 선생님, 이리 가실 줄 알았으면 엊그제 집으로 찾아갔을 때 억지로라도 깨워 몇 마디 이야기나마 나누었어야 했을 것을"이라며 "조만간 다시 오마 생각하고 돌아온 것이 크게 후회됩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당신은 강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그깟 병마에도 쉬 굴복치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리 속절없이 가시다니 애통한 마음 이루 다할 수가 없습니다"며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화운동 이후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지역신문의 필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요구는 <진주신문>을 창간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며 "초대 발행인을 맡은 선생은 대쪽같은 기개로 진주정신의 구현을 위해 앞장섰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또 "민심 무서운 것을 보여준 진주농민항쟁, 계사년의 진주성 전투, 남명사상, 형평운동 등은 <진주신문>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 그것들은 시민사회에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계기였습니다"라고 김 이사장은 술회했다.

김 이사장은 "박 선생님, 문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진주를 사랑했던 당신의 삶을 진주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그간 함께 해줘 고마웠습니다.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라고 인사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 조사를 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 조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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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가 고인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가 고인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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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홍 진주예총 회장은 조사에서 "장대 같은 이 눈물들을 헤치고 화급히 당신은 떠났습니다. 평소의 소신처럼, 숙명마저도 타협하지 않고 의연히 손을 흔들며 떠났습니다"라며 "대쪽 같은 푸른 기개는 섬찟하셨고, 불의에 꺾이지 않던 일갈은 세상을 번쩍이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주 회장은 "의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만큼 당당한 것임을 일려주시던 님은 우리의 곁을 차마 떠났습니다. 이 여름이 더 달구어지기 전에 우리의 눈물이 더 수고스럽기 전에 바람을 딛고 이슬처럼 떠나셨습니다"고 말했다.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조사에서 "자신은 한 잔 술도 넘기지 못하는 '주치'이면서, 갖은 난변의 술자리가 파하도록 뽓뽓이 앉아 지키고, 정수리에 헌팅캡 곧추 올린 백수건달임을 자처하면서도 헛도는 세상을 참섭(參涉)느라 돈 안되는 궂은 자리엔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별은 먼저 가고 나중 가는 헤어짐일뿐, 다시 만날 것이란 소망으로 보내드리니, 부디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어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김가가 되든 박가가 되든 마음먹은 대로 되는 수의왕생에 이르십시오"라고 덧붙였다.

'조시' 낭송이 이어졌다. 정진남 시인(화요문학회)은 "당신의 한 평생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자신을 버리고 버리며/사회를 일으키고/문학을 가꾸시다/낡고 헤진 당신은/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당신은/우리의 구두였습니다. 운동화였습니다/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며/스스로 부처가 되라,/스스로 스승이 되라시던/선생님, 사라진 자리마다 들려오는 영혼의 목소리/카랑카랑한 햇빛으로/이 세상 환히 밝힐 겁니다 …"라고 읇었다.

진주가을문예 수상자인 유영금 시인은 <댓잎새?라는 제목의 조시에서 "지리산/골짜기 대숲에/바람이 웃습니다/선생님 웃음입니다//지리산/산모퉁이 개울가에/댓잎이 흘러갑니다/선생님 옷깃입니다//되돌아 오는 길이 없는/서역하늘 깊숙이/댓잎을 닮은 새가 날아오릅니다//하늘가엔/댓잎새가 혼자 삽니다"라고 낭송했다.

그리고 형평문학선양사업회 회장인 김언희 시인과 최성철 전 진주참여연대 대표가 조사를 하고, 여태전 시조시인과 최정임 시낭송가가 고인의 시를 낭송했으며, 한태주씨가 오카리나 연주를 했다. 또 한치영씨와 박제광씨가 고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고, 노래패 '맥박'은 고인이 즐겨 불렀던 <사랑>(임재범 노래)을 불렀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여태전 시조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여태전 시조시인이 고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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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한치영, 한태주 부자가 추모공연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한치영, 한태주 부자가 추모공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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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김태린씨가 춤으로 고인을 기렸다. 마지막으로 유족 대표로 부인이 인사를 했다.

한국번역원장인 김사인 시인은 이날 보낸 조전을 통해 "박노정 선생은 고달픈 시대의 강직한 선비였으며, 비천한 시류에 함부로 섞이지 않았던 고결한 서정시인이셨습니다. 남기고 떠나신 맑은 자리가 너무 커서 허탈함을 가누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주에서 태어났던 박노정 시인은 1990년부터 2002년까지 12년간 <진주신문> 편집·발행인을 지냈다. 옛 <진주신문>은 시민주 800여 명이 모여 창간했던 지역신문이다.

1980년 <호서문학>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고인은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 <늪이고 노래며 사랑이던>, <눈물공양>, <운주사>를 펴냈고, 방어산 마애사에 시비 "어머니", "아버지"가 세워져 있다.

박노정 시인은 제1회진주민족예술인상(2008년), 개척언론인상(2009년), 경남문학상(2010년), 토지문학제 하동문학상(2015년)을 수상했다. 또 고인은 진주가을문예운영위원장을 맡아 신인 발굴에 앞장서 왔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진주성 촉석루 의기사에 걸려 있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강제로 뜯어냈고, 이로 인해 다른 시민단체 대표 3명과 함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박 시인을 비롯한 이들은 벌금 납부를 거부했고, 2007년 6월에 1주일 동안 노역장에 유치되기도 했으며, 이에 시민들은 성금을 모아 대신 납부하기도 했다.

당시 '친일 논개영정' 철거가 계기가 되어, 그 뒤 경남 진주시와 전북 장수군(논개 출생지)이 힘을 합쳐 '표준 논개영정'을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음은 고인이 남긴 시다.

서시

박노정

저녁답
노을이 흔들리면 홀로 나서라.

책도 아예 덮어 두고
멀어져 간 사람도
다시 올 기쁨도

한 가닥 상념마저 다 지우고
터벅터벅 오솔길 혼자 걸어라

저녁답 노을이 가라앉거든
데운 가슴 하나만 챙겨 오너라.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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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김언희 시인이 조사를 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김언희 시인이 조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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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노정 시인이 지난 7월 4일 저녁 별세한 가운데,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으로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고 박노정 시인이 지난 7월 4일 저녁 별세한 가운데,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으로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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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박제광씨가 고인의 시 <서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박노정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7월 6일 저녁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연 "시인 박노정을 기리다"는 제목의 추모문화제에서 박제광씨가 고인의 시 <서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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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노정 시인의 빈소.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노정 시인의 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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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시인 "언제나 시인 너머 시인으로"

김언희 시인은 이날 조사에서 "선생님, 지난 근 삼십년, 연배로 치자면 세 살 터울 오랍이신데, 그 세 살 터울이, 저에게는 언제나 삼십년 터울이었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건만 아무리 기를 써도 도무지 따라 잡을 수 없는 삶을 선생님은 사셨습니다"며 "그 깊이와 너비를 가늠할 수도 없는 삶, 선생님은 언제나 선생님 너머를 사셨습니다. 언제나 시인 너머 시인으로 사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불의 앞에서 '그기 무슨 말이라' 벽력 같으셨으며, 모든 가물거리는 것들 앞에서, '내가 안 있나' 대책 없이 등을 대어주셨습니다. 그 등에 가장 많이 업혔던 것이 저였습니다"며 "선생님. 겨우 등단한 핏덩이 시절, 시마저도 기이한 저를, 고루한 손가락질에 상처 입을세라 늘 업고 계셨음을, 이 조사를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업고 계심을 이제야 느낍니다, 선생님.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군들, 선생님 등에 업혀본 적 없는 이가 있겠습니까"라고 이었다.

김 시인은 "소설가 이제하는 고향 마산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어느 도시에 청정한 노인 한 분만 계셔도 그 도시는 결정적인 퇴락을 면한다고 썼습니다"며 "선생님, 진주는 선생님 같은 어른을, 시인을 또 모실 수 있을런지요. 돌이켜보면 세상은 선생님의 꿈을 담기에 너무 좁았습니다. 훤칠하신 선생님의 사대조차도 선생님께는 너무 비좁았습니다"라고 했다.

또 김언희 시인은 "이제 사복이 띠풀 아래로 어미를 업어 모시듯, 선영 앞 백일홍 그늘로 선생님을 업어 뫼시니, 그 아래 연화장, 명랑하고 청허한 그 세상에서 한숨 푹 주무십시오. 그리고 평생 꾸시던 꿈, 철들 이 세상 꿈, 한 천년 넉넉히 꾸십시오"라며 "꿈보 시인 박노정 선생님. 하지만 일 년 중 석 달 열흘은 세상의 모든 백일홍 희고 붉은 그 꽃숭어리로 저희 곁으로 돌아오십시오, 선생님"이라고 했다.


태그:#박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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