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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독의 발견은 인류사에서 중대 사건이었다. 인쇄술이나 나침반에 비교하는 건 무리일지 모르지만, 묵독은 학습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과연 발전만 있었을까? 쓰기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의 기억력이 후퇴했다고 지적한 고대 학자의 이야기도 있다. 낭독과 낭송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을까?

첫 번째 손실은 자명하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소리 내 읽기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향연이다. 그것이 사라졌다. <호모큐라스>의 저자 고미숙은 지적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장이 없어진 탓이다. 성장한다는 건 말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골목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 통로가 다 끊겼다. 골목은 사라졌고, 거리에는 광장이 없고, 학교와 집에는 마당이 없다. 이벤트와 쇼는 다 구경을 위한 것이지 쌍방향적 소통의 무대가 아니다. (30쪽)

인류는 글자를 발명하고서도 마음속으로 읽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또 천년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사실 그 이상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디킨즈와 쌍벽이라는 평가를 받던 소설가 쌔커리는 자신의 소설이 음란하다는 지적에 대해,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우리 시대 귀부인들의 신체에서 가장 순결한 부분은 귀다."

순결한 귀에 음란한 소설을 들려주어 죄송하다는 독설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무려 빅토리아 시대에도 낭독이 일반적인 독서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1800년대 중반에도 다 같이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오디오북 출판사 오더블(Audible)은 저녁 시간에 가족과 함께 오디오북 듣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가족과 함께 책을 큰 소리로 읽던 전통을 되살리자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고미숙 역시 독서란 원래 소리를 동반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독서란 큰 소리로 책을 읽는 것을 뜻한다. 독서라는 한자를 한번 써보라. 讀. 보다시피 말씀 언(言)이 들어 있다. '소리 내어 읽는다'는 의미다. 그냥 눈으로만 보는 것은 간서(看書)라고 했다. (91쪽)

로큰롤이 등장하고 청소년들의 청력 감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니의 워크맨, 그리고 MP3의 발명이 그 현상을 더욱 가속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리가 아닌 소음에 노출되고 길든 우리 세대와는 달리 옛 현인들은 자연의 풍부하고 깊은 소리를 모두 느끼고, 구별할 줄 알았다.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건 성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52쪽)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한 대목이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면서 들은 물소리를 묘사하는 연암의 표현력이 놀랍다. 정말 숲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낭독이 가져오는 혜택은 소통의 회복과 소리의 재발견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정통한 저자는 낭독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한다고까지 말한다. 현대인은 잘 쉬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휴식을 마치 프로젝트 대하듯 한다. 한 해 한 번뿐인 여름휴가를 계획하면서 일분일초 단위로 동선을 계획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참으로 통쾌한 일갈이다.

휴식의 정의는 간단하다. 숨결이 고르게 되고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 오장육부의 기운이 매끄럽게 순환하는 것, 이런 활동을 일러 휴식이라 한다. (중략) 그래서 낭송이 가장 좋다. 반야심경이나 주기도문, 성당의 미사문 등이 다 묵독이 아니라 낭송을 위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경전들을 낭송하면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이는 없으리라. 소리의 울림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태가 곧 영성이다. 같은 이치로 고전을 낭송함으로써 내 몸과 우주가 감응하게 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휴식이 있을까. (132-133쪽)

이렇게 말하며 저자는 낭송이야말로 최고의 양생술이라 칭한다. 서정록의 <잃어버린 지혜, 듣기>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낭송할 때 인간의 뇌파가 우주의 평균 주파수, 소위 '슈만 공명'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전한다.

저자는 차마고도로 유명한 윈난성에 들렀다가 <인상여강>이라는 공연을 감상했다고 한다. 소수민족 5백여 명의 배우들이 노천 무대를 내달리는 70분짜리 공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고.

그런데 최첨단 시각효과로 치장한 <아바타>보다, 소리에 파묻힌 <인상여강>에서 저자는 자연을 더 가깝게 느꼈다고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풍부한 감각들을 모두 시각의 노예로 삼고 지내는 현대인들의 삶이 옳은 걸까, 건강한 걸까, 생각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이 책을 소리 내 읽고 있었다.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2014)


태그:#고미숙, #<호모 큐라스>, #낭송,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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