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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8개월째인 30대 임산부입니다. 임신은 처음이라 아직도 제게 생긴 변화가 익숙지 않고 가끔은 얼떨떨하기도 합니다. 30년 평생 자랑할 것이라고는 몸 건강하고 체력 짱짱한 것밖에 없던 사람인데, 임신 이후 감기, 치질, 등창, 요실금, 속 쓰림 등 별의별 병이 딸려 오네요.

하지만 임신으로 생긴 변화는 질병뿐이 아닙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낳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끊었습니다. 밥 차려 먹기 귀찮을 때, 밥 자체가 먹기 싫을 때, 이유 없이 얼큰한 게 당길 때, 야식 생각날 때, 그리고 또 어떠어떠한 때, 죄의식 없이 끓여 먹곤 했던 라면을 멀리 하기 시작했지요. 평소 라면을 자주 즐기는 편도 아니었으나,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괜히 더 먹고 싶고, 점점 더 먹고 싶어지네요.

그런데, 라면에 대한 갈망이 고조되고 있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라면 하나 참는 것도 힘든데, 라면이며 치킨이며 피자며 햄버거며 닭갈비며 떡볶이며 순대며 짜장면이며 먹고 싶은 것들을 매일같이 참아야 했던, 전 군인아저씨 우리 신랑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 생활 할 때 먹고 싶은 거 못 먹어서 얼마나 힘들었냐" 하고 말하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삼시 세 끼 잘 나오고 좋던데 뭘"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도 그날따라 피자나 치킨 같은 거 먹고 싶을 때 있잖아"

"PX에서 팔긴 팔아"

"체인점 피자는 아니잖아. 냉동피자 아니야?"

"그건 그렇지"

신랑은 그게 뭐 힘든 일이냐는 듯 말했지만, 1년 9개월 동안 계속된다면 무던한 사람이라도 힘들 것 같습니다. 임산부는 인스턴트나 못 먹지, 사실 '엄마가 잘 먹어야 아기도 건강하다'는 주변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마치 아이를 위하는 척, 야식까지 챙겨 먹지 않습니까. 근데 군대 안에 있으면 야식은커녕 그날 아침 메뉴조차 선택할 수 없으니... 사실 동등하게 비교해서는 안 될 듯도 싶습니다.

그럼에도 임신과 군대는 여러모로 비슷한 듯합니다.

하루는 마트에 20kg 쌀을 주문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초인종이 울리고 기사님이 쌀 포대를 신발장 앞에 놓아 주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쌀 포대를 질질 끌며 부엌까지 가져가고 있는데, 문득 '20kg 쌀 포대 하나 십 여 미터 끌고 가는 것도 힘든데, 이걸 짊어지고 우리 신랑이 40km를 행군했다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그 40km가 얼마나 아득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인생의 귀한 시간을 희생한다는 점에서도 임신과 군대는 서로 비슷합니다. 원해서 낳는다고는 하지만, 엄마가 됨으로서 개인적인 것들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속이 상합니다. 그래도 모든 개인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군인에게 비할 바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 초반을 뚝 떼서 나라에 바치는 건데요, 사실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곱게 말해 '속상하다'이지 사실 저라면 '억울하다'는 기분도 들 것 같습니다.

임신과 군대의 결정적인 공통점은 따로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라고 할까요.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드니 슬슬 분만이 걱정되더군요. '아이가 무사히 잘 태어나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있지만, 솔직히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의학과 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은 안전하게 출산한다고 하지만, 100%라고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고라는 건 언제든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날 수 있고, 죽음 앞에서는 누구든 초연하기 힘드리라 생각합니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입대하기는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한반도 정세로 인해 누구도 평화를 100% 장담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신랑이 전역하기 몇 달 전인 2015년 여름, '전쟁이 나네 마네' 하는 상황이 발생했었지요. 이 무렵 신랑은 밤에 잠을 잘 때도 총을 껴안은 채 전투복을 입고 잤다고 합니다. 신랑이 말은 안 하지만 사실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최전방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안 됩니다.

사실 군대에서 겪는 힘듦과 고통이 이뿐이겠습니까. 머리 감다 샴푸라도 조금 눈에 들어가면 그게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는데, 화생방 훈련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만삭이 되니 때로는 청소기 돌리는 것도 허리 아프고 힘든데, 겨울이면 하늘에서 내린다는 하얀 쓰레기를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피고 치우려면 얼마나 힘들까요. 팬티 개는 법까지 정해져 있다는 군대에서 1년 9개월간 군율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우리는 군복무를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든 다 가야 하는 군대이므로 당연한 의무이기는 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도 좋을 만큼 쉬운 고통과 가벼운 희생은 결코 아닌 듯싶습니다. 군 복무는 오히려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다 수행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힘들게 힘들게 이행했어도 '표도 안 나고 생색도 안 나는' 그런 요상한 희생입니다. 목숨 걸고 다녀왔는데 목숨 건 표가 하나도 안 나는 그런 이상한 희생이죠. 이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임신을 하고 나니 보이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여혐', '남혐'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남자를 혐오하게 된 사람도, 여자를 혐오하게 된 사람도 제각기 말 못 할 사연이 있겠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혐주의자나 여혐주의자가 다수는 아닐 것입니다. 아직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여혐주의자나 남혐주의자를 보지 못 했습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관련 뉴스에 비난의 댓글이 넘쳐 나고 있고, '한남충'이니 '김치녀'니 하는 댓글에 엄지손가락이 수백, 수천 개씩 눌리는 걸 보면, 보통의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들도 사실은 일종의 박탈감이나 억울함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대표적인 문제가 남자의 경우 '군대'라고 봤습니다.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저는 하루 빨리 진정한 평화가 찾아와서 대한민국 남자들의 의무적 군 복무가 자발적인 입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갔다 온 사람 남성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그 군필 남성도 언젠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거나, 결혼하지 않는다면 조카를 두거나, 친구 아들을 보거나 할 것이므로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대신 이미 군대에 갔다 온 남성들에게 충분히 감사를 표했으면 합니다. 이름 모를 어떤 남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여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는 덕택에 꼬맹이 여자아이부터 여고생, 여대생, 직장인 여성, 엄마, 누나, 여동생, 할머니까지 발 뻗고 잘 수 있네요.

그리고 이것이 저는 여혐과 남혐을 풀 수 있는 해법이자, 역설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올 봄에는 미투 운동이 퍼졌으며 이제는 탈코르셋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절반인 남성들의 관심, 지지나 참여 없이는 온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여성 관련 문제는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아직도 해결돼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도 일상에서 여전히 느낍니다. 성범죄에의 노출, 워킹맘으로서의 고충, 경력 단절, 직장 내 차별, 가부장적 사고의 잔재 등 여성이 겪고 있는 갖은 문제나 어려움을 저는 남자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쪽짜리 해방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받아 온 역차별 문제도 같이 공감해 주고 개선책이 나오도록 도와야 하며 받은 희생과 배려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여혐주의자가 아닌 건강하고 평범한 보통의 남성이라면 그런 공감과 감사 표현만으로도 여성들이 겪고 있는 갖은 차별과 범죄에의 공포를 이해하고 여성 해방을 지지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그 첫걸음이 역차별의 상징인 군 복무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장정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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