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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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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0년대에 사내라는 게 그리도 부끄러웠다
동일방직 쪼깐이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걔들에게 똥을 퍼먹이는 것이 사내들이었거든
회사마다 여자들은 정의를 외치는데
사내라는 것들은 기업주들의 앞잡이였거든 (인숙아/58쪽)


늦봄 문익환 님은 1918년에 태어납니다. 2018년은 이녁이 태어난 100돌입니다.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문익환, 사계절, 2018)는 늦봄 문익환 님 100돌을 기리면서 새롭게 엮은 시집입니다. 그동안 써낸 시집에서 추려서 엮었기에 새로 캐내거나 찾아낸 시는 깃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묵은 시를 새로 엮은 시집에 흐르는 이야기는 해묵지 않습니다. 늦봄 어른은 1970년대에 이녁이 사내라는 몸뚱이여서 부끄러웠다고 밝히는데, 2010년대 사내는 안 부끄럽다고 할 만한 삶인가 하고 돌아보면 아직도 퍽 많은 사내는 부끄러운 짓을 일삼곤 합니다. 바른 길을 외치지 못하기도 하고, 계급질서를 단단히 거머쥐기도 하며, 가부장 틀을 끝까지 버티기도 하고, 으레 주먹이 앞서 나가기도 합니다.

 1975년에 나온 시집 <새 것, 아름다운 것>
 1975년에 나온 시집 <새 것, 아름다운 것>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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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잠꼬대 아닌 잠꼬대/104쪽)


늦봄 어른한테는 '통일 할아버지' 같은 이름이 곧잘 따라붙습니다. 할아버지 나이에 사회와 정치를 뒤늦게 깨달아 통일운동에 두 발을 성큼 내밀었거든요. 젊은이 가운데에도 한 발 아닌 두 발을 다 빼는 사람이 퍽 많은데, 늦봄 어른은 한 발뿐 아니라 두 발을 성큼 내디디면서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은 무엇보다 통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릴 적에는 시인을 꿈꾸었고, 젊을 적에는 신학이라는 길을 걸으며 성경을 쉽게 고쳐 쓰는 일을 했습니다. 1970년에 서울 청계천에서 앳된 젊은이가 몸에 불을 당겨 '근로기준법'을 외치자, 뒷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면서 쉰이 넘은 나이라 하더라도 몸을 바쳐 민주운동을 해야겠다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늦봄 어른은 북녘에 사는 한겨레를 '괴뢰'도 '인민'도 아닌 '동무'라는 오랜 한국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는, 참말로 이런 이야기를 잠꼬대처럼 늘어놓은 노래라 할 텐데요, 이 시를 내놓던 무렵 이런 이야기를 둘레에서는 '거 잠꼬대 같은 소리는 그만두시오' 같은 소리를 익히 들었다고 해요. 독재 서슬이 시퍼런 마당에 독재부터 고꾸라뜨려야지, 통일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라는 핀잔을 늘 들었다고 합니다.

 1978년에 나온 시집 <꿈을 비는 마음>
 1978년에 나온 시집 <꿈을 비는 마음>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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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그렇군요
분단의 장벽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군요
불신 반목 질시 적개심은 마음에 있는 거니까요 (통일은 다 됐어/149쪽)


저는 늦봄 어른 시를 젊은 날에 문득 만나 하나하나 읽어 보았습니다. 곁에 두면서 으레 읊어 보았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며 살던 무렵에도, 어린이 국어사전을 짓던 무렵에도, 이오덕 어른 글을 갈무리하던 무렵에도 늦봄 어른이 남긴 노래를 가만가만 되새기면서 "통일은 다 됐어" 하고 외치는 마음을 함께 느껴 보려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자리부터 정갈하게 다스릴 적에 통일도 민주도 평화도 온다고 여긴 늦봄 어른이라고 느낍니다. 정치 지도자가 만나기 앞서 우리부터 마음자리에서 미움을 씻어낼 적에 통일이며 민주이며 평화이며 우리 손으로 가꿀 수 있다고 여긴 늦봄 어른이라고 여깁니다.

 1984년에 낸 시집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1984년에 낸 시집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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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행정부는 사법부는 누구를 위해 있는 겁니까
공장은 병원은 신문 잡지는 TV는
88올림픽은 정치학은 경제학은 철학은 언론은
시는 소설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겁니까
뿌리가 없는데 민중이 없는데
하느님의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194쪽)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은 조그맣습니다. 두 발바닥으로, 작은 두 발바닥으로 남녘하고 북녘 사이를 가로지르고 싶던 꿈을, 발바닥만큼 작은 두 손바닥으로 흙바닥에 마주 대면서 풀내음도 꽃내음도 맡고 싶은 숨결을 담은 조그마한 시집입니다.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을 살포시 그립니다. 뿌리 깊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뿌리 깊은 마을이 되기를 꿈꾸며, 뿌리 깊은 수수한 보금자리를 저마다 손수 짓기를 비는 사랑을 한 줄 두 줄 엮습니다.

두 손바닥을 맞잡기에 한겨울에도 따뜻합니다. 두 손바닥이 만나기에 차가운 바람이 수그러듭니다. 2018년 올해에, 1918년부터 100해가 흐른 올해에, 남북녘 사이에 포근하면서 싱그러운 바람 한 줄기가 불 만할까요?

두 나라는 어깨동무를 하면서 새로운 나라로 거듭날 만할까요? 이제 모든 전쟁무기를 걷어내고 작은 살림살이를 가꾸는 길로 달라질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늦봄 어른이 늘 가슴에 품은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말마디를 읊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문익환 / 사계절 / 2018.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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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 편집자로 일하면서,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를 꾸립니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읽는 우리말 사전》《골목빛》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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