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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이성적, 합리적, 객관적이라고 여겨진다. 때문에 과학의 이름을 달고 나온 주장들은 쉽게 사회에 통용되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제시 된 '과학 이론', '과학적 주장'들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나 주장들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던 기존 이론들이 뒤집히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또한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과학자들도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편견 등에 영향을 받는다. 애초에 특정한 결론을 염두에 두고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며 연구 과정이나 결과에 연구자의 편견이 개입하기도 한다.

그 결과 과학은 그 지속적인 발전과 눈부신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여러 오명을 남겨왔다. 과학은 비이성적인 인식이나 관습을 타파하는 이성적 학문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방조하고 조장해왔다. 언뜻 차별은 사회문화적인 것이기에 과학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서 빈번하게 동원되었으며 때로는 과학자들이 앞장서서 차별을 조장하기도 했다.

'사고 능력이 낮아 고도의 추론 행위가 불가능한 반면 섹스에 집착', '생식기와 배설기관이 지나치게 비대', '진화가 덜 되어 고등 유인원에 가까운 종족'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11년 판에 실린 흑인에 대한 내용이다. 1932년 판에도 '두뇌 크기가 평균 35온스(약 992그램)에 지나지 않아 지능이 낮다', '두개골이 다른 종족에 비해 두꺼운 편으로 이는 공격용 무기로 적합하다' 와 같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 버젓이 실려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내용들이 백과사전에 실릴 정도로 당시에는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근대 생물 분류학을 정립한 과학자 린네의 작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조르주 퀴비에(1769~1832)는 고생물학과 생물분류학에 큰 업적을 남긴 동물학자다. 그는 저서에서 "유럽인의 타원형 얼굴, 직모, 오뚝한 코는 문명과 미를 상징하며, 그 천재성, 용기, 활력을 드러낸다."라고 적은 반면, 흑인에 관해선 "턱의 돌출, 두꺼운 입술은 원숭이와 직접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들은 야만의 상태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적었다. 그는 흑인의 인종적 열등함과 과발현 한 생식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코이족의 시체를 사들여 해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백인 과학자들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이 선천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이를 여러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고 설명하려 했다. 17세기에 등장한 '인종'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차이의 우열을 전제한 개념이다. 차별적 인종 개념은 19세기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과 결합되어 인종진화론으로 발전한다.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근거로 흑인을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의 유인원으로 함께 분류하거나 유인원과 백인의 중간 단계에 있는, 아직 진화가 덜 된 열등한 존재로 규정했다.

당시 인종진화론은 유럽과 미국에서 권위 있는 과학적 지식이었다. 불과 100여 년 전 구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인종 전시회'는 인종진화론적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에스키모인, 남미 팜파스의 목동, 푸에고인, 갈리비족, 아로카 인디오, 신할리족, 아샨티인, 호텐토트족, 라플란드인, 코사크인, 소말리아인, 다호메이인, 이집트인, 카리브 인디언, 코트디부알르 원주민, 인도인, 갈라인, 난쟁이 그리고 흑인. 세계 각지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인류의 진화 정도에 따른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로서 전시되었다.

1901년 혈액형이 처음 발견되자 독일 의사 둥게른, 폴란드 생물학자 힐슈펠드는 1919년 혈액형을 이용해 인종계수라는 것을 만들었다. 진화된 민족일수록 B형 대비 A형의 비율이 크다는 식으로 민족과 인종별로 혈액형을 측정해 점수를 매긴 것이다. 이 지수에 따르면 영국이 4.5로 가장 높고 프랑스(3.2), 이탈리아(2.8), 독일(2.8), 흑인(0.8), 베트남(0.5), 인도(0.5) 순이다. 1922년 일본의 외과의사 기리하라 교수 또한 일본인의 인종계수는 1.78인데 비해 조선인의 인종계수는 0.83~1.08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종지수가 백인과 일본인이 타 인종, 민족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과학은 비단 인종차별에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과학적 지식이 여성을 차별하는데 사용된 사례는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의 뇌는 남성에 비해 작고 덜 발달되었고, 여성의 자궁은 단지 아기를 담아내는 그릇일 뿐이며 생명의 본질적인 근원은 남성의 정액에만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자궁이 스스로 여성의 몸속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걸신들린 듯이 배를 채우길(임신하길) 탐하고 임신을 하지 못하면 신체적, 정신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히스테리아(hysteria)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hystera에서 유래한 단어다. 과학의 이름을 한 이러한 여성 차별의 경향성은 이후 2000년이 넘게 이어진다.

미국의 저명한 의사였던 에드워드 클락은 1873년 그의 저서를 통해 여성의 신체는 대학 교육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성적 분화에 따라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여성의 하버드 대학 입학을 반대했다. 저명한 신경학자이자 미국신경학협회의 창립자인 윌리엄 해몬드 박사는 젊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학이나 수학 등의 공부에 지나치게 집중한 결과 신경계에 이상이 생겼으며, 여성의 뇌가 남성보다 작고 19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여성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전 인류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여성은 과격한 운동을 하면 자궁이 빠질 수 있다, 다리가 두꺼워진다는 등의 이유로 마라톤 참가를 금지 당했었다. 1967년 캐트린 스위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다. 이를 알아챈 대회 관계자는 강제로 캐트린을 끌어내려고 했으나 함께 뛰던 코치와 동료의 도움으로 완주에 성공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5년 후 1972년부터 여성들이 마라톤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던 당시 과학은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온갖 분야에서 애초에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과학이 정의하는 인간은 오직 백인 남성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여성이나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즉 과학은 오직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회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들의 차별적이고 편견어린 인식이 과학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고대에서부터 지속된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결국 과학의 이름으로 우생학을 탄생시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우생학에 기반하여 1천만이 넘는 '비정상인'을 학살했다. 여기엔 유태인뿐만 아니라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 또한 대거 포함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과학의 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과거의 일일 뿐 현대적인 연구 방법과 이론들이 정립된 현대에는 이런 일들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많은 영역에서 과학은 사회의 차별적이고 편견어린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90년대 백인 인류학자들은 전 세계 사람들의 피부색과 폭력성, 소득 수준, 평균 수명, 에이즈 감염률 등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조사의 결론도 목적도 명확했다. 피부색이 검을수록 모든 수치들이 부정적이었으며 이러한 연구 결과는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강화했다. 1994년 리처드 헌스타인과 찰스 머레이는 인종별 지능지수 통계에 근거하여 미국인의 평균 지능을 위해서 저소득 계층의 추산 지원을 정책을 중단하고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현재까지도 우리는 과학의 탈을 쓴 차별적 정보들을 습득하고 체화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보다 수학에 약하다거나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진다는 내용이 너무나 당연한 '상식'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이를 뒤집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2016년 미국 백인 의대생과 레지던트를 상대로 한 설문에서 의대생의 40%, 레지던트의 25%가 흑인의 피부는 백인보다 더 두껍다고 답했다. 과거 백인 과학자들이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한 '흑인은 고통에 둔감하기 때문에 노예로 적합하다'는 식의 내용들이 아직까지도 편견으로 남아 의료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흑인과 여성 등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던 존재들이 인간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매우 최근에의 일이다. 이들의 참정권 투쟁은 곧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었다. 미국에서 흑인의 참정권이 최초로 보장된 것은 1870년이었으나 흑인들은 투표할 정도의 지능을 증명하기 위해 별도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방해조치들이 전부 폐지된 것은 불과 1966년이다. 여성 참정권의 경우 1893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영국 1918년, 미국 1920년, 프랑스 1944년, 스위스 1971년 등이며, 불과 몇 년 전인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바티칸 시국을 제외하곤 마지막으로 여성 참정권을 보장했다.

애초에 흑인과 인간을 인간으로조차 보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 과정이 결코 쉽지 많은 않았다. 이름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과학을 들먹이며 이들의 참정권을 반대했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그 근거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결론은 판에 박힌 듯이 비슷했다는 것이다. 미성숙하다. 멍청하다. 판단력이 부족하다. 감정에 휘둘린다. 충동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든 흑인과 여성이 백인 남성에 비해 열등하고 이성적 사고 능력이 없음을 과학을 이용해 증명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들 과학이 인류를 무지와 미신에서 지식과 이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백인 남성만을 기준으로 했을 뿐, 흑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을 결코 '인간'이 아니었다. 본래부터 인간이었던 이들은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과학은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여성은 어떻고 남성은 어떻다. 백인은 어떻고 흑인은 어떻다 하는 연구 결과들이 과학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곤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단편적인 연구 결과들에 기대 편견을 강화하고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과거에 비해 높은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획득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 속에서 과거 당연하게 여겨졌던 잘못 된 과학적 지식들이 차츰 수정되고 바로잡히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를 바꾸긴 쉬워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내린 편견을 바꾸긴 쉽지 않다. 무엇보다 그 대상은 바뀌었을지언정 차별의 논리는 그 대상을 바꾸어가며 반복되고 있다. 흑인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이민자로, 성소수자로, 장애인으로, 청소년으로. 차별은 언제나 사회의 가장 약한 존재로 표적을 바꿔가며 살아남고 자라난다.

과학에 의해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된 존재들이 참정권 운동을 통해 마침내 인간임을 인정받고 보통선거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만들어냈다. 그 누구나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참정권을 가진다는 원칙. 그러나 아직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보통선거에서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조건, 바로 '나이'이다. 과거 흑인과 여성과 마찬가지로 판단력이 부족하고 충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들. 바로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선거제한연령이 만 19세로 가장 높다. 6월 지방 선거를 앞두고 선거연령 하향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청소년들이 6월 지방선거부터의 선거연령 하향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삭발을 하고 한 달 넘게 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는 냉담하기만 하다. 어린 것들이 뭘 아냐는 냉소적인 반응들. 그러나 과거 흑인과 여성을 차별하던 양상과 너무나 닮은 모습들이 나이 어린 존재들에게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에게 성인과 같은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은 절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수많은 과학적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증명하듯이 과연 이러한 '과학'은 과연 진실일까? 과연 미래에도 이러한 연구들이 여전히 유효할까? 한 때 과학의 이름을 달고 있던 여러 학문들이 결국 과학에서 배제되었듯이, 특정 집단을 배제하기 위해 동원된 과학의 오명의 역사로 또 다시 기록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며 성인과 구분하고 다르게 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사람의 성숙과 미성숙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참정권을 칼로 무 자르듯이 특정 연령을 기준으로 똑 잘라 규제하고 보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특정 집단을 열등하다 규정하고 이들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동원되는 과학 논리들이 사실은 차별과 편견이 과학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태그:#과학, #여성, #흑인, #청소년, #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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