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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떠나 한적한 하이킹을 하기 위해 차량이 겹치지 않는 자전거 도로를 찾다보면 생각보다 선택지가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적어도 20km 이상은 돼야 하고 도심을 지나지 않는 조건을 더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찾게 되는 것은 거칠은 임도 혹은 큰 강의 하류쪽에 건설된 자전거 도로다.

그런데 막상 강변을 거닐게 되면 매체에서 보던 수려한 경관이 마음을 적시기보다는, 뙤약볕에 지치고, 가끔씩 올라오는 고인 물의 악취가 축축하게 폐부에 물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심한 풍경에 금세 지루해지기 쉽다.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는 한, 치유의 하이킹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고행이 될 확률이 높다. 자전거가 아니라 걷는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여기 매우 적절한 강변길이 있다. 꽤나 길게 연결된 코스임에도 강의 중류 쪽이어서 풍경이 심심하지도 않고, 강의 규모에 비해 대단히 맑은 수질을 자랑하는지라 악취 또한 없다. 조금만 더 중류로 올라가면 시원한 그늘도 종종 만날 수 있는, 보기 드문 강변 길이다.

섬진강 중류 푸르른 풍경 뒤편으로 길이 보인다. 찻길과 중복 없이 20km남짓의 자전거(산책)길이 여러 구간 조성되어있다.
▲ 섬진강 중류 푸르른 풍경 뒤편으로 길이 보인다. 찻길과 중복 없이 20km남짓의 자전거(산책)길이 여러 구간 조성되어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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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바로 '섬진강'이다. 우리는 지난해 '제14차' 행사를 통해 '진메마을-천담마을-구담마을-장구목' 코스를 걸었다. 이곳이야말로 섬진강 코스의 백미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관련 기사 :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니?).

올해의 첫 번째이자 '제18차'인 이번 걷기 행사(5월 12일)에서는, 14차 코스에서 조금 더 남진해 '순창군 유등면'에서 '남원시 대강면'으로 연결된 코스를 남북 방향으로 14km정도 걸었다. 향가터널을 통과하는 코스였다. 매 회차마다 고된 도보길이지만 항상 신청자는 3배수가 넘어간다. 고생을 즐길 줄 아는 멋진 학생들이다.

오히려 반가웠던 비 예보

시간당 1~4mm의 비가 예보됐다. 강풍을 동반하지 않는 적은 양의 보슬비였기 때문에 행사를 취소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반가운 비였다. 그늘이 거의 없는 코스였고, 5월의 중순 4시간에 가까운 도보 행진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햇빛이었기 때문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사전 교육 때에도 모자와 선크림을 꼭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에 또 강조를 했던 차였다.

시내 상점들에 전화를 돌려서 비옷 80개를 공수했다. 색깔은 일부러 통일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구상한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색색의 비옷을 입고 빗속을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컬러풀 행진 대강면 기점을 출발한 학생들의 모습.
▲ 컬러풀 행진 대강면 기점을 출발한 학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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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었다. 싫은 내색의 볼멘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에 가득 찬,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들뜬 마음이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소리였다.

"와, 진짜 비온다. 대박."
"그렇지. 이게 바로 전고(전주고등학교)의 클라스지."
"선생님. 그냥 비옷 안 입고 비 맞으면서 걸으면 안 됩니까?"
"쌤~ 우산 써야 돼요?"

한 명 한 명의 질문에 간단히 응답을 하며 4열 종대로 앉아번호를 시켰다. 인원점검을 마치고 지체 없이 바로 출발했다. 14km의 행진. 예상 소요시간간 4시간. 점심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진한 구름과 진한 녹색 사이로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는 구름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과 그 물을 먹고 사는 식물들이 녹색의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 진한 구름과 진한 녹색 사이로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는 구름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과 그 물을 먹고 사는 식물들이 녹색의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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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인솔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행사를 한 달 앞두고 오른쪽 발목의 인대가 완전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다른 이에게 맡기라는 것을 만류하고 자전거를 전세버스에 싣고 온 것인데, 생각 외의 장점이 있었다. 선두와 후미를 왔다갔다 하면서 아이들의 속도를 조절하고 낙오될 수 있는 무리를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미의 아이들을 격려하며 선두 그룹에게 속도를 지정해주고 다시 후미로 와서 아이들을 격려했다. 잠시 멈춰서 한 컷.
▲ 후미의 아이들을 격려하며 선두 그룹에게 속도를 지정해주고 다시 후미로 와서 아이들을 격려했다. 잠시 멈춰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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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것보다 무리의 속도 편차가 심했다. 행군하듯이 열을 맞춰서 걷게 하고자 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모든 학생이 도착을 해야 도착지점에서 버스를 타고 식사 장소로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후미 학생의 속도에 박차를 계속 가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훈훈했던 장면이 여기에 있었다. 후미 그룹보다도 50여 m 남짓 뒤처진 두 명의 학생을 발견하고, 늦게 걷는 이유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해찰이나 잡담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면 경보 수준의 빠르기로 후미 그룹에 합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쌤. 이 친구가요. 아까 걷다가 발바닥이 갑자기 아프다고 해서요. 속도를 맞춰주고 있어요. 이게 최대로 빨리 걷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친구를 위해 속도를 맞춰주고 있었던 이 학생은 올해 2학년 학생으로, 작년에 개최됐던 네 차례 걷기 행사에 모두 참여해 '특차 프리패스'로 선발된 학생이었다. 다소 엉뚱하고 산만했던 1학년 때의 모습에서 서서히 탈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긴 했는데, 이처럼 속이 깊은 아이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미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한 것을 요구 할 수 없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그랬구나. 그래봐야 30분 차이겠지 뭐. 선생님이 앞으로 가서 속도를 조금 늦출게. 그리고 먼저 도착하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한테 전화해. 알겠지?"

친구와 함께 가장 후미의 두 학생이 서로를 의지하며 걷고 있다.
▲ 친구와 함께 가장 후미의 두 학생이 서로를 의지하며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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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섬진강 나무와 습지 사이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섬진강의 모습.
▲ 아름다운 섬진강 나무와 습지 사이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섬진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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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꼴밭 중간에 만난 쇠꼴밭의 풀들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 쇠꼴밭 중간에 만난 쇠꼴밭의 풀들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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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터널 지나 만난 뜻밖의 선물

이날, 나도 그리고 학생들도 모두 잊지 못 할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하나 생겼다. 향가터널(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철도터널을 관광용으로 개조)을 향해 힘든 걸음을 뗄 때는 전혀 예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향가마을, 향가터널.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이곳은 사실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향가터널과 향가목교는 일제시대 일본군이 남도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건설하던 곳이었다. 터널을 뚫고, 교각 위에 철로를 놓기 전에 해방돼 기둥만 남았다. 터널은 마을 사람들의 통로가 됐고, 기둥은 마을의 명물이 됐다. 이를 자전거길로 개조한 것이다.

향가목교 자전거길로 개조된 향가목교
▲ 향가목교 자전거길로 개조된 향가목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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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목교 위 유리전망대 유리전망대에서 교사들과 학생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무서운 모양인지 유리에 발을 디디지 못하는 모양새가 재미있다.
▲ 향가목교 위 유리전망대 유리전망대에서 교사들과 학생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무서운 모양인지 유리에 발을 디디지 못하는 모양새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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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목교를 건너면 작은 쉼터가 나온다. 70여 명의 학생들이 한데 모이기까지 약 20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은 자연스레 쉬는 시간이 됐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젖은 지폐를 꺼내어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는 학생들. 그래도 19살 됐다고 쓴 커피가 맛있단다. 투명한 비옷을 상의 삼아, 시스루 패션이라고 우겨대는 장난끼 많은 녀석의 얼굴에, 비를 맞아 색깔이 진해진 풍경만큼이나 또렷한 웃음이 흐른다.

향가터널 입구 500미터가 채 안되는 길지 않은 터널. 여름에도, 겨울에도 이 곳은 여행자들과 마을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 향가터널 입구 500미터가 채 안되는 길지 않은 터널. 여름에도, 겨울에도 이 곳은 여행자들과 마을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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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커다란 천막 두 개가 보였고, 본능을 이끄는 향내음이 허기진 뱃속으로 들어왔다. 마을 잔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중년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우리의 행렬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상당히 많으네요잉."
"전주고 학생들입다. 70명 정도 됩니다."
"아이고. 70명이랴 70명. 고기 한 점 씩 먹고 가야 쓰겄구만."
"아이고. 안그셔도 됩니다. 애들을 어떻게 다 싸주시려고..."

만류하는 나의 입은 어느새 향긋한 상추쌈으로 가득 차버렸다. 뒤에 들린 이야기로는, 걷는 여정이 너무 고돼 여기서 고기를 한두 점 못 먹었더라면 쓰러질 뻔 했다고 한다. 하늘이 내려준 천국의 양식이었다고... 그 많은 아이들의 입 속에 고이 쌈을 싸서 넣어주신 동네 주민 여러분들께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 또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마을 잔치 뜻밖에 고기를 얻어먹게 된 아이들. 우천 관계로 천막을 본래 위치보다 터널 쪽으로 가깝게 옮기게 되어 우리의 행렬과 맞딱뜨린 것.
▲ 마을 잔치 뜻밖에 고기를 얻어먹게 된 아이들. 우천 관계로 천막을 본래 위치보다 터널 쪽으로 가깝게 옮기게 되어 우리의 행렬과 맞딱뜨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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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점심은 언제 먹어요?"라는 말을 스무 번은 들었다. 거의 한 무리 당 한 번씩 내게 물은 셈이었다. '순댓국을 향한 행진'이라고 명명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한 발걸음이었다. 약간은 허기가 채워진 채로 다시 발바닥에 힘을 주었는데 이내 아이들의 입에서 또 다른 탄식이 터져나왔다.

"쌤. 뭘 먹으니까 더 배고파요."
"그러냐? 나도 그렇다. 아주 그냥 위액 분출이다."


행복했다. 힘든 여정을 함께하며 나누는 진심어린 대화였다. 별 것 아닌 내용들이었지만 교사와 학생 사이의 딱딱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자연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였다. 배고픔과 고단함은 우리에게 끈끈한 매듭이 됐다.

끌어주고 밀어주며 허리가 뻐근하다며 느려지는 친구의 뒤를 받쳐주는 훈훈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 끌어주고 밀어주며 허리가 뻐근하다며 느려지는 친구의 뒤를 받쳐주는 훈훈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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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4시간에 걸쳐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14km를 완주했다. 빗속이라서 더욱 낭만적이었던 순례길 걷기 행사였다. 버스를 타고 30분을 이동하여 미리 답사를 통해 가계약을 맺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한창 자라는 학생들의 먹성은 대단했다. 식당의 공기밥을 모두 털어냈고, 음료수 냉장고 또한 싹 비웠다. 사장님이 기특하다는 표정과 함께 혀를 내두르셨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식사시간. 허겁지겁 퍼먹기도 바쁜 와중에 사진을 한 장 담았다.
▲ 기다리고 기다리던 식사시간. 허겁지겁 퍼먹기도 바쁜 와중에 사진을 한 장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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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걷기 행사는 진안으로 향할 계획이다. 7월,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전라북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원으로 이동하여 조금이라도 시원한 공기를 마실 예정이다. 그 때 또한 학생들과 대자연 속에서 들숨과 날숨을 쉬며 하나 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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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사.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