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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김현자. '솥귀현(鉉)'에 '아들자(子)'를 쓴다. 아들자(子)가 딸과 아들, 그 아들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을 뜻한다는 것을 몰랐던 열 살 남짓 꼬맹이 땐 '딸인 내게 왜 하필 남자를 뜻하는 '아들자'가 들어간 이름을 지어줬을까? 그래서 내가 예쁘지 않은 건 아닐까?' 이처럼 생각하기도 했고 원망도 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싫었다.

"'자'로 끝나는 이름은 일본(식) 이름이래!"

내 이름이 싫었던 또 다른 이유는 걸핏하면 이와 같은 말을 듣곤 했기 때문이다. 70~80년대에 자랐다. 친구만이 아니라 어떤 언니가, 그리고 어떤 어른들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네 엄마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사람이지?"

그들 중 누구는 경멸스러워 하는 눈빛과 말투로 이처럼 노골적으로 묻기까지 했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에 대한 막연한 분노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누가 이처럼 말하면 어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막연히 죄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공연히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지곤 했다. 그래서 더욱 싫은 이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스스로 위로받곤 했던 것은 미자나 영자, 숙자 등보다 덜 흔하고, 덜 촌스러운 한편(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현명하거나, 지혜롭거나, 그래서 존경받는 사람 혹은 현인을 뜻하는 현자(賢者)'와 한자는 다르지만 부르는 대로는 같다는 것이었다.

 누가 이처럼 말하면 어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막연히 죄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공연히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지곤 했다. 그래서 더욱 싫은 이름이었다.
 누가 이처럼 말하면 어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막연히 죄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공연히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지곤 했다. 그래서 더욱 싫은 이름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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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질현(賢)자를 참 좋아했다. 어질현자가 들어간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이름에 '현'자가 들어가는 친구나 누가 "어떤 현자를 쓰냐?"고 물으면 "어질현자를 쓴다"고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곤 했다.

한발 더, 어질현자 쓰는 것을 일부러 말하거나 하면서 뻔뻔스럽게 뻐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중학교에 입학할 때 한자 쓰는 칸에 원래 싸야 할 솥귀현 대신 어질현을 쓰는 것을 시작으로 한동안 그렇게 쓰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데 "다리에서 주워왔대!"란 농담 한마디로도 출생을 의심하고 고민할 정도로 남의 말 한마디로도 죽고 살던 어렸을 때는 나름 큰 고민이었다.

그런데 어렸을 때만 싫었나. 최근 몇 년 전까지도 그리 썩 만족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 은채, 채영, 혜영, 유신 등으로 개명할 때 '나도 개명해볼까?' 개명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실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개명 바람이 불던 그 훨씬 이전인 1980년대 후반, 3년 넘게 '주연'이라는 이름으로 살기까지 했다. 지금도 가끔 주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말이다.

여하간 외면하고 싶고, 그래서 버리고 싶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젠 내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지도록 감동하기도 하고,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3년 전 여름, 아버지로부터 내 이름에 대해서 들은 이후부터다.

"기사만 쓰는 직업기자도 아닌데, 돈 때문에 쓰나요.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글 쓰는 사람들 돈 못 버는 것. 제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요. 쓰기 참 힘들 때도 많고. 그래서 관둘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셨잖아요.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쫒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진짜 부자라고. 사람은 평생 공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쓰고 또 쓰죠. 함께 알아야 할 일들도 많고. 그래서 바뀌어야 할 것들도 많고요. 뭣보다, 아버지 닮아서 그런가? 여전히 책이 참 좋네요."

"현숙이하고 현자, 둘을 주면서 "여식(딸)이 현모양처로 살게 하려면 현숙이가 좋고, 이름을 널리 알리는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려면 현자가 좋다고 하는 거야. 현숙이는 어질현자를 쓰고 현자란 이름에는 명예가 들어 있어 여식아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솥귀현을 썼다면서. 처음엔 현숙이로 할까 했지. 그런데, 여식아들(여자 아이들)도 많이 배워야 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이끌어 갈 수 있다. 앞으로는 더욱 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다. 내 딸은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예전엔 여자들은 남자 뒷바라지나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우리 동네에도 아들하고 여식아(딸)를 차별해 키우는 집도 많았고. 그런데 아버지 생각엔 여자 없이는 남자들이 태어날 수 없는데, 사람을 키우는 것은 여자들이라 여자들이 중요한데 그래선 절대 안 된다. 크게 잘못된 거다. 싶은 거야. 그래서 당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현자를 선택했는데, 책도 좋아하고 좋은 글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내 딸! 아버지가 언제나 많이 고맙다."

내 이름에 대해 들려주신 것은 처음이었다. 내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쿵~!'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마디로 작은 깨달음, 그런 충격이었다.

이후 한동안,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많은 생각들을 하고 또 했다. 그리고 참 많이 후회했다. '좀 더 일찍 내 이름에 대해 물어볼 것을.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난 사람으로 살 것인데' 이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언젠가 부터는 가슴이 싸르르,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했다. 아버지의 여성들에 대한 선구자적인 생각과 선택에 대한 존경심, 그 감동 때문이었다.

 내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쿵~!'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쿵~!'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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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미투 운동'이 확산된 해로도 기억될 것 같다. 미투가 한창 거세던 올해 초봄. 친구들이나 지인을 만나면 미투가 단연 화제였다. 참으로 씁쓸하게도 살아오면서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벼운 정도부터, 한때 남자 만나는 것이 두려웠을 정도로 충격적인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길 하곤 했다.

"90년대 이전에 태어난 우리나라 여성치고 가벼운 성추행이라도 전혀 당하지 않은 사람 있을까? 엄연히 성추행인데, 남자들의 당연한 행동으로 생각하는 남자들도 많았던 것 같아."

그들 중 누구는 이처럼 말하기도 했다. 나도 이십대에 여러 차례, 버스와 지하철에서, 그리고 길을 가다가 가벼운 성추행을 당했다. 그래서 그이의 말에 동감한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성추행이 만연했을까?

70~80년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때 참 많은 여자아이들의 꿈 또는 장래희망은 '간호사'였다. 사회 전반, 여성의 순종과 희생, 헌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현모양처를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포장해 자연스럽게 강요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모양처'를 장래 희망에 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자란 한때 내 꿈도 간호사였고, 현모양처였다.

"그래봤자(공부는 물론 글짓기, 그림그리기 등 뭐든 잘해도) 너는 여자잖아. 여자인 주제에!"

그 남자애는 지금 어떤 50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 그동안 쌓은 것들을 하루아침에 잃는 남자들을 보며 문득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게 이런 말을 했던 한 남자애가 궁금해졌었다. 나보다 그 무엇도 잘하는 것 없음에도 남자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잘났다 싶었는지, 나에 대한 멸시의 눈빛으로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그 남자애의 근황이 말이다.

 내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쿵~!'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마디로 작은 깨달음, 그런 충격이었다.
 내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쿵~!'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마디로 작은 깨달음, 그런 충격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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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주신 이름 덕분이었는지, 아버지의 사고방식 영향으로 사랑을 받고 자라 당당함이 내 안에 자란 때문인지 그때 참 당찬 다짐을 했다. '남자라는 것만으로 까부는 남자애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면 뭣보다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해져야 한다'고. 그때부터 책을 참 많이 읽게 됐다. 지금까지 내가 책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그 말은 그 아이로서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도 딸들은 집안일만이 아니라 농사일, 장사까지 시키는 등 종처럼 일하게 하면서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죄다 챙겨 먹이는 등 떠받들다시피 키우는 집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던 1990년대 후반까지도 아들을 선호, 딸이라면 낙태도 거리낌 없던 게 우리사회 풍조였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었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이나 아버지들이 현숙한 여자나 현모양처를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던 그런 시대였는데, 내 아버지는 딸인 내가 당당한 한 사람, 당당한 여성으로 살기를 바라셨다니. 단지 그 이유만으로 '현자'라는 이름을 선택하신 것이다. 평범한 농부인 내 아버지가 말이다.

미투 운동 관련 뉴스를 보며 생각하곤 했다. 내가 태어나던 60년대 중반 당시 우리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남자들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과 삐뚤어진 욕망에 짓밟히지 않았을 거라고. 남자 형제들을 위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이 훨씬 적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많은 여자들이 이렇게 힘든 고백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되었을 거라고 말이다.

부모들 대부분 내 자식이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며, 또는 부와 명예를 얻는 등 성공하고 살기를 바라며 이름을 짓곤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람으로서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딸이길 바라며' 이름 주신 뜻이 더없이 소중하게 와 닿는다. 가난하게 살고 있음에도 내가 바라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네가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누군가 해야 하는 소중한 일이지만 어쩌면 먹고 살기에도 힘들고 몸이 고달픈 이름을 지어줘서 힘든 일이 자꾸 생기는 것 아닐까? 크게 후회하기도 하지 않았나(후회했다)... 그런데 90 가까이 살아보니 돈은 많으면 좋긴 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하진 않더라!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줘서 아버지가 많이 고맙다."

내 이름에 대해 들려주던 그날 아버지는 칠남매 중 가장 힘들게 사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기까지 했다. 죽는 날까지 노력한다고 아버지가 주신 그 이름값 다 할 수 있을까. 이름값 최대한 하면서 살려면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 생각하곤 한다. 살아가는 힘이 됨은 물론이다.

덧붙이는 글 | '이름 때문에 생긴 일' 공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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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