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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이야기: 남미 상사병을 오랜 세월 앓던 기자,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 대륙에 두 발로 딛고 선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번째 행선지는 남아메리카의 허리 격인 칠레의 산티아고. 현지인 친구 다니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초대도 염치없이 넙죽 받았겠다, 여행 초반은 순탄해 보였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크리스마스 연휴기간 동안의 범죄발생률 증가로 시내 관광을 미루게 된다. 그래도 어느새 시간은 가 나를 '자유롭게 할 그날'은 오고 처음으로 중심지로 나서게 되는데...)

칠레와 대한민국, 두 나라를 대표하는 수다쟁이들이 산티아고 시내 한복판에서 패배를 선언했다. 입에 모터를 장착한 듯 매일같이 수다를 떠는 우리지만 오늘만은 조개처럼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고, 싸웠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더 아니올시다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하늘을 가리킬 것이다. 자비심없이 내려쬐는 살인적인 땡볕을 선사하는 저 태양을 말이다.

산티아고의 여름 날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푹푹 찌는 일관성이 있었다. 하루쯤 쉬어도 되련만 이 여름 끝에 개근상이라도 타야하는지 예외란 없었다. 우리의 열대야 현상과 비슷하지만 더 높은 습도로 모두의 불쾌지수를 측정 불가 수준으로 증폭시키고 있다.

푹푹 찌는 산티아고의 여름... 우리가 찾은 '천국'

해가 높아져감에 따라 '사랑의 다리'의 자물쇠들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사랑의 다리에 빼곡한 자물쇠들 해가 높아져감에 따라 '사랑의 다리'의 자물쇠들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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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분수대를 볼 때마다 머리를 처박아 열을 식히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다니를 따라 걸었다. 우리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갈 때였다. 더위를 먹은듯한 다니가 힘없이 바로 앞의 식당을 손으로 가리킨다. 위풍당당하게 걸어진 간판에는 '뿌엔테 알레마나'(Fuente Alemana)라고 적혀 있었다. 건축에 깊은 일가견은 없으나 식당의 외관은 칠레식도 일반적인 남미식도 아닌 듯했다. 상관 없었다. 안에 에어컨만 틀어져 있다면 지옥이라도 들어갈 것 같았다.

'딸랑' 하는 방울소리에 열렸던 문이 내 등뒤에서 닫힌다. 현지인들의 점심시간이 끝난 시간임에도 식당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빈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짜증을 넘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 감정이 얼굴로 드러났다 보다. 내 더러운 표정에 더럭 겁을 집어먹은 소심한 남자들 두엇이 카운터로 향한다(물론 이건 나의 추측일 뿐이다).

자리가 나자마자 우리는 잽싸게 빈 자리로 돌진했다. 서울 지하철 안의 아줌마 부대도 인정할만한 스피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니 마침 에어컨 바람이 얼굴로 바로 들어오는 명당자리였다. 차디 찬 인공바람을 얼굴에 쏘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길거리에서 시들시들 말라비틀어져 가던 우리는 마침내 이 식당에서 생기를 되찾았다.

이곳은 정식 식당이라기 보다는 가던 길에 잠깐 들러 배만 채우고 나가는 '다이너'에 가깝다. 오픈된 조리실이 식당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손님들이 그에 빙 둘러싸여 있는 구조다.

이것이 '핫도그'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몸을 앞으로 살짝 빼보니 조리실 내부가 보인다. 여기저기 살펴본 바로는 흡사 샌드위치 체인점 서브OO의 그것과 비슷했다. 몇 가지 다른 종류의 빵과 육가공품부터 시작해서 온갖 채소와 소스가 진열돼 있다. 그렇다. 이곳은 다름아닌 칠레식 핫도그, '콤플레또'(Completo) 전문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핫도그'라는 말을 썻지만 실제로 칠레에서는 콤플레또를 핫도그라 부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미국 패스트푸드와의 비교를 거부하는 칠레 사람의 자부심이 담겨있다고.

그래도 속으로는 '오바하네, 그래봤자 핫도그가 핫도그지' 하며 메뉴를 쭉 훓어봤다. 유명한 식당이라더니 메뉴도 꽤 다양했다. 소위 말하는 결정 장애가 있는 나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하루이틀 겪는 일이 아닌지라 다니는 자기의 '최애 메뉴'를 먹어보라 추천한다.

결국 그녀와 같은 메뉴인 '콤플레또 이딸리아노'를 주문했다. 이윽고 주문한 음료가 먼저 나왔고 우리는 머리가 깨질듯 찬 탄산 음료를 단숨에 절반을 비웠다. 나는 어떤 음식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입을 열었다.

"내 경험상 어떤거든 '이탈리안'이 붙으면 최소 중간은 가는 것 같아."
"이탈리안? 너 혹시... 나폴리 소스랑 파마산 들어간 그런거 생각한거 아니지?"
"아니면... 뭔데?"

다니는 말을 멈추고 깔깔깔 파안대소를 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설명을 해줘야 했다면서 말을 이었다.

'이탈리안' 없는 '이탈리안'

으깬 아보카도의 초록, 고소한 마요네즈의 하양 그리고 토마토 샐러드의 붉은 색은 이탈리아의 국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보카도는 빵 속에 있다)
▲ '콤플레또 이딸리아노' 으깬 아보카도의 초록, 고소한 마요네즈의 하양 그리고 토마토 샐러드의 붉은 색은 이탈리아의 국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보카도는 빵 속에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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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탈리아 국기색 기억나?"
"순서는 모르겠는데 빨간색, 초록색 그리고 흰색이었나."
"아, 이제 콤플레또 나왔다. 자, 봐봐. 왜 이게 '이탈리안' 없이도 '이탈리안'인지."

길쭉하고 큼지막한 빵 안은 으깬 아보카도(혹은 과카몰리 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 윤기 좔좔 흐르는 통통한 소시지가 수줍게 누워있다. 그가 외로울까봐 그 근처로 잘게 썰어진 토마토 또한 흝뿌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마요네즈가 곡선을 그리며 마무리한다.

꾸덕하게 발린 아보카도, 대미를 장식한 마요네즈 그리고 요염하게 흐트러진 토마토는 완벽하게 이탈리아 국기색과 일치했다.

사설은 여기까지하고, 백문이불여일견.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갓 구운 듯 소리마저 다른 바삭한 빵, 신선한 재료들과 씹을 때마다 속에서 알알이 터지는 소시지가 한데 어우러져 한동안 입안을 꽉 채웠다.

다 씹어 소화시키느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하지만 자꾸 터저나오는 '음~' 하는 탄성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맞았다. 이건 핫도그 같은 보통 길거리 음식이 아니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하나를 순식간에 다 해치웠다. 아쉬운 마음에 접시에 뚝뚝 떨어진 마요네즈만 손가락으로 스윽 묻혀 입으로 가져갔다. 이 식당 내에서 직접 만든 홈메이드라는 이 마요네즈는 콤플레토의 맛을 완성하는 고소함의 끝판왕이다.

'쩝쩝' 입맛을 다시다 내 눈길이 다시 메뉴판으로 향했다. 남기면 싸갈 생각으로 더 주문할 생각에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다니는 그런 날 보더니 곧 저녁도 먹어야 한다며 나를 말렸다. 차라리 자기 것을 한 입을 먹으라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속에 땡볕을 걸어다닌 건 그녀도 마찬가지. 결국 꾹 참고 다니를 기다렸다.

그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니 문득 혼자온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차렸다. 모두들 비슷비슷한 콤플레또를 손에 쥐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듯 만족스러운 표정들이다.

"이건 사회주의의 잔재 같아..."

사진처럼 예쁘게 먹으려다 보면 오히려 더 입가에 묻고 내용물을 흘리기 일쑤다. 현지인들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상을 '더럽게' 쓰면서 먹는다.
▲ '인상을 더 팍!' 사진처럼 예쁘게 먹으려다 보면 오히려 더 입가에 묻고 내용물을 흘리기 일쑤다. 현지인들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상을 '더럽게' 쓰면서 먹는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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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놓고 그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한가지 공통점을 더 발견했다. 그건 한 입씩 베어물 때마다 표정 관리가 힘들다는 점이다. 보통 사이즈를 시켜도 입을 최대치로 벌려야 했다. 마치 치과에서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입 여기저기에 마요네즈가 덕지덕지 묻는 참사를 피할 수 없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 소스를 입가에 범벅해 가며 먹는 우리의 모습과 사뭇 비슷하다. 유일한 동양인 손님인 내가 눈에 띄였던지 조리사 아저씨 한 분이 내게 서툰 영어로 말을 건넨다.

"맛있지?"
"아, 네. 정말 맛있어요."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말야..."
"?"
"혹시 칠레가 전에 사회주의 국가였다는거 알아?"
"그 아옌데랑... 피노체트랑... 들어는 봤는데 잘은 모르겠고..."

그는 버벅거리는 내게 괜찮다는 뜻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리고 주문 들어온 콤플레또를 만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내 생각에는 이 콤플레또가 아무래도 사회주의의 잔재인거 같아."
"어, 왜요??"
"이 나라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콤플레또를 먹어. 질과 가격에 차이는 있겠지만 맛에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 그리고 이건 다 아는 비밀인데... 맛있게 먹으려면 누구나 인상을 더럽게 써야 해."

"좀 크긴 한 것 같아요."
"그래, 먹고 힘을 내야되니 그렇지. 여튼 내 말의 요지는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모두가 이 칠레식 핫도그 앞에서는 평등하다는거지. 모두가 먹을땐 인상을 팍! 쓰고 먹고 나서는 남은 하루 힘을 내서 일하는 거지."(그는 '핫도그'라고 말할 때는 거의 속삭였다.)

죽비로 머리를 세게 딱 맞은 느낌이었다. 겉모습은 '이탈리안'인데 이런 속뜻이 숨어있을 줄이야... 아저씨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순간 열심히 '콤플레또 먹기'에 집중하는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다 종교 의식을 치르듯 엄숙해 보인다.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아저씨께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독일식 소세지를 사용한다고 해서 식당을 다시 보니, 독일식 건물이다. 바깥의 날씨는 변한게 없었지만 콤플레또를 하나를 해치운 우리는 다시 에너지 덩어리가 돼 있다. 다시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지만 나는 뭔가 전과는 달라진 느낌이다.

2017년 말, 산티아고 최고 콤플레또 집에서.


태그:#여행, #남미, #칠레, #미식여행, #콤플레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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