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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 남미 상사병을 오랜 세월 앓던 기자,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 대륙에 두 발로 딛고 선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 번째 행선지는 남아메리카의 허리 격인 칠레의 산티아고. 현지인 친구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초대도 염치없이 넙죽 받았겠다, 적어도 여행 초반은 순탄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크리스마스 연휴기간 동안의 범죄 발생률 증가로 시내 관광을 미루게 된다. 그래도 어느새 시간은 갔고 나를 '자유롭게 할' 그날, 크리스마스가 다음날로 성큼 다가왔다.

"우리집은 부모님이 시골에서 말농장을 운영하셔. 그래서 어릴적에 한번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포니를 받은 적도 있어. 밖에서 두 손이 꽁꽁 얼도록 놀다 온 날이었지. 집에 돌아와보니 세상에, 그 작은 아기말이 트리 밑에서 웅크리고 있더라구!"
- 독일인 친구 J양

"크리시?(크리스마스의 속어) 매년 가족이랑 해변가에서 바베큐를 많이 해먹어. 너 여기 연말 여름 날씨 알지? 오 마이 갓, 그렇게 후덥지근한데도 다들 기분을 낸다고 고집스럽게 털달린 산타 모자를 쓰곤한다니까."
- 호주인 친구 D군

"그때는 남자친구가 있었을 때였어. 그래서 눈을 맞으면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 아냐."
- 일본인 친구 A양

이렇듯 모든 이들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은 다 제각각이다. 이날이 출신 국가에서는 민족의 대명절급이라던가, 가족이 종교적이라거나 아니면 애인 유무에 따라 등등 비슷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있어도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운이 참 좋은 편이다. 지난 몇 년간의 크리스마스 시즌과 연말을 무려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골고루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재작년 이맘때는 스페인 마요르카섬에 머물렀다. 카우치 서핑으로 만났던 현지인 가족과 함께 지역 특산물을 먹고 마시느라 배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달팽이를 처음 먹어본 곳도 이곳이다(아이올리 소스와 함께 먹는 이곳 전통음식 중 하나이다. 프랑스와는 조리 방법이 조금 다르다).

작년 이때는 호주 멜버른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고학중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하던 호텔의 레스토랑에 부탁해 하루종일 일했던 기억이 난다. 남들 쉴 때 못 쉬어서 안됐다면 뭘 모르시는 말씀이다.

그날 나는 일요일이자 공휴일에 일한 대가로 시급 5만원을 받았으며 테이블마다 후하게 나오는 팁도 짭짤했다(당시 받았던 시급은 법적으로 '딱 그날 하루'만의 최저시급이었다). 그리고 끝에 뷔페를 정리하면서 챙긴 음식들로 일주일은 따뜻하게 지냈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가톨릭 칠레인의 심앙심이 얼마나 깊은지 잘보여준다.
▲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가톨릭 칠레인의 심앙심이 얼마나 깊은지 잘보여준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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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향집에서부터 지구 반바퀴를 돌아온 올해는 어떨까? 칠레는 기본적으로 인구 대부분이 신실한 가톨릭교도다. 이는 알려진 바대로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화와 초기 유럽계 이민자들의 영향이 막대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하면 굉장히 '종교적'이고 '가족적'인 색채가 강하다.

실제로도 내가 본 칠레 사람들은 가족애가 정말 남달랐다. 같은 서반구에 위치해 있다고 다같은 서양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럽이나 북미같은 다른 대륙들의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그것과도 참 다르구나 싶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는 보내는 '스타일'도 꽤 차이가 난다.

심지어 우리 시대에 사라져가는 끈끈한 가족애나 이웃간의 '정(情)'을 이곳 현지에서 다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한국의 요즘 아이들은 그 '정'을 초코파이 이름으로만 안다는 웃지못할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이런 우리도 실은 멀지 않는 과거에 칠레와 다르지 않았다.

명절이면 누구 하나 빠짐없이 다 모였고 어쩌다 부침개를 하나 하더라도 아이의 고사리손에 몇 장 들려 이웃집으로 보내곤 했다. 살림살이가 지금보다 더 빠듯했지만 얼마 안 되는 가진 것들을 나누는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넉넉했던 시절이었다.

오늘날은 건국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할 때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은 가뭄이 든 땅처럼 건조하기만 하다. 가족을 최우선시 하던 시절은 옛날에 갔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이제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정말 수학공식처럼 경제 성장이 마음의 넉넉함과 반비례 하는 걸까? 이게 만약에 맞다면 칠레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난 뒤에 바뀌는 걸까? 만약 그 대답이 "예스"라면 다니의 노할머니댁으로 향하는 지금의 나는 '한때 오랫동안 스윗했던' 가족사의 증인이 되는 걸까? 먼 훗날 다니가 가족을 이뤄 생긴 아이가 나로부터 10년, 20년 전의 크리스마스가 어땠는지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차가 멈췄다. 이런 저런 질문들로 나름 심각하게 '멍을 때리고' 있는데 어느새 도착한 듯하다. 올해(2017, 칠레에 머물던 당시) 크리스마스는 '150명 밖에' 안 모였다는 다니네 대가족과 보내게 되었다.

땅거미는 진즉 졌고 운동장만한 마당과 저택 안에서 웃음소리와 전통 음악이 뒤섞여 새어나왔다. 우리는 두손 무겁게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음 편에 계속)


태그:#여행, #남미, #칠레, #크리스마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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