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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고 유치준씨의 아들인 유성국(59)씨가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에서 진장조사의 부당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고 유치준씨의 아들인 유성국(59)씨가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에서 진장조사의 부당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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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접수를) 신청했다가 철회했다. 그런데 부친을 언급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보고서 초안에 담긴 아버지 관련 내용은 전부 삭제해 달라. 과거 때 묻은 손에 아버지 죽음의 판단을 맡긴다는 게 수치스럽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판단은 다음으로 미루어 달라. 그래야 피투성이로 사망한 아버지의 명예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한 부마민주항쟁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된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하며 1979년 10월 16~20일 사이 부산·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고(故) 유치준(1928~1979, 당시 51세)씨의 아들인 유성국(59)씨가 읍소하듯 강조했다.

유씨는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에 참석해 마지막에 발언했다. 이날 보고회는 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조사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아래 위원회)가 마련했다.

위원회는 박근혜정부 때인 2014년 10월에 출범했다. 오는 4월 활동 마감을 앞두고 보고서 채택을 위해, 이날 관련 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보고회를 연 것이다.

이날 보고회에서 제일 관심을 끈 내용 가운데 하나가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설'이다. 위원회는 유치준씨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당시 유치준 사건은 절차에 따라 처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족의 주장대로 경찰 진압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진술이나 객관적 자료가 없었으므로, 유치준을 부마항쟁 사망자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고 유치준씨의 아들인 유성국(59)씨가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에서 진장조사의 부당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자로 알려진 고 유치준씨의 아들인 유성국(59)씨가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에서 진장조사의 부당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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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려자? 박정희 죽자 유족 나온 게 말이 되냐"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서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있었다는 말은 나왔지만, 신원이 처음으로 알려진 때는 2011년 9월이었다. 유족들이 호적등본 등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고,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마산)도 이를 인정했다.

유족에 의하면, 유치준은 그 해 10월 18일 퇴근 후 시위로 인해 버스를 탈 수 없자 걸어서 귀가하던 중 경찰이 시위대로 오인해 폭행을 하고, '후두부함몰'로 사망했다. 또 유족들은 당시 검찰과 경찰은 유치준을 '행려자'로 해서 유족의 동의도 없이 부검해 가매장했고, 10·26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11월)에 사망 사실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아들 유성국씨는 위원회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보고서 주장대로라면, 유족이란 존재는 아예 없어야 하고, 행려자이기에 시신 인수 후 산소도 없어야 하며, 사망자의 제적등본에 기록된 일시와 장소, 시간도 인정 못하게 되는 것"이라 했다.

또 그는 "위원회는 '외부충격 없이' 지주막하출혈이라 했는데, 아버지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는 폭력의 흔적이 나타났다. 그런데도 외부충격이 없었다는 것은 모순에 빠진 것"이라 했다.

그는 "후두부골절 되었다는 것은 두부에 강한 충격 때문에 두개골이 골절, 파열되었다는 것"이라 했다.

유씨는 "검찰의 검시보고서에 '행려자'라는 부분이 있다. 앞서 경찰은 처음에 '노동자풍의 50대'라 했는데, 행려자 표현은 검찰이 제일 먼저 했다"며 "행려자는 쉽게 말해 '거지'다. 아버지는 어떻게 행려자이냐. 행려자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용어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유성국씨는 "행려자고 (가)매장했으면 그대로 끝난 상황인데, 10여 일 후 유가족에게 통보하고 시신을 인수했다. 행려자라며 없던 유가족이 어떻게 생겼느냐. 아버지는 화장해서 무학산 자락에 묘소로 잠들어 계신다"며 "위원회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따졌다.

유성국씨는 위원회가 전국에 걸쳐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접수를 받았을 때 신청했다가 철회했다.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진 위원회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혈세를 들여 유족에 죄 짓는 것"

이날 보고회에서 발제자들도 유치준에 대해 언급했다. 차성환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유족이 신청했다가 철회한 것이니까, 가부 판단을 유보하는 게 맞다. 그런데 위원회가 '사망자가 없었다'고 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정성기 경남대 교수는 "위원회는 단 한 사람도 사망자가 없다고 했는데, 계속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89년 부마민주항쟁 10주년 사업할 때, 남부희 위원(당시 신문기자)이 제공한 자료가 있다"며 "누구나 보면 10분 단위로 시위 상황이 기록되어 있고, 그 자료에 보면 '노동자풍의 50대'가 사망했다고 나와 있었다"고 했다.

그는 "10주년 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있었다는 말은 있었지만, 신원을 몰랐다. 그러다가 2011년 유족이 사망자의 호적등본 등 자료를 제시했는데, 우리가 볼 때는 100% 일치했다"며 "그런데 위원회는 사망자가 부마항쟁과 관련이 없다고 했다"고 했다.

정 교수는 "보고서는 법에 따라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망자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국가폭력을 하는 것이다. 이런 보고서는 혈세를 들여 국민주권에 도전하는 것이고, 유족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라 했다.

위원회 이도선 실무위원은 "유치준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토론도 많이 했다. 유족 주장 말고는 입증될 게 없었다. '후두부함몰'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담당부검의가 관련 단체와 인터뷰 할 때 '기억이 안 난다'고 해놓았다"고 지적했다.

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를 열었다.
 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23일 오후 부산광역시의회 대회의실에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회"를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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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부마민주항쟁, #유치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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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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