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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8일 전국철도노동조합(위원장 강철)과 철도공사(사장 오영식)는 짧게는 4년, 길게는 14년까지 해고 상태에 있던 98명의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다. 6개월째 공석이었던 철도공사 신임사장인 오영식 사장이 2월 6일 취임한 이후 이틀 만에 노사간의 전격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 소속 해고자 11명 중 순천지역 해고자는 7명이다. 순천지역에서 지역의 제 단체들과 다양한 연대활동을 함께 해 온 철도노조 해고자들의 복직 소식에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울렸다.

2009년 철도노조 호남본부장으로 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을 이끌었다가 해고당한 조종철씨를 그와 철도해고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에서 만났다. 그는 해고 기간에도 철도문화마을만들기 활동에 주력하며 호남철도협동조합 사무국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 본부장으로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으로 해고된 조종철씨
 2009년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 본부장으로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으로 해고된 조종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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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신입사원이 던진 파문

조종철씨는 순천 원도심에 위치한 금곡동 토박이로 1995년도에 철도공사(당시, 철도청) 광주전기사무소에 입사했다. 첫 근무지는 화순역이라 순천에서 1년 6개월여를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며 출퇴근했다. 당시 철도노조는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이었고 민주노조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철도공사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몇 손가락 안에 꼽는 공기업이지만, 입사 후 몇 년 동안은 불안감과 억압적인 직장 문화 때문에 힘들었다고 조종철씨는 회상한다.

"그 당시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평생 이런 근무 형태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건 몇 개월 지나니깐 익숙해졌는데, 직장 내 조직문화가 너무 힘들었다."

"출퇴근을 관리자 눈치보고 하는거다. 9시간 출근인데 8시 10분 출근해서 20분부터  일을 하고 있고, 9시 퇴근인데 10시가 되어도 퇴근을 못했다. 윗사람들이 퇴근해라 하면 퇴근을 하고, 쉬는 날도 관리자가 일하러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조종철씨는 9시 맞춰서 출근하고 선배들이 눈치보고 있어도, 9시 10분 되면 퇴근을 했다고 한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하는 것을 넘어서, 알아서 잘 보여야 승진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직문화에 작은 파열구를 내는 일이 있었다. 입사한 지 6개월째인 1995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첫 연휴를 아내와 지내고 있는데 직장 상사에게서 다음날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틀 연휴이니 당연히 출근하지 못한다고 하자, 직장 상사는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조종철씨는 곧바로 전화를 해서 '사정을 해도 부족할 마당에 왜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면서 화를 내냐?'며 따졌다.

연휴 끝나고 출근했더니 선후배들이 하얀 눈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해 끝날 공사가 미뤄지자 철도청 직원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런 업무 지시를 거부한 것이 바로 6개월 신규직원인 조종철씨였다.

"당시에 눈치를 많이 받았지만 그 후론 제게 부당한 업무지시를 하지 않아 편해졌다. '조종철은 저런 놈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용간부와 관리자가 현장을 통제하던 시절을 넘어"

1995년 당시 철도노조는 지금처럼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위원장을 뽑는 게 아니라, 3중 간선제라는 제도하에서 위원장 선거를 치뤘다. '3중 간선제'는 세 번 간접선거를 거쳐서 철도노조의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이다.(각 지역 지부 조합원들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이 각 지역본부 대의원을 뽑고, 그 대의원들이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을 뽑아서, 그 대의원들이 위원장을 선출한다.) 조합원수가 3만 명이 넘었지만 정작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은 그 당시 93명에 불과했다. 당시 철도노조는 민주노조라 불리울 수가 없는 대표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2000년 1월 대법원은 '철도노조 3중 간선제 위헌 판결'을 내리게 되고, 2001년 5월 처음으로 조합원의 손으로 위원장 직접선거를 하게 되면서 철도노조는 민주노조의 깃발을 새롭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조종철씨는 자연스레 함께 하게 되었다.

"경직된 조직문화, 인사문제 등에서 많은 직원들이 민주노조를 세워야 겠다는 열망이 컸다. 당시 한국노총 산하 철도노조 간부들은 승진, 발령 등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노조 간부들에게 잘 보이면 관리자들에게 말이 들어가게 되고, 관리자들은 노조 간부을 통해서 현장을 통제했다."

"관리자들이 노조 간부 후보를 내고 조합원에게 투표를 하게 했다. 분산 사업장의 경우 사업소별로 10명 정도 근무하는데, 투표용지 상단에 손으로 자국을 남겨놓아서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관리자의 요구대로 투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철도노조는 2009년 KTX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장인 조종철씨는 이때 투쟁으로 해고되었다.
 철도노조는 2009년 KTX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장인 조종철씨는 이때 투쟁으로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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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명의 해고자와 함께 한 철도노동자"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기 만났던 동료들은 현장을 민주적으로 바꾸고 싶은 조종철씨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94년 파업으로 해고되었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고 직종도 다른 전남으로 강제 전출당한 박길원씨(현재 역무원, 당시 전기사무소로 강제 전출) 등 호남지역철도민주노조추진위원회(이하, 호남철민추)에서 만났던 동료들이 그들이다.

2001년 직선제 선거로 전국의 5개 지방본부(서울, 부산, 대전, 영주, 순천) 중 대다수 지방본부에서 민주적인 집행부가 들어섰지만, 순천지방본부(현 호남지역본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7년이 되어서야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직선제로 바뀌었다고 현장이 민주화된 것은 아니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선관위의 방해로 등록 서류를 안주거나 서류 미비로 탈락하기도 하고, 후보 등록을 하려고 하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내기도 했다. 순천 덕양역에 근무할 때 지부장 선거에 나가려고 했더니 전북 군산으로 발령을 내려고 했다. 당시 분소장이 말도 안되는 인사라고 사업소장에게 항의하고, 결국 분소장이 목포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 분에겐 참 감사하고 미안하다."


철도노조는 2001년 민주노조로 선 이후 우리나라 대기업 공기업 사업장으로써는 가장 많은 파업투쟁을 전개한 노동조합이다. 2002년, 2003년, 2006년, 2007년, 2013년, 2016년 파업 등으로 많게는 200여명의 해고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해고자들의 기본적인 생계는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책임져왔다.

몇 번의 조합비 인상이 있었고, 해고자가 줄어들면 조합비를 인하했다. 해고가 예상되는 싸움을 벌이는 노동조합과 간부들, 해고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조합비 인상을 기꺼이 감내하는 조합원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로 바꾼 기나긴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조합과 간부들에 대한 신뢰가 쌓인거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조가 들어서고 나서 노무현 정권 이후부터 박근혜정권까지 국민철도를 지키기 위해 정권과 맞서 싸워온게 철도노조다. 조합비 인상에 대해 어려움도 있지만, 헌신적인 철도노조 간부에 대한 신뢰와 해고자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2017년 12월 철도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투쟁중인 철도해고자들
 2017년 12월 철도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투쟁중인 철도해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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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동자의 투쟁으로 일궈낸 해고자 복직"

혹자들은 정권이 바뀌고 전대협 2기 위원장 출신인 오영식 사장이 철도공사 사장으로 부임하니 해고자 전원복직이 된거라는 이야기도 한다. 조종철씨도 정권이 바뀌니 가능했던 일이고, 청와대의 동의 없이는 힘든 과제였다고 이야기하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이명박 박근혜 시기에도 철도노조 투쟁으로 해고자 복직에 대한 논의를 했고, 정권은 계속 논의하겠다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정권의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에도 퇴직을 앞둔 2명의 해고자가 복직했다. 철도공사에서 모양새를 갖춘 복직이었던거다. 더 중요한 것은 해고자 복직에 대한 철도노조의 기나긴 투쟁 속에서 이번 98명 복직이 이뤄진 것이다. 투쟁이 없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정부과 철도노조가 머리를 맞대고 한국철도의 미래를 이야기해야"

2월 8일 철도공사와 철도노조와의 합의에서 해고 자복직 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내용이 있다. '철도발전위원회(가칭)' 구성이다. 조종철씨는 이에 대해 그동안 철도노조가 꾸준히 주장했던 철도산업의 공공성, 공공철도 정책에 대해 정부가 귀를 기울려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이야기했다.

"철도노조의 수많은 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철도산업은 3년 전에 자회사(SR)가 만들어지고, KTX 이후 시설공단으로 분리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자회사 통합, 시설공단과 통합, 외주용역화 철회 등을 정부에서도 논의하고 있다. 한국철도산업발전을 위해 통일철도가 이어지고 유럽철도로 나가야 한다는 내용을 국토부, 청와대까지도 논의하고 있다. 정부와 노조가 머리 맞대어 한국철도의 미래를 이야기했으면 한다."


철도노조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외주용역철회, 공공철도 강화를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철도노조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외주용역철회, 공공철도 강화를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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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근무지가 노조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바뀌는거야?"

해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해고 상태로 퇴직하는건가?' 하는 생각들이 눈덩이처럼 굴러가던 시기에 마주한 해고자복직 소식에 가족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궁금했다. 조종철씨는 해고된 이후 아이들에게 아빠가 해고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다수 해고자들이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기 때문에 근무지가 현장에서 노동조합으로 바뀐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첫째는 올해 대학에 입학하고 둘째는 고2가 된다.

"딸 아이 초등학교 친구 아빠가 복직됐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아빠, 이제부터 노동조합 안 하고 현장 가서 일해?' 라고 이야기 하길래 그냥 웃었다."


복직 소식에 기쁨도 잠시 조종철씨는 머리가 조금은 복잡하다. 8년만에 현장으로 돌아가는 기대감도 크지만, 그동안 후배들의 성장과 근무 환경의 변화 등을 생각하니 다시 신규자 같은 마음을 가지자고 다짐한다.

"복직하면 철도마을 만들기는 어떡하지?"

조종철씨는 2013년 호남철도협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철도문화마을만들기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주민과 함게 하는 공감문화제 및 철도마을주민 구술생애사 출판기념회 현장
 조종철씨는 2013년 호남철도협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철도문화마을만들기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주민과 함게 하는 공감문화제 및 철도마을주민 구술생애사 출판기념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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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그의 복직을 축하할 때 걱정이 태산인 사람들이 있다. 철도관사마을 주민들과 철도문화마을만들기 사업을 함께 했던 공무원들을 비롯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그는 2013년 2월 호남철도협동조합을 만들어, 백여년 철도역사의 근대자원인 순천 조국동 철도관사마을을 중심으로 철도문화마을만들기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2009년 해고되고 나서 노동조합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공공철도와 지역의 만남, 지역민의 지지를 받는 공공철도, 조합원들에게는 투쟁 일변도의 노조의 모습에 대한 문제제기 등을 받으면서 협동조합을 통해서 조합원들에 후생복지, 문화, 철도와 지역을 연결해주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겠다는 고민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철도관사마을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통해 주민들과 함께 철도역사자원을 마을공동체로 연결해 보자는 고민도 있었다."


지난 5년여동안 철도관사마을에서는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마을주민구술생애사 책자 발간,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 월 1회 마을 작은 음악회, 철도마을축제, 마을달빛마실, 철도게스트하우스, 철도마을방송국, 철도마을 박물관과 다양한 체험프로그램 등 철도노조와 철도협동조합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만나 그들만의 색깔로 철도마을만들기 활동이 전개됐다.

2014년 1월 오픈한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 철도노조 건물 한켠을 노동조합이 내어주고 철도조합원들이 출자하여, 마을 주민들을 위한 마을카페가 만들어졌다.
 2014년 1월 오픈한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 철도노조 건물 한켠을 노동조합이 내어주고 철도조합원들이 출자하여, 마을 주민들을 위한 마을카페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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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 자리잡은 순천마을방송국
 2017년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 자리잡은 순천마을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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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공동체가 어떻게 바뀌어 갈지

이런 활동에 조종철씨가 중심에 있었던지라 그의 복직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철도관사마을은 어떡하냐는 우려도 많다. 그동안의 그의 활동의 발자취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보게 된다.

"그동안 주민들에게 이사와,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철도마을만들기 사업은 하나의 작은 실험대 같다. 학생운동, 진보정당운동, 노조운동을 하면서 당연히 좋은 사회를 꿈꾸기도 했다. 철도관사마을이라는 작은 마을만들기 속에서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바뀌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을 하고 있다. 직책에 대한 욕심 부리지 않고, 주민들을 만나고 서로 신뢰의 관계를 쌓아가면서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철도관사마을의 변화 속에 마을 사람들과 철도노조의 관계가 친밀해졌다. 마을사람들도 철도관사마을에 대한 자부심도 늘었다. 예전에는 경로당 중심, 직능단체 중심으로 모였다면, 지금은 다양한 형태로 만나면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많이 나오고 있는 거 같다. 작은음악회로 카페로 축제로... 여전히 다양하게 마을을 만나고 있고. 그 공동체에 들어있다는게 나에게는 큰 의미인 것 같다"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에서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 매월 셋째주(또는 넷째주) 금요일 저녁 시간에 작은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에서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 매월 셋째주(또는 넷째주) 금요일 저녁 시간에 작은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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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마을에 예전처럼 푹 빠질거에요!"

복직 축하선물로 철도관사마을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센터장으로부터 케익 선물을 받았다는 조종철씨는 '내가 5년동안 그냥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9년 해고생활을 정리하고 현장에 복직해서는 신규자처럼 일하면서 여전히 마을 사업을 계속 할 예정이다.
조종철씨는 요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싶어서 배우고 있는 베이스기타에 푹 빠졌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더 겸손하게 소리내지 않고, 철도마을만들기에도 푹 빠질 것이고, 지역에 공공철도를 알리는 길에도 푹 빠질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세상, 행복한 공동체를 향한 철로 위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부지런하다.

순천시 조곡동에 위치한 철도노조 호남본부 건물. 1층 왼편은 노동조합 사무실, 오른편은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이다. 2층은 회의실로 노동조합 행사 뿐만 아니라, 마을행사 및 회의, 어버이날 행사, 시민사회단체 교육실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과 마을이 공동체로 만나는 공간이다.
 순천시 조곡동에 위치한 철도노조 호남본부 건물. 1층 왼편은 노동조합 사무실, 오른편은 철도마을카페 기적소리이다. 2층은 회의실로 노동조합 행사 뿐만 아니라, 마을행사 및 회의, 어버이날 행사, 시민사회단체 교육실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과 마을이 공동체로 만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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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순천광장신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조곡동 철도문화마을, #철도해고자 복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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