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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2013년 11월, 일본으로의 출국을 하루 앞두고 확인해야 할 서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의 신원, 그리고 피해자 오재선이 친북성향 단체인 조총련 활동을 했는지 올바르게 증언해줄 사람들의 주소와 연락처 등을 살펴보고 있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저 오재선입니다."

어눌한 말투의 오재선씨가 대답했다.

"네, 어디 계세요? 일본에 잘 도착하셨어요?"

나보다 하루 먼저 일본에 들어가 있겠다며 일찍 출발한 오재선씨의 전화가 반가웠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오재선씨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아, 그게 저...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입국 거부되어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입국거부? 강제추방?

"아니 왜요? 왜 추방이 돼요?"

나의 질문에 오재선씨의 난처한 답변이 들려왔다.

"저 지금 인천공항인데 혹시 와 주실 수 있습니까?"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정리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곧 가겠다고 말하고 곧 짐을 챙겨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내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추방되었을까? 혹시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되어서? 아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 문제가 되어 강제 추방되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다른 많은 강제 송환자들처럼 과거 일본에서의 강제 송환 경력이? 그것도 지금에 와서 문제될 리는 없다. 밀입국 사항으로 강제 송환된다면 5년 후면 재입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 뭣 때문에 입국이 거부된 것일까? 온갖 잡스러운 상상을 하며 인천공항을 향했다.

아니 왜요? 왜 추방이 돼요?

 식사하는 오재선. 양로원에서 지내는 동안 왼손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
 식사하는 오재선. 양로원에서 지내는 동안 왼손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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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입국층 로비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었을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다시 돌아오셨어요?"

다그치듯 묻는 내 얼굴을 그는 제대로 응시하지 못했다.

"그게 저, 우리 밥이라도 좀 먹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어제 저녁부터 뭘 먹지 못했더니 배가 고파서."

이런! 식사도 못했다니... 갑자기 일본출입국관리소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요. 뭐 드실래요?"
"어디 간단하게 우동 같은 것이면 좋겠는데요."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어렵게 꺼냈다.

"밥을 드셔야하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못 드셨는데 밀가루 음식을 드시면 속이 불편하실 텐데요."

나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우동으로 합시다. 우동이 좋아요."

더 묻지 않고 공항 내 우동 집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가 한식당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따라 들어와 앉은 그는,

"여긴 우동 집이 아닌데?"

하고 일어서려 했다. 나는 일어서려는 그의 팔을 잡고 밥을 먹자고 했다. 그리고 불고기 백반이 눈에 들어와 너무 달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저기... 사실은 내가 제주도에 갈 차비 밖에 없어요. 그래서 비싼 밥값을 낼 형편이 못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예상은 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면 돈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고 식사만 했다. 그는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그리고 밥이 줄어드는 만큼 그의 긴장감도 줄어들었다.

식당 주방장에서 야쿠자로

 일본에서 입국거부되어 추방된뒤 인천공항에서 만난 오재선
 일본에서 입국거부되어 추방된뒤 인천공항에서 만난 오재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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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56년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살고있는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는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방공장에서 일하길 원했다. 어렵사리 대한민국 민단(대한민국을 지지하며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 조직)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아버지는 학비를 대주지 않았다.

결국 학비 문제로 학교를 자퇴하고 아버지 뜻대로 가방공장에 입사했다. 그에게 가방공장 일이 즐거울 리 없었다.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일본 학교는 차별이 심하니 다니기가 어려워 한국거류민단이 운영하는 한국 학원에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부친이 학비를 안 대주니 학교를 다닐 수가 없는 거예요."

가방공장을 다니던 그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들은 양가 가족의 여러 가지 차별과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했다. 불안한 출발이었기에 그는 더욱 인정받고 싶었다.

"1970년도에 처가가 가까운 사이타마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불고기 집에 취업해 주방장으로 일했습니다. 일본식 불고기 집이었는데 제가 나름 양념을 개발해 특제소스를 만들었어요. 조선간장에 일본간장을 적당히 섞어서 너무 짜지도, 그렇다고 달지도 않게 하고, 특히 뒷맛이 텁텁하지 않도록 배나 양파, 우메보시 양념을 적당히 섞었어요. 그 소스맛 때문인지 불고기 집에 손님이 끊이질 않았었죠."

그런데 그렇게 장사가 잘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입소문이 나고 손님이 많이 늘었죠. 그런데 단골손님들 중 야마구치파 야쿠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자주 찾아와서 요리를 먹곤 했는데 그들과 친해지게 되었죠. 무척 가까워진 뒤에 그들과 함께 제주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제주 출신이니 안내도 할 겸 함께 가자는 제안을 수락하고 제주를 다녀왔죠."

단순 관광인 줄 알았던 그 여행은 사실 야쿠자들이 한국에 마약을 판매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마약을 거래했고, 관광인 줄 알고 따라갔던 오재선은 일본에 돌아와서 항의하며 다투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자신들과 함께 야쿠자 조직에서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식당 조리사로서 일하면서는 절대 만져볼 수 없는 거액의 금액을 제안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하다 그 제안을 수락했다. 돈을 벌어 처가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사이타마의 야쿠자가 되었다. 상가와 파친코 업장을 관리했다.

그런데 자신이 속했던 야마구치 파에서 각성제를 취급한 것이 경찰에 적발되었다. 그가 모든 혐의를 뒤집어 쓰면 가족의 뒤를 보살펴 준다는 조직의 말을 믿고 그는 감옥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각성제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일로 그는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그 말을 믿고 들어간 내가 미친놈이지요. 징역을 살고 나오니 몸도 마음도 망가졌어요. 몸을 추스르고 야쿠자와도 손을 끊을 생각에 동경으로 도망쳐와 친척이 소개해준 병원에 몇 달간 입원해 있었어요. 소개해준 친척이 치료비도 내주었기 때문에 저는 고마운 마음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었어요. 치료 받는 동안 그곳에서 마음 좋은 간호사도 만났어요. 퇴원해서는 간호사와 함께 지내며 행복하게 지냈지요. 그러다가 출입국관리국에 검거되어 강제송환되었죠."

야쿠자에서 간첩으로

그렇게 강제송환되어 1982년 3월경 제주에 돌아온 그는 지인의 주선으로 평화목장에서 마부로 일하며 지냈다. 산간에서 말을 돌보며 몸도 조금씩 좋아졌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5년 6월경 제주경찰서 대공과 수사관들에게 영장도 없이 연행된 것이다.

"제가 동경에서 입원했던 동일병원의 원장이 조총련 회원이었다나 봐요. 그래서 그곳에 조총련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하나보더라고요. 제가 어찌 알겠어요. 병원장이 조총련인지 간첩인지 제가 어찌 알고 입원했겠습니까? 그런데 경찰에서는 제가 지령을 받을 목적으로 그 병원에 입원했다는 거죠."


야쿠자 활동을 했던 그는 재일교포 사회를 전혀 알지 못했다. 더욱이 조총련과 민단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수사관들로부터 더욱 모진 고문을 당했다.

"조총련이 뭔지, 지령이 뭔지, 간첩이 뭔지도 모르니까 수사관들이 지령사항을 말해라, 국가기밀을 탐지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데 하나도 알아듣질 못해요. 그래서 더 맞았죠."

그가 기억하는 고문은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몽둥이로 엉덩이와 어깨 등을 사정없이 맞았어요. 겁에 질려 소변이 급하다고 했더니 수사관 한 명이 옷에 그냥 싸라고 윽박 질렀어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다른 수사관이 갈아입힐 옷이 없다며 저를 화장실로 데려갔죠. 용변을 보는 동안 문을 열어 놓고 감시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 동안 받은 고문 수사 끝에 그는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7년을 복역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던 내가 입을 뗐다.

"그럼 이번에 일본에서 입국 거부되어 다시 돌아온 이유가 각성제 위반 사실 때문인가요?"
"예,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각성제법을 위반한 사람은 영구적으로 입국이 거부된답니다."

허탈했다. 왜 나에게 숨겼을까?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진작 그런 말을 안 해주셨어요? 그럼 출입국이 가능한지 미리 알아볼 수 있었잖아요."

그는 나에게 자신의 과거 일부를 숨겼다.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신감에 더 화가 났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다. 앞으로의 일을 수습해야 했다.

"일본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이 함께 가지 않으면 제가 누구인줄 알고 만나 주겠어요?"

그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와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란 과거 수사기록에 기재된 내용 중 그에게 지령을 전달했다는 재일교포의 주소밖에 없었다. 그 주소 하나를 가지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달리 선택도 없었다.

가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에게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주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공항을 떠났다.

나홀로 일본행

다음 날 제주로 떠난 그를 뒤로 하고 나는 홀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일본 동경에 도착한 나는 수사기록에 기재된 재일교포 친척을 찾아갔다. 집 입구에서 기웃기웃 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일본 말로 말을 걸었다.

당황한 나는 무심코 뒤돌아서며 엉겹결에 '죄송합니다'라는 한국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6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뜻밖에 한국어 답변이 돌아왔다.

"누구십니까?"

돌아온 대답이 한국어로 들리는 순간 고민하던 문제의 정답을 찾아낸 것 마냥 너무 기뻤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곳에 온 이유를 듣고는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1층은 공장이고 필로티 구조로 된 2층에 가정집이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따라준 우롱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일본 동경 아라가와구에 소재한 오재선 사촌 운영의 가방공장.
 일본 동경 아라가와구에 소재한 오재선 사촌 운영의 가방공장.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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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28년(1953년)에 일본에 밀항으로 와 살기 시작한 그는 현재의 아라가와구(荒川區)에 계속 거주해 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큰 형은 4.3 때 희생을 당해 가족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오재선이 일본으로 밀항하여 동경에 왔을 때 함께 가방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오재선이 조총련에 가입하고 북한을 위해 일했냐는 질문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재선이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성질도 못되고 그런 활동을 할 자질도 못됩니다. 그 오재선이는 일본 여자와 만나 살면서 야쿠자 활동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아라가와구 민단 교포들 사이에서 오재선이는 평판이 좋질 않았어요. 간첩 질을 하려면 사람 인심을 끌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야쿠자 하는 놈이 어떻게 간첩 질을 합니까?"

이종사촌이라는 그를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그를 통해 수사 기록에 나온 다른 사람들도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 모두 오재선의 간첩활동 또는 조총련 활동이 사실이 아님을 증언해 주었다.

일본에 다녀온 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 양로원'이라는 요양 시설에 머물고 있는 그를 만나러 갔다. 그새 그의 얼굴은 한층 더 늙게 보였다. 등은 더 굽었고, 주름은 한층 더 깊고 많아진 듯했다. 무엇보다 눈동자의 초점이 이전보다 탁해졌다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일본에 다녀온 일은 잘되었습니까?"
"네, 생각보다 잘 됐어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그거 잘 됐네요. 전 일본에서 쫓겨오고 나서 계속 아파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건강하셔야죠. 그래야 진실을 마주할 수 있어요."
"재심에서 무죄 받고 나라에서 보상이라도 받으면 불고기 집 다시 차리고 싶어요. 내가 요리할 불고기를 누군가 맛있게 먹어줄 때 행복했어요.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죠. 다시 그런 기분을 느껴볼 기회가 올까 모르겠네요."

그럴 것이라고 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짓밟히고 무너진 그의 시간을 국가가 나서 배상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라도 일어설 기회는 주어져야 하니까.

오는 3월, 그는 재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오재선과 양승태

 16일 오후 대법원 대법정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관련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상고심 선고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양승태 대법원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2015년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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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선은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1943년 부모와 함께 제주로 입국했다. 아버지 오창헌이 애월면사무소 직원으로 재직하던 중 제주에 4.3이 일어나 일본으로 도피하였고, 그 역시 1956년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서 아버지와의 불화로 학교를 그만두고 가방 재단사로 일하였다. 일본 여성을 만나 사이타마에서 신혼 집을 차렸으나 처가 식구의 반대로 결국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홀로 살던 그는 야쿠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각성제 등을 취급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각성제 취급이 문제가 되어 결국 1982년 3월 강제 송환되어 부산에 도착하였다. 1986년 제주경찰서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재판부는 그의 고문 주장을 일축해 버렸다. 그때 주심 재판장이 바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양승태가 대법원장으로 취임하던 그때 시골의 요양원에 들어가 있었다. 요양원 병원 TV에서 양승태를 보았을 때의 분노로 인해 그는 며칠간 앓아누웠다고 한다. 오늘도 오재선은 제주시 도평동의 한 양로원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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