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23 10:33최종 업데이트 18.02.23 10:55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예전 그대로였다. 2008년에 다시 찾은 공지천의 다리는 예전 그대로였고, 이디오피아 카페도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춘천을 떠나온 지도 20년이 다 되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그대로이지 않았다.

강원예식장을 지나자 시외버스터미널 자리는 텅 빈 공터로 비어 있었다. 빈 공터를 보자 내 마음 한구석도 텅 빈 듯했다. 건물 하나가 사라지면 내 마음 속 기억도 한 자락 사라지는 듯했다. 텅 빈 터미널 탓일까? 터미널 주변에 있던 음식점들과 여관들도 모두 스러져가듯 빛이 바라고 있었다.


"나 여기 터미널 근처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 한 적이 있어."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예? 짜장면 배달했었어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배 조사관이 놀란 듯 물었다.

"응. 몇 학년 때인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마이마이 카세트'가 너무 갖고 싶어서 집 나와서 한 달 정도 아르바이트 한 적이 있거든.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카세트를 샀지. 그때 얼마나 좋던지. 세상 다 가진 기분이었어. 카세트 하나에.."

당시에 난 그보다 더 좋은 아르바이트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짜장면을 한 달 가까이 먹을 수 있었고, 또 번 돈으로 갖고 싶은 카세트도 샀다. 아마도 그 시절 노동의 경험은 내게 일은 즐거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나다 또 하나의 건물이 눈에 들어 왔다.

"저 건물에도 배달한 적이 몇 번 있었어."

터미널에서 중앙로 쪽으로 몇 백 미터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요새 같은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은 육중한 철문과 높은 시멘트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건물이었다. 배달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그 건물에 배달할 일이 생겼다.

평소같지 않게 가게주인 아저씨가 배달을 갈 때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문 앞에 가면 가만히 서 있을 것, 질문하지 말 것, 그릇은 전화가 오면 찾으러 갈 것, 돈은 받지 않을 것' 등이었다.

왜냐고 묻자 "이 녀석아 질문하지 말랬잖아"라는 핀잔만 들었다. 배달 음식은 항상 짜장면 2그릇, 짬뽕 1그릇이었다. 소위 '철가방'을 들고 검은 철문 앞에 서면 스피커에서 무슨 일로 왔느냐는 소리가 났다.

배달 왔다고 대답하면 철문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고 그곳에 음식을 넣으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을 넣고 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가게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아무 일 없지 않은 것 같은 긴장감이 온 마음에 가득했다. 그리고 주인아저씨가 그릇을 찾아오라고 해서 정문에 가보면 항상 그릇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저긴 안기부 건물이었어. 진짜 배달가기 싫은 곳 중 하나였는데."
"중국집 배달도 시켜요?"
"그러게, 시켜 먹더라고."

무심히 그 건물 자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죽림동 동주민센터에 도착한 우리는 주차한 뒤 사무실로 올라갔다. 동주민센터에서 마련해 준 조사실에 들어가니 작은 키에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오주석씨가 앉아 있었다.

서예로 버틴 억울한 옥살이

볕이 잘드는 자택에서 이야기 중인 오주석 ⓒ 변상철


인사를 나누고 어떤 점에서 진실규명을 요청한 것인지 물었다. 오주석씨는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원래 이북 출신이에요. 전쟁 때 월남해서 여기 저기 떠돌며 살다가 1960년대에 경찰에 입사를 했지요. 경찰에서 복무하며 열심히 생활했죠. 그런데 워낙 박봉이다 보니 생활이 힘들어서 경찰생활을 그만두고 슈퍼마켓을 시작했어요.

남들보다 조금 부지런한 성격이라 여기저기 관공서나 식당 같은 곳에 음식재료를 많이 납품해서 춘천 중앙시장에서는 제법 큰 슈퍼를 운영하게 되었어요. 지금이야 워낙 큰 슈퍼들이 많으니 작아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제법 큰 규모였어요.

그러다가 작은 가게를 하는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선진지 견학 차원에서 일본을 갔었죠. 당시에 일본에서는 체인이 유행을 하고 있었고, 그 선진 경영법을 배우고자 건너갔던 겁니다. 그것이 암흑 같은 세월의 시작일 줄이야 당시엔 꿈에도 몰랐지요."

1980년 3월 일본 이바라키현으로 연수를 떠났던 그는 근처에 살고 있는 사촌에게 연락해 호텔에서 만났다. 안부를 묻고 한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소식을 전하는 등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30분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다. 오주석씨는 연수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또다시 바쁜 일상생활을 보냈다.

그렇게 지낸 지 3년. 그에게 악몽이 찾아왔다. 집으로 안기부 춘천지부 직원들이 들이 닥친 것이다.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안기부 춘천지부로 연행된 그에게 '조총련에 포섭돼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했다는 범죄 사실이 꼬리표처럼 붙었다. 짐승 다루듯 수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얼마나 구금되었느냐고 물었다.

"수사관들이 시간을 알려주나요? 잡혀간 다음에 며칠이 흘렀는지도 몰라요. 협박이나 욕은 기본이죠. 발가벗겨진 채 고문 한참 당한 뒤 정신차려 보니 법정에 있더라고요. 법정에 섰을 때 이미 저는 간첩 활동을 한 사람이 돼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1980년 의정부에서 군 생활을 하던 큰아들을 면회 갔던 일도 '포섭'차원에서 진행된 일로 바뀌어 있었고 중학교 친구 7명과 70년대 중반 만든 친목 모임도 간첩활동을 위한 일이 되어 있었다. 

"결정적으로 절 간첩으로 조작하기 쉬웠던 것은 제가 동사무소의 지역방위위원이었다는 겁니다. 열심히 지역에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방위위원을 수행했는데 그 회의 때마다 동사무소에서 저에게 나눠준 회의 자료를 탐지했다는 겁니다. 피를 토할 노릇이지 않겠어요?"

그는 대법원까지 항소했지만 기각됐고, 결국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5년 8개월을 복역한 뒤 가석방됐다.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죽을 생각을 여러 번 했었어요.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간수 하나가 서예반이 있는데 출역 대신 그곳에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예반에 갔더니 거기에 신영복 선생이 계시더라고요.

먹을 갈고 붓으로 한 획, 한 획 글을 써나가니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더라고요. 내 안에서 억울했던 마음을 글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니 억울한 마음도 하나 하나 종이에 담겨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1988년도 작품이다. 감옥 안에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는 오주석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변상철


그는 그렇게 서예로 기나긴 옥살이를 견뎌냈다. 그렇게 버티고 나서 세상에 나왔지만 이미 밖의 세상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친구들은 그를 멀리하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 생업도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저도 짬뽕 많이 먹었습니다"

대화를 나눈 지 3시간여가 흘렀다. 배도 고팠고 휴식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가 공지천 쪽에 가면 갈비탕이 맛있다고 했다. 조선갈빗탕이라는 식당에서 갈빗탕을 먹으러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아까 보았던 안기부 춘천지부 건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제가 어렸을 때 여기 터미널 근처 중국에서 짜장면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그렇잖아도 저 건물에도 배달했다는 얘기를 아까 했었는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짬뽕 많이 먹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아차 싶었다.

"고문하는 놈들은 꼭 국물 없는 짜장면이나 볶음밥을 먹고 난 꼭 짬뽕을 시켜줘요. 왜 그 놈들은 물고문을 할 때 맹물이 아니라 꼭 짬뽕 국물을 부을까요? 맵고 뜨거운 국물이 콧구멍,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그 고통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 뒤로 매운 음식은 못 넘겨요. 그렇게 좋아하던 닭갈비도 안 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와 찾아갔던 춘천의 갈비탕 식당 ⓒ 변상철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나의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부끄러운 기억으로 바뀐 경험을 했다. 오주석씨가 아니더라도 난 누군가에게 고통이 되었을 짬뽕을 배달했을 수 있고, 그 고통에 미필적으로라도 가담했다는 죄책감이 옥죄여 오는 걸 느꼈다.

그와 다시 만난 건 2016년 겨울이었다. 그의 건강이 예전만 못해 더 몸이 망가지기 전에 옥중에서 썼던 서예작품을 기증하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자택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희고 눈부셨다. 신영복 선생과 함께 글을 썼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서예작품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감옥에서 오래 있다 보면 먼저 나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출소한다고 기념으로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서로 글 한 점씩을 선물로 줘요. 신영복 선생 글도 그렇게 해서 받게 된 거지."

작품이 아까워 전시를 계획했다. 전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할 때 그가 말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해서 그곳에서 우리끼리 감옥을 벽촌(碧村)이라고 해요. 푸를 벽에 마을 촌, 벽촌. 벽촌 사람들..."

2017옥중동인 서예전 벽촌사람들 2017년 3월 2주간 서울시 시민청 갤러리에서 진행한 서예전. 옥중 생활 당시 함께 서예반에 계셨던 분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 변상철


우리는 2016년 겨울 서울시 시민청 지하에서 '벽촌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진행했다. 아름다운 푸른 옷의 벽촌 사람들이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써 내려간 글과 그림을 전시했다. 전시회를 찾아준 오주석씨는 전시회를 열어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작품을 둘러보고 그는 말했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가 기억되고 있는데 국가는 자기 잘못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니 원..."

악의 평범함이 선의 평범함으로

2012년 그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기각됐다. 재심판결 6개월 이내에 청구소송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니 원래 내가 원했던 것은 다 이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간첩 조작으로 인해 수십년간 피해 받은 지난 세월에 대해서는 국가가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으니 그게 원통한 거죠."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인 송우석은 '국가가 뭡니까'라고 묻는다. 고문 경찰 차동영은 붉어진 얼굴로 '국가가 뭔지 몰라?'라며 소리친다. 나는 차동영의 그 고함소리에 움찔 놀랐다.

1980년대 나는 거의 매주 신문과 TV에서 공안사건을 접했다. 간첩과 용공좌익세력이 체포되었고, 그 내용을 보도하는 언론과 수사기관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국밥집 아들이 체포된 '부림사건'을 비롯해 '학림사건', '오송회 사건', '남민전사건'. ○○사건, ○○사건...

평범한 일반 시민들은 고문 속에 고통 받는 국밥집 아들을 외면했고, 우리가 그들의 피해를 외면하는 동안 더 많은 국밥집 아들이 이곳저곳에서 국가권력의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국가권력을 군인에게 빼앗기고, 민주주의를 상실했음에도 별다른 저항감 없이 살았던 나와 그 시대의 사람들. 어쩌면 그들의 피해에 눈감은 나도 차동영의 고문범죄에 부역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의 자각일지도 모른다.

고문은 몇몇 수사관과 양심을 잃어버린 법조인의 범죄였지만 그들이 수십 년간 고통을 받으며 외면 받는 삶을 살도록 한 것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적어도 어린 아이가 배달한 짬뽕 국물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느끼는 염치와 고통을 누군가는 함께 나눠야 하지 않을까.

악의 평범함이 선의 평범함으로 돌아서는 사회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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