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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한국신학대학 졸업식 모습(오른쪽부터 장준하, 송창근, 박봉랑).
▲ 장준하 졸업식 한국신학대학 졸업식 모습(오른쪽부터 장준하, 송창근, 박봉랑).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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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문익환의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장준하를 들어야 할 것이다. 문익환은 물경 56세에 재야운동에 나서면서 일갈하기를 '장준하의 대타'라 하였다. 이것이 매우 사려 깊은 역사의식의 소산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체험의 질이 다른 탓이다.

때는 베트남 종전 후, 한국의 언론들이 총동원되어 남베트남 주민이 보트피플로 전락하는 과정을 목 놓아 보도할 무렵이었다. 문익환은 그 반대편에 숨기고 있는 이면의 진실을 잠시도 외면할 수 없었다. 무능한 정부가 국민에게 어떻게 버려지는지, 부패한 반공주의가 사회를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빠트리는지, 특히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에서 내려온 기독교도의 입장에서 타락한 권력이 국가를 어떻게 사회주의자들에게 떠넘겨 버리는지.

문익환의 기대가 장준하에게 집중되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한국정치사에서 김구 이후 민족대통합 노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그였으니까.

남산에서 선거연설 중인 장준하.
▲ 선거연설 남산에서 선거연설 중인 장준하.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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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친구

문익환은 장준하를 동생 문동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은 흔히 문동환을 '문익환의 동생'으로 기억하지만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재야 지식인 사회에서 문익환은 '문동환의 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문동환과 장준하는 일본 신학교에서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다. 불과 4-5개월을 함께 보냈지만 유달리 가까운 사이였다. 이 때는 대동아전쟁이 터져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끌고 갈 때였다. 그 엄혹한 상황에서 조직적 저항운동을 꿈꾼 것은 송몽규였다.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학도병의 무기를 받아서 일본군에게 겨누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다. 문익환은 도쿄에서 신학교 교장과 담판하여 문동환과 함께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한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의 모습(맨 오른쪽).
▲ 광복군 광복군 시절 장준하의 모습(맨 오른쪽).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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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의 행적은 자못 장엄했다. 일본 학도병으로 군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대륙 6천리 장정을 감행한 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존재이전을 완료한 것이다. (이를 기록한 책이 <돌베개>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서울에 온다. 그 시절 문익환의 눈에 장준하는 놀랍게 변해 있었다.

"해방 후 서울에 와서 같이 지내면서 보니까
너무너무 내 눈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앞서가고 있는
대선배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해방 환국 해방 직후, 여의도 비행장에 환국한 임정요인들과 장준하.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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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대통령 장준하

해방 후, 장준하는 문동환의 권유로 한국신학교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이즈음 문동환은 일본 유학시절 '관동조선신학회'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1948년 만든 '복음동지회'라는 모임이었다. 연세대, 감신대, 루터교, 한신대, 장신대 등의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문익환과 장준하는 깊은 교류를 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이 준동할 때 저항인사 중 발군이 장준하였다. 그는 월간지 <사상계>를 발행하여 독재에 맞서다가 여러 번 연행되고 투옥되었다. 정계에 나서는 것도 박정희를 막기 위해서였다. 한낱 출세욕에 불타는 일본군 장교가 민족의 지도자처럼 구는 것을 광복군 출신으로서 절대로 눈감아 줄 수 없었다. 같은 대지에서 같은 또래로서 독립군 소탕작전을 펼치던 매국노에 대한 기억을 버릴 수 없는데 뉘 앞에서 감히 위정자를 자처하다니!

복음동지회 20주년 기념 앨범과 복음동지회 회원들, 당시 문익환은 유학 중으로 사진에 덧붙여져 있다(1949년 9월 20일, 앞줄 맨 왼쪽 장준하).
▲ 복음동지회 복음동지회 20주년 기념 앨범과 복음동지회 회원들, 당시 문익환은 유학 중으로 사진에 덧붙여져 있다(1949년 9월 20일, 앞줄 맨 왼쪽 장준하).
ⓒ (출처:복음동지회 20주년 앨범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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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에 옥중 당선되기도 하고, '유신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 불과 열흘 만에 무려 40만 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유신 대통령 박정희와 대적하는 재야 대통령 장준하라 불리게 된 터라 둘 사이에는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갈등이 한없이 증폭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 제1호는 장준하에게서 받은 충격 때문에 발동되었고, 체포 제1호도 장준하였다.

그 긴급조치가 얼마나 가공할 폭거에 속했는지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모든 형태의 집회와 파업을 불법으로 선포했고, 정부를 비판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보복을 가했다. 문동환과 안병무가 정치교수 1호가 되어 1975년 6월 12일자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등도 실직 교수가 되었다.

유신의 칼날이 미친듯이 춤을 추던 때였다. 문동환의 주도로 해직교수들이 중심이 된 '갈릴리 교회'가 처음 모이던 날, 8월 17일 장준하가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사 당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장준하 대타

늦봄의 책상에 항상 놓여있던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
▲ 영정 늦봄의 책상에 항상 놓여있던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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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준하가 죽었어. 세상에! 장준하를 데려갔어."

문익환은 당장 실족사 현장에 달려가서 세세히 살핀 결과 이를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했다. 높은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다는데 매고 있던 '마호병'(안에 유리가 있는 물통)이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귀 뒤의 급소에 못으로 구멍이 뚫린 듯 타박상이 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 생기는 상처도 없다. 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도 똑딱거렸다. 게다가 양 팔꿈치에 생긴 꽉 조여진 자국은 무엇인가.

문익환은 이때 민족의 위기상황을 느꼈다. '김구 선생처럼 장준하도 죽인다 이거지!' 그래서 관을 묻으면서 약속했다. '네가 하려다 못한 일을 이제 내가 하마!' 문익환은 그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장례를 마치고 가지고 온 장준하의 영정사진을 문익환의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마치 산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걸고는 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민족들이 오늘도 살아남은 이유는 나름대로 간직해둔 정신적 유산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의 유산은 3.1운동이 그 절정이었다. 그것을 낡은 역사 속에 묻어두기만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시 성서번역에 여념 없던 문익환이 서재를 박차고 나온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군사독재의 쇠사슬에 눌려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있는 질식할 것 같은 때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후세에 남겨야 될 것 아닌가?'

문익환은 장준하의 죽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 늦봄 연설 문익환은 장준하의 죽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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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문익환은 늦봄이 되었다.

늦봄은 장준하의 영정 사진을 보며,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3.1절을 맞아 박정희와 유신 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작성한다. 바로 '3.1민주구국선언'이다. 늦봄 문익환은 3.1민주구국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며, 험난한 권력과의 싸움, 생명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향한 여정을 새롭게 시작했다.

이 못난 것아
-다시 장 형의 영전에 바치노라



자넨 어쩌자고 대낮에 눈감고 주먹질인가?
그 흔한 장미꽃 웃음이라도 뿌릴 일이지.

자넨 어쩌자고 바람보고 칼 빼드는가?
고맙게도 절로 자라 주는 머리라도 날릴 일이지

자넨 어쩌자고 종다리 지저귀는 앞산보고 눈흘기는가?
뒷산 서낭당에 가서 침이라도 뱉을 일이지.

자넨 어쩌자고 넝쿨째 굴러드는 복을 발길질인가?
아내더러 호박국이라도 끓여 달랠 일이지.

누구나 가는 길
삼삼오오 짝지어 산천경개나 구경하며
슬슬 가도 될 일을

이 못난 것아
자넨 어쩌자고 그리 서둘러 혼자 가는가?

1976.1.21




태그:#장준하, #문익환, #늦봄, #약사봉, #문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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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의 유택을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자 합니다.

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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