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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온도 영하 20도의 한파가 몸을 꽁꽁 얼게 하는 날입니다. 찬바람에 드러난 손과 귀가 얼얼하고 맵싸한 공기에 코끝이 시립니다. 외투 안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종종 걸음을 걸으며, 마음은 메콩 강가의 한 소녀를 떠올립니다.

습하고 더운 메콩 강. 느리게 오가는 나룻배에 올라 삐딱하게 뱃전에 몸을 기대고 강을 바라보는 열다섯 살 반의 소녀. 낡고 속이 훤히 내비치다시피 한 생사 원피스, 허리를 졸라맨 가죽 벨트, 금박을 입힌 하이힐, 그리고 남성용 중절모를 쓴 소녀.

<연인> 영화의 한 장면
 <연인> 영화의 한 장면
ⓒ 장 자크 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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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재개봉 영화를 통해서입니다. 영화는 강렬하고 좋았으며 예상했던 대로 상당히 '야한' 영화였습니다. 원작이 책이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발간되었다는 것은 그때 알았습니다. 가난한 어린 소녀와 돈 많은 어른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렇게 보면 너무 뻔한 이야기 같았습니다. 통속적이고, 원조 교제 같고, 일탈과 허무가 가득한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잊고 지내던 <연인>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작년에 고3이었던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은 입시 준비의 압박감 속에서도 소설책을 읽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두꺼운 소설책을 읽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책을 종종 골랐습니다. 문제집 사러 동네 서점에 갔다가 민음사 고전 시리즈 중에서 눈에 띄는 얇은 책을 집는 거지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연인>이었습니다. 이후 <연인>은 자주 아들의 가방에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 자기 삶을 바탕으로 글을 쓰려 한다면,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아이가 <연인>을 권하며 한 말입니다. 뒤라스는 자기 삶을 글에 어떻게 녹여내는지를 보여준다고요. 영화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각인되어 '야한' 소설이거니 싶어 머뭇거렸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몇 번이나 권하길래 읽었지요.

문장들이 아름다웠습니다. 뒤라스의 상념과 감정을 따라가는 시적인 문장들... 그리고 중국인 남자와의 정사 장면 문장들도 참 아름다웠어요. 저는 혼자 낭송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첫 독서에서는 소녀 시절의 뒤라스와 중국인 남자와의 사랑에 눈에 갔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을 때는 달랐습니다. 청소년기 시절 뒤라스의 황폐하고 지친 마음, 불우한 가족 관계에서 늙어버린 듯한 외롭고 고통스런 마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시 읽으면서, 마음이 아프고 슬프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책은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가 봅니다.

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이 책은 자서전일까요, 아니면 소설일까요?" 뒤라스는 장르를 명확하게 말한 바가 없다고 합니다. 이 책은 식민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살았던 소녀 시절의 회상이고, 뒤라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이 70세에 이르러 이 책을 썼습니다.

가난한 백인 가족. 무능한 어머니. 건달 같은 큰 오빠. 사랑하는 작은 오빠. 그리고 우연히 만난 (어쩌면 만나고 싶었던) 돈 많은 중국인 남자. 뒤라스는 여러 작품에 중국인 남자 이야기를 썼지만, 실제 섹스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처음 썼습니다. 가족들이 전부 죽은 다음에야,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죠. 혹시라도 가족들이 상처받을까 봐 그런 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연인> 책 표지
▲ <연인> 책 표지 <연인> 책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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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은 뒤라스가 노년에 이르러 기억에 따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하나의 이미지(영상)으로 문을 엽니다. 노년에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과거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까요? 뒤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나는 나 혼자만 간직하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한 적이 없는 이런 영상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 영상은 황홀한 기운에 감싸인 채 항상 같은 침묵 속에서 펼쳐진다. 그것은 나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이미지들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인데, 그 속에서 나는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기쁨에 빠져 든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는 베트남 남부 지아딘에서 교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납니다. 1933년 프랑스로 귀국할 때까지 그가 살았던 인도차이나 반도는 <연인>을 포함하여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인도차이나의 자연과 식민지의 사람들은 그의 삶에 강한 이미지로 각인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어린 시절에는 베란다, 생기 잃은 나무들, 깎은 돌로 만든 난간들, 타일을 박은 테라스들, 흰 라카 칠을 한 가구들, 등나무 의자들, 부드러운 물 위를 흘러가는 불안한 소형보트들, 아시아의 습기 찬 송진 속에서 베트남의 물지게꾼과 마주치는 식민지의 희디 흰 실루엣들이 있었다. 항상 그녀는 이 빛을 기억할 것이다. 이 불공평한 세계의 빛을."
- 알렝 비르콩들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어느 사회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식민지의 가난한 백인 가족. 그 가족의 일원으로 혹독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는 소녀는 삶의 탈출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큰 아들에 집착하는 엄마. 지독한 가난. 돌파구가 없는 일상. 소녀는 중국인 남자를 통해서 가족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인지, 그냥 서로 이용한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책을 읽으며 느껴보세요(저는 아이가 처음 이 책을 제게 권했을 때 약간 혼란과 우려를 느꼈어요. 작품 속 소녀의 고뇌와 갈등이 아이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누구나 삶이 녹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뒤라스의 삶도 파란만장 했습니다. 그는 전쟁 포로 해방 활동, 68년 5월 혁명에 참여하는 등의 진보적 삶을 삽니다. 소설에서 영화로, 다시 소설로 옮기며 70여 편의 책을 써냅니다. 같은 이야기도 쓰고, 다시 고쳐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글쓰기, 그것은 전적으로 삶의 등가물이다'라고 했다는데, 저에게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할지 성찰하게 합니다.

뒤라스가 <연인>에서 열다섯 살 반 시절의 중국인 남자 이야기를 중심으로 썼지만, 이 책에 담긴 것은 그의 삶을 내내 관통하는 것들입니다. '빈롱의 미친 여자'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말하고, 어머니에 대한 애증, 죽음에의 유혹과 두려움, 작은 오빠에게 느낀 불멸성. 그리고 멀리 펼쳐진 바다로 끝없이 나가고 싶은 자유에의 욕망.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그는 삶 안에서 불멸하는 것들을 건져내고 싶어합니다. 그의 정신과 치열한 삶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에게 '불멸'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복종하면서 불복종했다'고 말했던 뒤라스의 뜨거운 삶을 이 책을 통하여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민음사(2007)


태그:#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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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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