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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아침이다. 나는 아침에 눈 뜨기가 두렵다.
 또 아침이다. 나는 아침에 눈 뜨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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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침이다. 나는 아침에 눈 뜨기가 두렵다. 딱히 할 일도, 그렇다고 손에 잡히는 일도 없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막막하다. 다니던 계약직에서 한 달이 조금 지나 해고된 후 벌써 6개월을 경과하고 있다. 이에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다.

해고 이후 이런저런 계약직 자리를 물색해보았지만, 서류에서 탈락하거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계약직도 경력과 경험이 필요하고, 자격증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한때는 거의 매일 구직 사이트에 접속하다시피 했지만, 급여의 측면에서나, 담당 업무의 내용에서나 마땅한 일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전문 기술 하나 소지하지 못한 문과 출신의 20대 남성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은 건 꽤 오래된 현상일 것이다.

결국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구직은 포기했다. 하긴 설사 계약직 구직에 성공하더라도 아르바이트나 계약직인 이상 단순 반복 작업에 그칠 뿐, 개인적으로 흥미나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또, 더 나아가 운 좋게 정규직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내 삶이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정규직 취업에 성공하기까지 쏟아 부어야 할 비용과 노력 역시 만만찮을 것이다. 대신 얼마 전부터 그동안 조금씩 해오던 과외 쪽으로 일이 풀려 수입 사정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월 평균 수입을 내면 61만 원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과외수업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명목의 원고료 수입까지 포함되어 있다.

어느 순간부터 '구직'을 포기했다

물론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왔음에도 어머니의 부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수입으로 집안의 생활비를 충당할 일은 없다. 내 개인을 위한 지출 역시 교통비와 매달 약간의 도서 구입비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으므로, 수입의 90%는 적금으로 돌리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수입 자체가 워낙 적은 만큼, 이래서야 원래 계획했던 대학원 진학은커녕, 어느 천 년에 생활상의 자립조차 이룩해낼 수 있을까 싶다. 그 비싼 서울의 원룸 보증금과 월세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요즘은 아예 애초 계획했던 대학원 진학에도 회의가 든다. 대학원에 진학해보았자 별 수 없이 빚만 늘어갈 뿐이라는 것은, 이미 5년 전 학부생 시절 대학원생들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학원 진학과 학위취득은 어디까지나 제도권 학계에 진입하기 위한, 또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학문 수준을 인정받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대학이 '경영'의 대상이 되고, 학문이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세태에서 굳이 대학에 적(籍)을 둔다는 것이 의미 있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롯이 학문에 뜻이 있다면, 그리고 굳이 이 사회의 시선이나 인정에 목마르지 않다면, 대학원 진학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그 어떤 구상도 실현해나가기가 어렵다. 남들이 보기엔, 일하는 것도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며 뒹굴고 있으니 '무위도식'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생활도 하루 이틀이면 족할 뿐, 막상 장기화되다 보면 그야말로 고역이다. 집밖으로도 거의 나갈 수 없다.

집밖으로 나가면 하다 못해 교통비를 비롯해 결국 소비생활로 이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하루하루를 죽일 뿐이다. 차라리 눈 뜨고 있기가 싫어 잠이 오지 않아도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선잠에라도 빠져 시간이 훌쩍 흘러가있다. 눈을 감고 있을 때가 그나마 가장 좋다.

니트족 30만 시대

 니트족이라는 규정의 이면에는, 고용(직장)·교육(학교)·직업훈련 상태 중 어느 상태에라도 속해야 '정상적 사회인'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니트족이라는 규정의 이면에는, 고용(직장)·교육(학교)·직업훈련 상태 중 어느 상태에라도 속해야 '정상적 사회인'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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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국내 청년 실업자 중 '쉬었음' 인구가 지난해 기준 3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일제히 '니트족'이라 불렀다. 니트족은,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이란다.

즉, 구직 의욕이 전혀 없이 고용, 교육, 직업훈련 상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채 집안에서 쉬는 청년층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일반적 의미에서의 구직을 포기한 글쓴이 역시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일부 언론에선 니트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친절하게도 니트족 청년의 모습이 그려진 삽화를 첨부하기도 하였다.

해당 삽화를 보면, 웬 심술궂게 생긴 청년 한 명이 방구석에 드러누워 리모컨을 돌리며 TV를 보는 한편으로, 그 옆에는 컵라면과 과자 봉지가 놓여 있다. 왠지 게으르고 무능하며, 그래서 못나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니트족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니트족을 '사회문제', 또는 '문제아'로 여기는 인식인 것이다. 나는 해당 삽화와 더불어 우선 니트족이라는 말 자체에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왜냐면 니트족이라는 규정의 이면에는, 고용(직장)·교육(학교)·직업훈련 상태 중 어느 상태에라도 속해야 '정상적 사회인'이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의식 속에서 니트족은 어디까지나 '피동적 주체'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니트족은 모두 본인이 무능한 결과가 아니냐고.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개인의 '능력'도 '돈'으로 만드는 세상이라고.

실제 내 주변을 봐도 그렇다. 비록 본인은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공부나 직업 훈련을 위한 열의가 별로 없어도, 집안 형편이 중산층 이상으로 괜찮게 사는 경우 부모님의 권유와 지원으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온다.

또 한 번은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가정에 과외 상담을 위해 찾아갔다가 해당 가정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자기 아들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면 유학을 보냈다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이 제법 기반이 잡혀있는 만큼, 그것을 물려받으면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곧 자녀의 능력인 세상이다. 이 지점에서 가난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느냐, 사회에 있느냐는 논쟁은, 더 이상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헌법 제1조 2항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금전적 능력에 있고, 모든 권력은 금전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어느 시대건, 돈이 권력의 원천이 아니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의미에서의 '자수성가'가 불가능한 이런 세상에서, 니트족을 두고 '개인의 능력'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니트족은 우리 시대의 산물이며, 하층 계급의 존재양태 중 하나다. 결코 문제아 집단이 아니다.

'포기'와 '은둔'도 시대를 향한 적극적 행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처럼 대안이 없는 시대에는, '포기'나 '쉬는 것'도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처럼 대안이 없는 시대에는, '포기'나 '쉬는 것'도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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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각에선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인상되었을지라도, 한 달 급여로 따지면 고작 157만 원이다. 니트족을 비롯해 대부분 4년제 대학 졸업자인 지금의 청년 세대가 보기엔 참으로 어이없는 급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자본주의 도시의 소비사회에서 한 달 급여 157만 원은, 제대로 된 저축조차 어려운 금액이다.

설사 소비를 아끼고 아껴 한 달에 1백만 원 씩 저축을 꼬박꼬박 한다 해도,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아득한 꿈일 뿐이다. 자가(自家) 소유자들은 집값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호들갑을 떨지만, 자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코미디일 뿐이다. 집값이 떨어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가 소유는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비트코인 투기를 두고 '2030세대의 마지막 남은 계층이동 사다리'라고도 한다. 하지만 비트코인 같은 '투기'가 '계층 사다리'라면 대체 우리 사회의 2030세대는 얼마나 불행한 세대이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불행해져야 된단 말인가?

기성의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그 누구도 세상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책임은 성찰하지 않은 채, 단지 비트코인이 2030세대의 마지막 남은 계층 사다리라는 현상 진단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사실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대안이 마땅찮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는 '대안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처럼 대안이 없는 시대에는, '포기'나 '쉬는 것'도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니트족은 이 시대의 '잉여'가 아니라 이 시대를 '보이콧 한 사람들'이며, 현 체제에 포섭되어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청년층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종래에 '정상'이라 여겨온 것들이 더 이상 '정상'이 될 수 없음을, 이들은 온 몸으로, 그 존재 자체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체제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이들의 존재는, 자본주의 체제와 성장신화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니트족이라는 규정에는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 깔려 있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이 시대에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상성이 과연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정상성에 대한 오랜 강박에서 벗어나 사안과 본질을 통찰해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지금 구직을 포기한 채 쉬고 있는 청년들이야말로, 현재의 체제에 균열을 내며 선두에서 대안세상의 박두를 맞이하고자 하는 주체들인지도 모른다. '포기'와 '은둔'도 시대를 향한 적극적 행위다. 단지 이들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상성이 여전히 위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세상 밖으로 서로 외쳐야 한다. 나도 니트족이라고. 아울러 우리는 기성 언론에 요구해야 한다. 집안에서 쉬고 있는 청년층을 니트족이라 부르지 말라고. 우리는 고용·학교·직업 훈련 상태에 '소속되지 못한 비정상인'이 아니라, 대안이 없는 현 시대를 보이콧하고, 현 체제에 균열을 내며 가장 선두에서 대안사회를 맞이할 주체들이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 '다르게 생각하는 글방(http://anarchism-historian.tistory.com/79)'에도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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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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