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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 내 몸 하나 누울 곳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 말은 내 몸 하나 누울 곳을 원한다고 했지만 단순히 누울 공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죽기 전에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갖고 싶다는 소망을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내 명의로 된 집을 갖는다는 건 쉽지 않다. 집값이 그만큼 비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집을 사고 싶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출을 받는 순간 하우스푸어의 삶이 시작된다.

십여 년 전에는 부동산값 등락이 신문의 한 지면을 차지했다. 나는 아침마다 그 지면을 보면서 언제쯤이면 우리 동네의 아파트값이 내가 매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질까를 생각했다. 지금은 이사를 했지만 그 동네의 집값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는 소문이다.

난 여전히 내 명의의 집이 없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24쪽의 신문 지면에 아파트 값의 시세가 실릴 만큼 한국사회에서 집값은 평범한 소시민에게 관심거리였다.

2017년 9월 5일, 강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2차 주민토론회'가 열렸다. 그날, 장애인 학생의 어머니가 지역주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특수학교 짓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제발 특수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도대체 집값이 뭐길래 아무 잘못도 없는 장애학생 어머니가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인가. 기사를 본 며칠 동안 '이게 실화인가?' 하면서 멘붕에 빠져 지냈다.

 지원주택 '행복하우스' 외관.
 지원주택 '행복하우스' 외관.
ⓒ 행복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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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의 행복하우스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홈리스를 위한 지원주택이다. 외딴 곳에 있지 않고 일반주택과 섞여 있다. 외형도 똑같은 다세대 건물이다. 2개동으로 나뉜 건물에는 26명의 입주민이 살고 있다.

입주한 지 4년이 돼가는 지원주택 입주민들은 지역주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역주민은 어떻게 편견을 깼는지 알고 싶었다. 다행히 지원주택 입주민들과 오랜 기간 관계를 맺은 지역주민이 있다고 해서 행복하우스를 찾아갔다.

지역주민인 김경립 씨는 행복하우스 '앞집'에 살고 있었다. 지난 1월 8일, 행복하우스 5층 커뮤니티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행복하우스의 책임자 정재원 사회복지사님도 함께였다.

 왼쪽부터 정재원 사회복지사님, 지역주민 김경립 씨, 종민협 강민수 간사.
 왼쪽부터 정재원 사회복지사님, 지역주민 김경립 씨, 종민협 강민수 간사.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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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에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솔직히 처음엔 선입견을 좀 가지고 있었어요. 갑자기 낯선 남자들이 한꺼번에 보이니까요. 특히, 집사람과 딸이 있다 보니까 경계를 했지요. 행복하우스에 사는 분들이 인사성이 좀 없었어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리는 숙이고 다니고. 몇 달 정도는 그랬는데 어느 날, 제가 청소를 하는 걸 보더니 함께 나와서 도와주시는 거예요.

다음날 사회복지사님을 만났을 때 이 건물에 사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물어봤어요. '노숙을 하다가 오신 분들이고, 정신질환을 앓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을 위한 집'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노숙생활을 했던 분들이라 낯을 가리는 걸 모르고 제가 오해를 한 거였어요.

그때부터는 제가 먼저 이분들께 말을 걸고 인사했어요. '인사하면 받아달라, 친하게 지내보자'고 하면서. 집사람한테도 얘기했지요. '잘은 모르지만 옷도 깔끔하게 입고 다니고 자기관리는 잘하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무시하지 말고 인사하라고, 그래야 친해진다'고."

바쁜 일상을 사는 요즘 사람들은 옆집 사람과 인사하며 지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조금 다른 환경을 거쳐온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게 쉬울 리 없다. 인사만 가볍게 주고 받던 김경립 씨가 행복하우스 입주민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년이 지나면서부터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입주민 대부분이 가족 없이 지내는 것을 알고 현관문에 트리를 달아 주었다. 지나는 길에 트리를 보면서 마음이 밝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지원주택 이웃주민 김경립 씨.
 지원주택 이웃주민 김경립 씨.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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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은 거의 없고 내가 먼저 인사하면 그분들도 인사하고 그래요. 좋은 날,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는 날이 되면 신경이 쓰여요. 명절이 되면 집사람에게 꼭 얘기하죠. 앞집 이웃이니 인사하고 떡이나 과일을 좀 나눠먹자고요. 음식이라도 드리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지 않겠어요?

어느 날, 행복하우스 1층 주차장에서 누가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거예요. 나도 자전거 타는 사람이니까 관심 가지고 지켜봤죠. 공구가 필요한 것 같아서 공구하고 기름을 갖고 가서 같이 고쳤어요. 그 일을 계기로 자전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죠. 지금은 독립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갔는데, 가끔 와서 저랑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입주민들이 옥상에서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사장님, 오늘 파티 하니까 올라오세요'하고 초대를 해요. 친해지니까 저희도 좋은 점이 있어요. 예전에는 집 비울 때마다 방범업체에 부탁을 하고 나갔어요. 한 번 나가면 2~3일씩 집을 비우니까요. 지금은 그렇게 안 하죠. 오히려 집 좀 봐달라고 부탁해요.

이제는 저 말고 다른 동네사람들도 대부분 이곳에 대해 알고 있어요. 처음에는 '저 빌라 때문에 집값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들도 일부 있었죠. 하지만 그동안 사건사고도 없었고, 꽃밭 만들고 청소하는 모습도 보이니 동네사람들 생각도 달라졌어요. 이런 지원주택이 각 동마다 하나씩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낯선 사람들을 보면 경계하기 마련이다. 지역주민은 주민대로 입주민은 입주민대로 낯설어 하던 그때, 행복하우스를 책임지는 정재원 사회복지사님이 있었다.

 지원주택 '행복하우스' 정재원 사회복지사님.
 지원주택 '행복하우스' 정재원 사회복지사님.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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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여기 왔을 때 일반 입주민 10세대가 먼저 살고 있었어요. 노숙인이 들어온다는 얘기를 듣고서 대책회의를 했나봐요. '이 사람들하고 같이 못 살겠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서 구청에 민원을 넣었어요. 구청에 가서 조사를 받는데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민원만 듣고 이러면 되겠느냐고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주민들이 오해를 했더라고요. 다들 남자들이니까 혹시 성범죄자가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어요. '지원주택에 사는 분들은 범죄자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심신이 약하고 아픈 분들이다, 나도 그분들과 같이 이 건물에서 산다'라고. 그제서야 안심을 하더라고요. 민원을 넣었던 분들 모두 계약기간을 채우고 나갔죠.

우연히 들었는데, 어떤 분은 LH공사(행복하우스는 LH와 계약돼 있음)에 계약 연장을 요청했었대요. 심지어 여성 분이었는데도요. 같이 살아보니 그냥 보통사람들하고 똑같다고 느낀 거죠. 계속 어울려 살고 싶었는데 저에게 그러자고 할 만한 권한이 없어서 못했어요. 그게 아직도 아쉬워요.

지역주민과 관계가 좋아진 계기는 청소를 꾸준히 하면서부터예요.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여기가 굉장히 지저분했어요. 일반 입주민 10세대가 살고 있었지만 청소는 외주에 맡겼더라고요. 외주업체에서 청소를 했는데도 담배꽁초가 그대로 있고 지저분했죠. 우리가 온 다음부터는 우리가 직접 청소할 테니까 외주 주지 말라고 했어요. 지역주민들의 편견을 없애려면 먼저 깨끗한 환경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또 하나는 1층의 화단 가꾸기였어요. 우리가 오기 전에는 화단도 방치돼 있었어요. 입주민들과 함께 화단의 돌을 고르고 지저분한 잡초를 정리했죠. 제가 형님이라 부르는 김경립 씨도 저희가 성실하게 화단을 가꾸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열었어요. 화단이 군데군데 비니까 장미나무도 심으시고 힘을 보태주셨죠.

그렇게 쌍방이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필요하지만, 손을 내밀 마음이 들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죠. 우리끼리 잘 사는 것만으로는 이 지역의 주민이 될 수 없어요. 나도 잘 살고 지역주민도 함께 잘 살아야 하는 거죠. 다른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면 어느 누가 마음을 열지 않겠어요.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겁니다."

정재원 사회복지사님은 지역주민과의 관계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 환경을 깨끗이 하고 화단을 가꾸고 인사하는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주민의 마음을 열었고, 편견을 없앴다. 이 정도면 지원주택으로서 지역에 무난히 자리를 잡은 것 아니냐고 하니,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역주민들한테)욕 안 먹고 여기까지 왔으면 잘한 거 아닌가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커뮤니티 공간은 행복하우스의 제일 위층인 5층에 있다. 한 층 더 올라가면 옥상이다. 입주민들끼리 공동식사를 하거나 특별한 모임이 있으면 이 커뮤니티 공간을 활용한다.

만약에 이런 공간이 1층에 있다면 입주민은 물론 지역주민과 훨씬 가깝게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정재원 선생님은 그 부분이 제일 아쉽다고 했다. 1층 주차장의 빈 공간을 카페처럼 개조해 지역주민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지역의 오래된 빈 집, 지역의 랜드마크 되기까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홈리스 지원주택.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홈리스 지원주택.
ⓒ Christian Columbres & Holst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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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도 지원주택 입주자들이 지역주민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뉴욕에서는, 지역 내의 골칫거리인 오래된 빈 집을 싸게 매입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만큼 멋진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했다. 이곳의 입주민 중 30~40%만 지원서비스를 받는 사람들(노숙인, 장애인 등)이고, 나머지는 그 지역의 저소득 계층이다.

1층에는 커뮤니티 공간이 있다. 입주민뿐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그곳에서 진행하는 여러 문화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뉴욕의 한 지역주민은 자녀가 1년 동안 참여했던 문화교실의 발표회에 갔다. 발표회가 끝나고 보니 그곳은 지원주택이 개방한 공간이었다. 지원주택이 지역사회에 기여한 사례다.

뉴욕대학교 풀먼 부동산·도시 정책연구원의 연구(2008)에 따르면, 지원주택 개소 후 지원주택 반경 500피트 이내의 집값은 주변에 비해 오히려 올랐다고 한다.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방치되어 있는 빈 집의 수는 106만 9000호나 된다. 이제부터라도 '집이 절실한' 이들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때가 아닐까.

"이곳에 지원주택이 아니고 집단수용시설을 짓는다고 했으면 아마 주민들이 반대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원주택은 시설이 아니니까 지역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던 거죠.

다양한 연령대를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이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 행복하우스에도 아동만 없지 남성, 여성, 20대부터 70대까지 다 있어요. 이렇게 어울려 살면 지역주민들도 낯선 남자들만 모여서 살 때보다 경계심을 덜 갖죠.

우리나라의 지원주택도 일반 주민과 서비스가 필요한 분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형태로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 외국처럼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지원주택을 만드는 게 저의 꿈이죠. 그러면 집값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일은 없지 않겠어요?(웃음)"


정재원 선생님의 야무진 포부가 꼭 이루어지길 바라며 지원주택을 나오는데, 지난 크리스마스 때 김경립 씨가 현관에 달아놓은 트리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덧붙이는 글 | 9화에 걸친 '지원주택, 주거와 복지의 혁명적 결합'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잘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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