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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초기 사이다는 경인철도 차량에도 대형광고판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초기 사이다는 경인철도 차량에도 대형광고판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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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꼬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코미디언의 이 코믹송은 그 시절 사이다의 인기를 증명한다. 그리고 요즈음 사람들은 누군가 속 시원한 이야기를 할 때 '사이다 발언'이라며 환호와 찬사를 보낸다.

'사이다'. 콜라와 함께 탄산음료의 대명사가 된 이 음료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기호음료는 아니었다. 원래 사이다는 술이었다.

사이다는 유럽에서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6도짜리 술이었다. 우리나라에는 1853년 영국 해군에 의해 처음 전해졌으며, 이후 점점 도수가 낮아져 무알코올 음료로 바뀐다.

오늘날과 같은 '탄산 사이다'는 1868년 영국인 노즈 안드레가 일본 요토하마에서 여러 향료를 사용해 만든 '샴페인사이다'가 시초다. 샴페인사이다는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일제강점기인 1905년 2월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는 신흥동 해광사 인근에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짜리 발동기를 구비한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세우고 '별표(星印) 사이다'와 '라무네'라는 상표로 사이다 생산을 시작한다. 1910년 5월에는 일본인 나카야마 우노키치(中山宇之吉)가 근방에 '라무네제조소'를 창업하고 '라이온'과 '헬스표'라는 상표로 생산을 시작한다.

당시의 사이다는 이산화탄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톡 쏘는 맛이 상쾌하고 산뜻해 인기가 높았다. 대중적 인기에는 경인철도 차량에 대형 광고판이 붙는 등의 파격적인 마케팅도 한 몫을 한다. 가격은 병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3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광복 후 큰 인기를 누렸던 ‘스타사이다’의 광고.
▲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광복 후 큰 인기를 누렸던 ‘스타사이다’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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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도 인천 사이다의 인기는 계속된다.

이 시기 사이다 시장의 판도는 전국에 12개의 업체가 있었지만 인천의 '스타 사이다'와 평양의 '금강 사이다'가 양강체제를 구축한 시절이다.

'스타 사이다'는 손욱래(孫旭來)씨가 '인천탄산'의 후신인 '경인합동음료(주)'를 사들여 만들었다. 1950년 5월 9일, 서울에서 '칠성사이다'가 출시될 때까지 사이다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서두에 언급한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꼬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코믹송 역시 그 주인공이 '스타사이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사이다는 큰 인기를 누리며 대중적 음료로 자리 잡는다. 싼 가격에, 톡 쏘는 맛은 일상에 지치고 삶에 힘겨운 이들에게 순간이나마 상쾌함을 주었다. 이제는 너무 흔하고, 혹자는 건강에 해롭다며 터부시되기도 하지만 사이다는 여전히 서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최고의 청량음료이다.

인천을 통해 전해져 국내 음료산업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던 '사이다'. 이제 인천에서 그 부흥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사이다가 국민들의 답답한 속을 풀어주듯 인천은 대한민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존재이다.

대한민국에 있어 시원한 사이다 같은 인천, 그 영광을 바라본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스타사이다’를 생산·판매했던 경인음료의 광고.
▲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 ‘스타사이다’를 생산·판매했던 경인음료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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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게릴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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