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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민담 상황은 생활에서 많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평범하다. 마치 모든 것이 실제인 것처럼 언제나 새롭게 다시 사무쳐온다. 부모는 식량이 떨어져 궁핍 때문에 아이들을 쫓아내야 했거나 아이들은 혹독한 계모에게 학대받아야 했다."

- 그림 형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민담집, 1812>; 이혜정 <그림 형제 독일민담, 2010>에서 재인용

올해 일곱 살이 된 우리 집 꼬마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다. 거의 매일 자기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조른다. 헨젤과 그레텔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 꾀를 내는 부분에서 안도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안타까워하며, 과자의 집을 발견할 때 환호하고 이내 마녀를 만날 때 무서워했다가, 기지를 발휘해서 마녀를 물리칠 때 신나한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이들이 환상의 세계인 과자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나쁜 마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동일시를 느끼는 걸 거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 헨젤과 그레텔을 다시 읽는 내 마음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서 제대로 읽기가 어렵다. 제 새끼 아니라고 숲에 갖다 버리자는 새엄마도, 제 자식들을 후처 말 듣고 함께 버리러 가는 친아빠도 제대로 된 인간들이 아니다. 짐승 같은 인간들도 핑계들은 항상 있다. 새엄마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애들을 버리자고 한다. 아비란 작자는 별 뾰족한 이유도 없이 그 말을 따른다.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아이들을 유기하는 데에 앞장선 새엄마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조용히 아이들을 버려서 숲에서 굶어 죽게 만들 작정이었던 친부는 정말로 덜 나쁜 사람인가? 아니, 이 전대미문 아동 유기 잔혹 동화에서 과연 친부고 계모고 더 나쁘고 덜 나쁘고를 논할 가치가 있는 인간들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 아픈, 고준희 어린이를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친부는 폭행하고 학대한 적은 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들으며 헨젤과 그레텔의 친부를 떠올렸다. 그는 제 자식을 죽인 건 자기가 아니라 계모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자기는 계모가 하자는 대로 했을 뿐이고 덜 나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발목을, 등을, 뼈가 부러질 만큼 세게 밟았어도 그 순간 숨이 붙어 있었으니 살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다.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음에 이르도록 때려선 안 되고 혹여 다치게 했더라도 죽지 않도록 간호를 해줘야 한다는 인간의 기본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제가 세상에 낳아 놓은 제 자식을 함부로 다치게 해선 안 된다는 걸 못 배운 인간인 것이다. 그는 과연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죽을 수나 있을 것인가. 폭행과 방임은 결코 살인에서 멀지 않다.

두 해 전 이맘때 스스로 배기관을 타고 친부와 계모의 학대를 피해 탈출했던 열한 살 어린이도 있었다. 아이는 근처 편의점으로 도망가서 허기를 못 견뎌서 먹을 걸 훔치다가 경찰에 인계되어서 비로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이는 친부와 계모에게서 먹을 걸 얻어먹지 못해서 네 살 정도의 체격 밖에 되질 않았었다. 둘은 피자를 시켜 먹고 아이에겐 끄트머리 빵만 겨우 몇 개 던져 주며 애가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아이를 방치했다는 기사를 읽고 울분을 터뜨렸는데, 고준희 어린이의 사고를 접하고 나니 그나마 때리고 짓밟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다.

괴롭게도 동화 속에서, 기사 속에서, 우리는 비정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어떤 부모는 남보다 못하고, 심지어 짐승만도 못한 작자들도 있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제 자식을 버리는 인간들도 있고, 때려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인간들도 있다.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느라 친부와 계모의 학대 사건을 주로 이야기했지만, 친모와 계부의 학대도, 심지어 친부와 친모의 학대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들로부터 가엾은 어린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온 마을이, 사회가 함께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온정의 눈길을 쏟아야 한다. 적어도 어린이에게 보이는 관심만은 오지랖이라고 면박 주는 일도 없어야 한다. 부모가 키우는데 걱정할 것 없지 하고 넘기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사회적 제도를 구축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제도적인 면에서는 어리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부모들이 경제적인 이유나 심리적인 이유로 무너지지 않도록,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도록 사회적인 도움을 줘야만 한다. 이번에 어린 자녀 셋을 두고 술 마시고 들어 왔다가 담뱃불로 집에 불을 내버리고 만 스물한 살 엄마는 이혼을 겪고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했을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가 그녀의 육아나 경제 활동을 조금이라도 지원해 줄 수 있었더라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진 않았을 텐데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사고였다.

이 세상에 온 생명은 하나 같이 소중하다. 우리는 다 함께 그 생명을 지킬 인간적 의무가 있다. 아동학대는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우리가 의식을 기르고 제도를 정비하여 앞으로 이런 슬픈 아동학대에 관한 뉴스를 접할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각성할 수 있다면, 어린 나이에 짧은 생을 안타깝게 마쳐야만 했던 준희와 젊은 엄마의 세 자녀들에게 조금이나마 면목이 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어린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으로 평안과 명복을 빈다.


태그:#아동학대, #헨젤과 그레텔, #고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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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가, 임학박사, 연구직 공무원, 애기엄마. 쓴 책에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사랑, 마음을 내려 놓다>. 연구 분야는 그린 마케팅 및 합법목재 교역촉진제도 연구. 최근 관심 분야는 환경 정의와 생태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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