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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지붕이 매력적이다.
▲ 아트 뮤지엄에서 내려 다 본 오후스 시내 붉은 지붕이 매력적이다.
ⓒ 이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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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오후스에 다녀왔다. 오후스는 덴마크에서 코펜하겐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대도시 명성에 걸맞지 않게 굉장히 조그맣고 오밀조밀한 도시. 지나가는 사람의 90프로가 투어리스트였던 광란의 런던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 곳의 분위기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조심스럽고, 진지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덴마크 하면 떠올리는 것들 중 하나가 동물과의 합법적인 성관계이다. 이 제도는 안그래도 성적으로 너무나 개방적이라고 알려진 유럽대륙을 아예 타락한 곳이라고 알려지게 만든 결정적 마침표였다. 물론 유럽이 성적으로 개방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개방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먼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에 비해" 성적으로 개방적이다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결국 "개방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았을때 그들이 "개방적으로 보여지는 것"이고, 우리가 그들의 행동을 개방적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가 성적으로 얼마나 음지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판이 되는 것이다.

실로 우리와 그들은 성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르다. 우리는 한없는 음지에서 성을 대한다. 그것은 마치 범죄라도 되는 것처럼 비밀스럽게 이루어지고 그 누구도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특히 집이나 학교에서의 성은 그 단어의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아무도 꺼내지 않는다.

조선시대부터 그것은 이미 암묵적 금기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성은 생활이다. 우리가 밥을 먹고 친구들을 만나고 저녁엔 잠을 자는 것 처럼 유럽은 성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누어 그것을 양지로 끌어올렸고 또 이것을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개방적으로 보이는 성문화"가 자리잡힌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서 밥을 먹고 싶으면 다가가서 말을 하고 밥을 먹는다. 이것이 타락해보이거나 개방적인 성관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우리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자는 얼굴을 드러내서도 남자 없이는 밖을 나가서는 안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해온 어느 중동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아무하고나 개방적인 성관계를 맺는 사람들로 보여진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인가? 우리는 아주 얌전한 사람들이고, 성을 고귀하게 생각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대하는 사람들이지 그들이 생각하는 영락없는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들이 아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적인 타락과 개방적인 성관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당당히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 할 수 있는 가치관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동물과의 합법적인 성관계"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덴마크는 왜 동물과의 성관계를 합법으로 지정했을까?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동물학대를 이유로 이 법은 폐지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덴마크 사람들은 동물과의 성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성적으로 타락한 게 틀림없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답은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덴마크인들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의 나라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한민국에 휘게 열풍이 일고 있다. 하지만 휘게는 표면에 보여지는 행동들에 불과하고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의 행복밑에 진실로 깔려져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중"이다. 존중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존중과 존경의 뜻을 애매모호하게 섞어 쓸 때도 있고 혹자는 사전적 의미로만 혹은 자신만의 정의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사실은 우리가 존중이 무엇인지 받아본 적도 줘본 적도 없기 때문이라는것을 아는가?

대한민국은 존중이 결여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경쟁 속에서 비교당하며 자란다. 옆집 철수와 비교당하고, 옆집 철수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집에서 제대로 된 대접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옆집 철수를 이기지 못한 영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로 죄인이 되어버렸다. 영희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죽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누군가의 기대속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만이 남아있다. 어려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 연애할때는 애인, 결혼해서는 배우자의 부모님까지... 이런 인생에서 영희는 언제쯤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영희는 자신을 찾겠다고 몇 번 여행을 떠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다람쥐 쳇바퀴같은 생활을 하다가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이게 영희만의 이야기일까? 우리 주변의 모든 도형들은 원이 되기 위해 자신들을 깎아내야만 한다. 네모는 자신의 모서리들을 원망한다. 나는 왜 이렇게 모났냐면서 자신의 멋진 각들을 다 깎아낸다. 별은 모난 구석이 더 많다. 게다가 모서리를 깎아내니 이번에는 부족한 면이 보인다. 별은 자신은 왜 이렇냐며 한탄만 하고 있다.

이게 우리 대부분의 마음속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를 암묵적으로 강요당해 왔다. 하지만 덴마크의 네모와 별들은 조금 달랐다.덴마크의 네모들은 상자가 되어 누군가에게 기쁨의 선물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덴마크의 별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꼭대기에 앉아 환하게 자기 자신을 빛내고 있었다. 모든 도형들은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그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인정받은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존중받는 사회인 것이다.  

개성을 버리고 모두가 하나로 공명하길 바라는 사회, 항상 누군가의 기대속에서 그것에 자신을 맞춰 사는 것이 미덕인 사회, 자기 자신은 철저하게 버리고 희생하는 것만을 찬양하는 사회에서 존중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존중은 상대가 진실로 그 자신이 될 수 있게 그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아 주고 인정해주는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대에 맞추어 상대가 행동해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옆집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그를 이겨야 네가 잘 되는 길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도, 너도 도, 우리 모두 개성을 버리고 다 도가 되어야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레,미,파,솔,라,시 모두를 그대로 인정해 주고, 진정한 하나됨은 서로 다른 음이 모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너의 행복이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 그들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휘게 라이프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초콜릿을 더 많이 먹고, 집의 조명을 따뜻하게 바꾸고 화롯불 앞에 앉아 있는 게 행복을 만드는것이 아니다.

덴마크는 모든 인간이 그 존재로서 인정 받기를 바라는 나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슬림도, 소수민족들도, 게이들도, 심지어는 동물들과의 성관계에 다른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을 수 있는 핸디캡을 갖은 사람들 까지도 모두 수용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동물들과의 합법적인 성관계 제도는 비록 금방 폐지가 되긴 했지만 그것은 음지에 있을 법한 모든 사람들을 최대한 양지로 끌어내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이 만든 결과였다. 여기에 진정한 인권과 존중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덴마크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말로 엄청난 수준의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포용력은 포용을 받아 본 사람들만이 베풀어 줄 수 있는 수준이였다. 몰아치는 휘게 열풍은 우리 사회에 개인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진정한 휘게는 (문화를 팔아 돈을 버는 상업적인) 책에나 나오는 그들이 먹는 음식, 그들이 쓰는 조명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그들이 삶을 사는 자세에서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것, 욕심 대로가 아닌, 가지고 싶은 대로가 아닌, 벌거벗어 아무것도 아닌 상대를 그대로 포용하고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 이제 우리 사회가 발전해 나가야 하는 방향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태그:#휘게, #덴마크, #오후스,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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