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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춘양면에 있는 만산고택을 찾았을 때, 이 집 종손과 바래미마을 남호구택 종손, 거촌마을 수온당고택 종손이 마루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전날 만난 수온당 종손을 이 집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 놀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물으니, 마음이 맞는 종손끼리 이따금 만나 종가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자 많기로 소문난 봉화다. 시대에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이 마을 저 마을 정자에 모여 교유(交遊)했다. 봉화에서 교유하기 좋기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정자가 바로 도암정이다. 봉화읍 거촌2리 황전마을에 있다. 

1650년 황파 김종걸이 지은 정자. 많은 이들과 교류하며 글 읽고 수양한 정자다.
▲ 도암정 정경 1650년 황파 김종걸이 지은 정자. 많은 이들과 교류하며 글 읽고 수양한 정자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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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헌고택 안쪽 언덕에서 바라본 마을 정경. 영양남씨 마을이었으나 황파의 조부가 이 마을에 장가들면서 서서히 의성김씨 마을로 바뀌어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 황전마을 정경 경암헌고택 안쪽 언덕에서 바라본 마을 정경. 영양남씨 마을이었으나 황파의 조부가 이 마을에 장가들면서 서서히 의성김씨 마을로 바뀌어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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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정은 1650년, 황파 김종걸(1628-1708)이 지었다. 실제로 황파는 도암정에서 바래미마을 김성구(1641년생), 닭실마을 권두인(1643년생)과 권두경(1654년생), 구애 이완(1651년생), 눌은 이광정(1674년생)과 나이와 문중을 넘어 교유하였다. 지금 300년 세월을 거슬러 도암정에 모여 시 짓고 즐기는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황전마을로 가고 있다.

황전마을 도암정

산들이 감돌고 냇물이 고요히 흐르는 풍요로운 마을이다. 앞산에 몰려온 황학(黃鶴) 떼가 마을 밭에 자주 내려와 황전(黃田)이라 했단다. 도암정(陶巖亭) 삼면은 담으로 두르고 앞만 터놓았다. 앞에는 직사각형 연못과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어 놓았다. 

정자 옆에는 항아리 모양의 독바위가 우뚝 서 있다. 질그릇 '도(陶)'를 쓰는 걸 보니, 도암정 이름도 이 바위에서 나온 모양이다. 300년 묵은 느티나무는 노랗게 물들고 독바위는 햇살 따라 농도를 달리한다. 연못 물색에 물든 도암정의 오묘한 색감은 이들이 꾸며낸 조화(造化)다.

노란 느티나무와 진회색 항아리바위가 서로 주고받아 드러난 색감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 독바위와 느티나무 노란 느티나무와 진회색 항아리바위가 서로 주고받아 드러난 색감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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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하나하나에 주인의 생각을 담아 이름을 붙였다. 정자 곁에 있는 바위는 사다리바위, 제암(梯巖), 병풍바위 병암(屛巖), 숨은바위 은암(隱巖)이라 했고 나머지 바위들도 꼼꼼하게 귀암(龜巖), 인암(印巖), 반석(盤石), 탁영암(濯纓巖)이라 지었다.

황파는 부모님이 원했던 등제는 못했지만 학문이 뛰어나고 효심이 지극하기로 팔도에 소문난 선비였다. 부모님이 병이 들었을 때 하룻밤 백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고 단을 쌓아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세상에 나아갈 뜻을 접고 향촌에 눌러앉아 벗과 시영(詩詠)하고 세상을 논하며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황파의 마음을 도암정 현판에 담았다.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물속에서) 튀어 오른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만물은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것, 억지로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도암정은 되돈고래 방으로 굴뚝과 아궁이가 같은 방향에 있다. 내 마음은  정자 뒤에서 아궁이-굴뚝-아궁이-굴뚝, 리듬을 타고 있다.
▲ 도암정 굴뚝 도암정은 되돈고래 방으로 굴뚝과 아궁이가 같은 방향에 있다. 내 마음은 정자 뒤에서 아궁이-굴뚝-아궁이-굴뚝, 리듬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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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정 방은 두 개로, 굴뚝과 아궁이 모두 정자 뒤에 있다. 까무잡잡한 섬돌이 가운데 있고 양쪽에 아궁이와 굴뚝이 한 쌍씩 몰려있다. "어느 게 굴뚝이고 어느 게 아궁이지?" 언뜻 봐서는 분간이 안 된다. 연기가 구들장을 덥히고 아궁이 쪽으로 되돌아 나오는 되돈고래여서 그렇게 보인 것이다.

경암헌 고택

도암정은 별서 터에 있고 집은 마을 안에 따로 있다. 경암헌고택이다. 고택 주인은 원래 영양남씨 남구수였으나 황파의 조부, 김흠이 꿩사냥 나갔다가 이 집 규수를 보고 청혼한 끝에 남구수의 사위가 되면서 의성김씨 집으로 바뀌었다. 그 후 영양남씨는 마을을 하나둘 떠나, 20년도 안 돼 의성김씨의 마을이 되었다.

160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사랑채 가운데 두 개의 기둥을 좁게 하여 ‘누은재’ 편액을 단 것이 독특하다.
▲ 경암헌고택 160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사랑채 가운데 두 개의 기둥을 좁게 하여 ‘누은재’ 편액을 단 것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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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은재 편액과 어울리는 키 작은 굴뚝이다. 암키와로 무늬를 내고 황토 칠을 하여 벽 색깔과 맞추었다.
▲ 경암헌고택 굴뚝 누은재 편액과 어울리는 키 작은 굴뚝이다. 암키와로 무늬를 내고 황토 칠을 하여 벽 색깔과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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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 '누은재(陋隱齋)' 편액이 눈에 띄었다. '누은'의 뜻이 누추하고 숨어 살기 좋은 집이라는 뜻 아니던가. 황파의 뜻이 담긴 편액이다. 누은재에 어울리는 굴뚝은 처마 밑에 무심히 서 있다. 암키와로 모양을 내고 마땅치 않았는지 황토 칠을 하여 안채 벽 색깔과 맞추었다. 

마을을 나오는데 '효는 백행의 근본, 경상북도 효시범마을'이라 새긴 돌비석이 보였다. 황파의 효심은 세대를 이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300년 후대 사람으로, 효와 인간의 근본에 대해 고민한 다른 한 분을 만나러 가본다. 안동권씨 권헌조(1930-2010) 할아버지다. 황전마을에서 약 5리 떨어진 송석헌고택에 살던 분이다.

송석헌고택과 권헌조옹

송석헌고택은 봉화읍 석평리 선돌마을에 있다. 선생은 고택에서 일생을 보냈다. 평생 양복 한번 안 입고 한복만 고집한 봉화 마지막 선비로 불렸다. 변하는 세태를 거부하고 스스로 과거에 물러나 앉았다. 자신은 그대로나 세태가 변하여 과거에 머문 사람으로 비쳤는지 모른다. 

송석헌고택 언덕에서 내려다본 고택과 마을
▲ 선돌마을 정경 송석헌고택 언덕에서 내려다본 고택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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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의 석축과 석축 위의 정침과 사랑채, 이층누각인 영풍루, 솟을대문이 사방을 막고 있어 마당은 아늑하다.
▲ 송석헌고택 정경 두 단의 석축과 석축 위의 정침과 사랑채, 이층누각인 영풍루, 솟을대문이 사방을 막고 있어 마당은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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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살아생전 방안에 문안하듯 끼니마다 한복을 입고 집 뒤에 있는 산소에 문안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길이 되어 반질거렸다. 그의 길은 일상이요, 일생이었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글귀는 한낱 글자에 불과할 뿐 그에게는 의미 없는 한 구절이었다. 인간의 도리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여 행한 것이 그에게는 효였다. 

대문 앞 굴뚝을 보았다. 플라스틱 연통을 널로 감싼 널굴뚝이다.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고 한복만을 고집한 분으로 플라스틱은 '양복'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널굴뚝은 양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보였다.

플라스틱 연통부분을 널로 덮어 널굴뚝처럼 보인다.
▲ 송석헌고택 대문채 굴뚝 플라스틱 연통부분을 널로 덮어 널굴뚝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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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송석헌에 들었다. 바람을 맞는다는 이층누각, 영풍루(迎風樓)가 맞아주었다. 예전에는 묵향을 풍기며 드나든 묵객을 맞이한 누각이었다. 이제 바람에 실려 왔다가 바람결에 사라지는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비록 뜨내기로 왔어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라 영풍루 난간을 붙잡고 연을 맺어볼까 한다.  

연을 맺을 짝은 굴뚝. 중문채 마루 밑에 겸손하게 숨었다. 암키와로 만든 눈과 수키와로 만든 콧구멍을 모두 열고 하염없이 기다리건만 아무도 찾지 않는 듯 시무룩하다. 그래도 묵묵히 기다리는 것은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겠지. 나와 굴뚝 관계처럼 말이다. 

마루 밑에서 누가 오나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몸체는 암키와로 무늬를 냈고 암키와와 수키와로 연기구멍을 두 개 만들었다.
▲ 송석헌고택 중문채 굴뚝 마루 밑에서 누가 오나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몸체는 암키와로 무늬를 냈고 암키와와 수키와로 연기구멍을 두 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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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굴뚝이라 길게 만들었다. 여성을 위한 배려겠지. 대문채와 달리 널로 덮지 않았다.
▲ 송석헌고택 안채 굴뚝 안채굴뚝이라 길게 만들었다. 여성을 위한 배려겠지. 대문채와 달리 널로 덮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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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매일 올라 산소로 가는 언덕길을 더듬었다. 허리가 절로 굽어지는 가파른 길이다. 하늘로 치솟은 안채 굴뚝, 널빤지로 감추려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일상이 담긴 인생길이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어도 반질거리는 게 햇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 송석헌고택 언덕길 할아버지의 일상이 담긴 인생길이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어도 반질거리는 게 햇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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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시공간을 넘어 두 양반을 만났다. 한분은 세상에서 물러나 앉고 한분은 과거로 물러나 앉았다. 아웃사이더로 보이지만 주류사회에 편입되려고 매일 발버둥 치는 대도시 소시민의 비뚤어진 눈으로 본 편견일지 모른다. 송석헌 언덕길을 다시 보았다. 권헌조옹이 도(道)를 닦듯, 발로 닦은 인생길이다. 그 길을 추억해주는 나그네 하나라도 있으니 잘 산 인생 아니겠는가? 


태그:#황전마을, #도암정, #선돌마을, #송석헌고택,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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