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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가까운 대학교 도서관에서 신간 5권을 빌린다. 그곳엔 여러 부문의 책들이 고루 있어 새로운 경향이나 낯선 저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빌린 <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적>은 에세이다. 평소 수필은 거의 집지 않는다. 보편성보다 개인적 감흥이 많아 푹 빠져 읽는 재미가 적어서다. 그런데 딱히 마음에 드는 1권이 부족해서 '지하철용' 셈 치고 들었다. 그리고는 두꺼운 역사철학서에 취해 잊고 있었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적>
 <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적>
ⓒ 청림Life(청림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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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예정일 문자가 왔다. 이 책은 예약된 책이라 연장이 안 되었다. '뭐, 이런 책을 다 예약해' 하며 후딱 해치우려고 들춰 봤다. 근데 술술 넘어갔다. 더군다나 젊은이들에게 유익한 진솔한 경험담이 빼곡했다.

읽는 이 누구와도 통할 말랑말랑한 정신은 상처를 드러내는 데도 당당했다. 성공담투성이지만, 옆에 지은이가 있으면 손잡고플 만큼 애쓴 인생이었다. 다른 독자들을 위해 어서 반납하자 맘먹었다.

책은 3장 구성이다. 지은이의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삶이 세 주제에 묶여 있다. 제1장 DREAM(내 마음 속에 별 하나), 제2장 LOVE(같은 하늘 아래 우리), 제3장 HOPE(함께 찾는 행복의 여정) 등이다.

각 장은 17개, 21개, 9개의 꼭지들이 있다. 매 꼭지마다 경험에서 영근 결어가 공감적 이해를 끌어낸다. 자신의 일상을 읽기 좋을 만큼 정제해 까발린 이 수작들이 죄다 블로그 태생이라니 놀랍다.

제1장은 어학연수와 한국어교사 경험이 중심이다. 지은이는 물가, 안전, 인종차별, 다국적 유학생 등을 따져 영어연수차 캐나다를 향한다. 거기까지 가서 한국인들과 시간 보내고 싶지 않아 다른 국적의 친구들과만 열정적으로 교류한다. 그 배짱부림 덕에 "영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서툰 그 도구를 가지고 관계를 만들었고, 그 관계를 통해 매일 찾아오는 24시간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배웠다"는 결과를 얻는다.

지은이가 제2외국어를 스페인어로 정한 건, 현지인처럼 구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고작 스물다섯"에 남들은 험지라 기피하는 멕시코에서 세레명 '아나스타샤'로 불리며 스페인어를 습득한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책임 있게 처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멕시칸들을 겪으며 객관적 이해도가 높아져 다음 행선지에서 만난 페루아노들의 귀차니즘을 웃으며 대한다. 두 국민성에서 라티노다운 긍정의 힘을 발견하고 자기화하는 지은이의 삶 풍경이 다채롭다.

페루에서 지은이는 한국어 선생님으로 지낸다. 한국행 교환학생 제자 뻬드로의 일화는 "꿈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달리면 된다"에 힘을 실어준다. 그녀의 부단한 제자 사랑은 "나에게 언제나 5월의 봄날일" 중학교 선생님과의 지속적 만남과 닮아 있다. 그렇게 성숙한 관계를 일구면서도, "계산 없이 미쳐" 대학원 수업까지 빼먹고 2002년 여름 월드컵 4강까지의 준결승전을 지켜보는 축돌이(녀)가 되기도 하고, "망할 사랑"의 "큰 실수"를 곱씹기도 한다.

제2장은 혼밥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풍경들이다. 남편인 마이클과의 연애와 결혼, 국제결혼에도 있는 시월드, 준비된 부모는 없음을 일깨운 육아의 고충 등을 솔직하게 쏟아낸다. 특히 국제결혼을 하려는 젊은이라면,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국제결혼의 양날, 그 불편한 진실"을 토로한 여섯 사항에 대해 솔깃할 수 있다. 그러다 "상대의 다름을 신기함으로,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지은이의 열린 마음과 배턴터치할 수도 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를 때가 있다. 지은이 또한 결혼생활을 통해 예상 못한 국면들에 직면해 당황하고 허둥대던 일들을 쏟아낸다. 그러기에 "삶이 언제나 내가 원하는 플랜 A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플랜 B와 C를 미리 준비해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조언이 실감난다. 또한 결혼적령기나 양육태도 등에 대해 말만 앞세운 타인들의 견해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쓰잘머리 없는 언어적 폭력에 불과하다는 데 맞장구치게도 된다.

머리가 굵어진 자식 입장에서 때로 부모만큼 말이 안 통하는 상대도 드물다. 많은 부모들이 그랬겠지만, 지은이는 아들 노아를 키우며 인간적으로 많이 성장한다. 그러다가 아들에 대한 배려나 애씀이 어쨌거나 아들에게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아이가 우리에게 받은 사랑과 정서로, 세상 살아가면서 스스로 채워나갈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이에게 꽉 찬 우리 부부의 사랑을 최고의 선물로 주고 싶다"는 그녀와 대화 못 하겠다고 돌아설 일이 아들 노아에게는 없을 것 같다.

제3장은 마흔이 되어 글작가가 된 소회, 아픔을 재해석하며 알게 된 인생의 황금기, 새 거주지로 옮긴 사연 등 연륜이 묻어나는 최근의 속내들이다. 뒤를 돌아보니, 그때그때의 결정이나 사건이 따로 있지 않고 지금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와 닿는다. 과거와 동떨어진 현재가 없듯, 미래 역시 지금의 삶에서 비롯될 것임을 알기에 그렇다. 그래서 덩달아 어느 순간이나 대수롭다는 걸 명심하고, 오늘 맞은 하루를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듯 여기며 최선의 모습으로 살자 맘먹는다.

문학전공자인 지은이는 문학을 포기했다가 블로그 활동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대학원에서 가까이한 문학인들의 편견과 부정적 언행을 떨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타인지향의 세태에서 그녀의 마음에 멍울을 만드는 또 하나의 부당함은 인종차별이다. 혼혈인 아들에게 향하는 관심과 시선은, "최악의 인종차별을 경험한 곳은 미국도 캐나다도 유럽도 중남미도 아닌 바로 내 나라 한국"이라는 실토를 하게 한다.

사실 지금 여기의 적폐 청산이 정치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촛불 광장의 성숙한 시민의식은 인종차별 같은 일상적 적폐에도 발휘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일상의 교육열에 기댄 그녀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아이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고, 영어 공부, 제2외국어 공부를 시키는 것보다 세상을 보는 건강한 시선, 사람이 먼저라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 우리 아이들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일상에서 기적 운운은 예상하지 못 한 기쁜 일이나 안 되리라 여겼던 난제해결을 마주한 마음의 환호성이기 쉽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적>은 힘든 국면에서도 낯설게 보려 애쓰며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아 닿은 그런 순간들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개 인간은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경구에 기대며 산다. 더군다나 인간에게는 기회를 운명으로 만들어 일상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마음으로 밑줄 그으며 에세이를 읽기는 처음이다. 지은이가 "희망고문"인 난치병을 다스려 새로운 기적을 이루기 바란다. 아울러 그녀의 초대를 전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누구나 용기가 필요하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진심은 반드시 통하고 그 안에서 함께 치유한다. 이보다 더 힘겨울 수 없었던 그때가 지금은 가장 빛나는 시간이 되었고, 모두의 아픔은 언젠가 반드시 재해석되리라 믿는다. 당신의 아름다웠던 인생의 황금기를 마주 앉아 듣고 싶다. 그 시간으로 우리는 분명 더 괜찮아질 것이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적 - ANA WITH YOU

박나경 지음, 청림Life(2017)


태그:#일상이라는 이름의 기적, #박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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