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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다 말고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농담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방금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백미랑 현미랑 아예 다른 종자라는 말이지?"
"당연하지. 네가 농사를 안 지어봐서 모르는 거야."

현미밥
 현미밥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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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농사짓는 모습을 봐왔다. 농번기엔 일을 돕느라 집에서 숙제도 못 했단다. 언젠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편이 이 말을 했을 때, 시부모님과 형제들은 펄쩍 뛰었다. 일하는 시늉만 하다가 도망가기 바빴다는 목격담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실 남편은 농사일 대신 뱀이나 지네, 개구리를 잡아 땅꾼에게 팔기 바빴다. 어쨌든 뱀을 잡으려면 논밭으로 나가야 했을 테니 당연히 벼가 자라는 것도 봤을 것이다.

나도 시골에서 자랐지만 집에서 농사를 짓진 않았다. 농사일도 해본 적 없다. 그래도 백미와 현미를 모르진 않는다. 스물다섯 살부터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현미밥을 손수 지어 먹고 살았으니까.

현미는 벼에서 왕겨라고 부르는 겉껍질만 슬쩍 벗겨낸 것이다. 현미에는 속껍질인 쌀겨와 쌀눈이 붙어 있어 밥을 했을 때 깔깔한 느낌이 난다. 현미밥을 먹고 싶지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쌀겨를 절반만 벗긴 오분도미, 조금 더 벗겨낸 칠분도미도 나왔다. 쌀겨를 거의 다 제거한 것이 백미다. 쌀겨에는 섬유질과 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 좋은 영양 성분이 가득하다. 변비도 없어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성인병도 예방한다기에 나는 곧장 현미밥을 먹기 시작했다. 워낙 먹성이 좋고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내겐 밥을 바꾼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결혼을 한 후였다. 별생각 없이 현미로 밥을 했다. 생전 처음 현미밥을 맛본 남편은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맛이 없어. 못 먹겠어."

헉, 나는 맛만 좋구먼. 현미와 백미가 같은 벼에서 나온 건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이런 와중에 나온 것이다. 남편은 그 둘은 뿌리부터 아예 다른 식물이라 했다. 어이가 없어 바로 핸드폰 검색을 해 남편에게 들이밀었다.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이나 읽는 남편에게 말했다.

"농사일 안 돕고 뺀질거린 티가 나는구먼!"

다음부터 남편은 밥솥 한가운데 선을 긋듯 백미와 불린 현미를 최대한 섞이지 않게 나눠 넣었다. 남편은 현미가 조금 섞인 백미 밥을, 나는 백미가 섞인 현미밥을 먹게 됐다.

그러던 남편이 얼마 전부터 현미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맛은 없지만 건강을 생각해 먹는단다. 이제 밥을 번거롭게 나눠서 할 필요가 없다. 때마침 어머님이 햅쌀이 나왔다며 전화를 하셨다. 4년 만에 처음으로 백미 대신 현미로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며칠 뒤 20킬로그램짜리 무거운 자루 하나가 집에 도착했다. 열어보니, 맙소사! 그 안에 찰흑미와 녹미(껍질이 녹색인 쌀)가 가득 들어있었다.

남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엄마도 나랑 똑같아."
"뭐가?"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쌀은 무조건 백미라니까."
"설마, 쌀농사만 몇십 년을 지으신 분이…"

남편 말이 맞았다. 어머님은 "그게 현미"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현미처럼 속껍질을 벗기지 않은 건 맞지만 흑미와 녹미를 현미라 부르진 않는다. 어머님 목소리가 너무 단호하고 분명해서 그냥 "잘 먹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든 농사짓는 분들로 확대할 순 없지만, 적어도 어머님이 사시는 동네에선 흑미와 녹미를 현미라 부르는 듯하다. 농사일을 주로 하시는 분들이 현미를 모른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나는 건강을 위해 현미를 선택했다. 그런데 평생 땅에서 난 것을 먹고 몸을 쓰는 건강한 노동을 하며 살아온 분들에게 유기농이니 현미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건 오염물질 가득한 도시에서 첨가물 잔뜩 든 음식을 먹고 살며 온갖 면역질환에 시달려온 나 같은 사람한테나 유용한 거였다. 어머님이 현미를 모르시는 건, 어머님의 삶 테두리 안에서는 그런 걸 굳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매번 흑미와 녹미를 20킬로그램이나 받을 순 없다. 두 식구가 밥에 섞어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다. 다음번 시골에 내려가면 현미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려볼까 싶다. 언젠가 시골에서 올라올 '진짜 현미'를 기다리며 보내주신 쌀 열심히, 감사히 먹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현미, #현미밥, #단짠단짠그림요리, #요리에세이,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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