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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않은 길
 가지 않은 길
ⓒ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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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축령산은 서울 근교의 산에 비하면 참 조용한 산이다. 어느 해 저무는 가을날, 아침 일찍 배낭을 메고 혼자서 터벅터벅 산을 올랐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고, 굽이굽이 산길에 떨어진 나뭇잎 위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만추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흰머리가 늘어가면서 서리 내린 가을 풍경을 보는 감회는 복잡미묘하다. 내 인생의 계절도 조락하는 가을날의 어디쯤을 걷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탈길을 오르는데 뿌연 안개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녀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축령산 자연휴양림 펜션에서 하룻밤 묵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산책하는 것을 전에도 여러 번 보았었다.

조금 더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한 길은 임도를 따라 빙 돌아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가로질러 올라가 임도와 만나게 되어 있다.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때 남자가 시를 낭송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었다. 나도 참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인데,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낭송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나는 방해가 될까 봐 걸음을 멈추고 시 낭송을 들었다.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 낭송이 끝난 후 나는 '짝짝짝' 박수를 보내고서 말했다.

"참 멋지십니다. 시 낭송하는 솜씨가 일품이네요. 목소리도 좋고, 또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들으니 무척 감회가 새롭습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조금 머쓱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원래 시는 문자 이전에 암송으로 전해졌다. 저 유명한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도 트로이전쟁 이야기를 하프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읊어준 것이었다. 시란 낭송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기교에 따라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하고 노래가 되기도 한다. 똑같은 노래라도 가수의 창법과 감정에 따라 노래의 느낌이 다르듯이 시 낭송 역시 그렇다. 그 남자의 낭송은 운율을 고려해서 살짝 끊었다 읽는 기교가 능숙했다.

남자가 낭송한 시는 피천득 선생님의 번역이었다. 피천득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어느 날 수필가 김진식 선생님의 사무실을 방문하니 그곳에 계셨다.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을 감명 깊게 읽었기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존경하는 분을 마주 보고 앉으니 가슴이 콩콩 뛰었다.

작가를 만나는 것은 출판 편집자의 중요한 업무이다. 작가를 만나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작품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만날 약속을 정하면 미리 그 사람의 작품을 훑어보면서 할 말을 준비한다. 시인을 만날 때는 시 한 수 정도는 외운다.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시 몇 줄을 읊으면 표정이 사뭇 달라진다. 다른 장르의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작품 중의 인상적인 부분에 대하여 말하면 대화가 한결 원활해진다.

수필집 <인연>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와 직접 만나면서 교류했던 내용이 실려 있다. 그중 "당신의 시 중에는 동양 묵화와 같은 경지를 가진 것들이 있고, 한시의 품격을 지닌 것들이 많습니다. '프로스트는 프로스트(frost, 서리)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의 시는 화려하지 않고 그윽하며 어슴푸레한 데가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에 밑줄을 치면서 나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를 생각했었다.

시를 잘 이해하려면 그 시인의 생애를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전쟁통에 자식이 굶어 죽는 비참함을 겪는 등의 몹시 신산한 인생을 살았던 두보는 집도 절도 없이 방랑하다 60세도 못 되어 객사했다. 그런 불우했던 환경이 그의 시 속에 녹아들어 있다. 잔잔한 슬픔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따뜻한 정, 회한, 과장이 없는 비유와 선명하고 사실적인 표현이 두보 시의 여운이다.

농부 시인, 자연 시인 등 여러 가지 별칭으로 불리는 프로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인이다. 남들은 한 번도 받기 힘든 퓰리처상을 무려 네 번이나 수상했다. 하지만 평생 우울한 삶을 살았다. 11세 때 아버지를 결핵으로, 26세 때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고 여동생을 정신병원에 보내야만 했다. 또한, 자신과 어머니, 아내와 딸 모두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인생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그가 시인으로 명성을 얻자 여러 명문대학에서 교수로 모셔가려고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는 안정되고 편안한 길을 거부했다. 글 쓰고 강연하는 일로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면서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프로스트의 시들은 까다롭거나 난해하지 않다. 어떤 시도 문체가 평이하여 쉽게 읽힌다. 그러나 내포하는 의미는 무척이나 깊다. 삶에서 건져 올린 깊은 철학적 사유와 성찰이 서릿발처럼 폐부를 찌른다. 내가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접한 것은 청소년 때였다. 시험에 나올 것 같아서 달달 외우기는 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40대 이후 인생을 돌아볼 나이가 되었을 때 느낌이 절절해졌다. 나도 같은 경험을 했었고,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크게 공감이 되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소박한 전원의 정서를 인생의 문제로 승화시킨 서정시이다. 외면적으로는 자연 풍광인 숲속의 길을 단순하게 노래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인생에서 걸어온 길에 대한 성찰과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갈파했다. 태어나서(Birth)과 죽을 때(Death)까지 선택(Choice)의 연속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 말처럼 인생은 크고 작은 숱한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을 한다. 어떤 옷을 입을지,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직업이나 배우자를 선택하고, 심하면 사느냐 죽느냐까지도 선택하고 결정한다.

인생의 중차대한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어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고뇌와 인간적 한계가 생겨난다. 어느 길이 좋은지는 모르기 때문에 갈등한다. 하나의 선택은 다른 하나의 포기를 의미한다. 매번 좋은 결과를 부르는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잘못된 선택이나 행동으로 후회할 때도 적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도 수많은 가지 않은 길이 있다. 그중 '그때 그 길을 택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일도 몇 번 있다.

1990년대 중반은 유난히 대형사고가 잦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그 날 밤에 서근석 교수를 만났다. 그는 '풀잎'이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상당한 재력가였던 서 교수는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출판사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전적으로 밀어줄 테니 월급 사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위인들의 명언과 일화 등을 엮은 <밥>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이고, <재미있는 중용> 등 꾸준히 팔리는 책이 상당수였다. 월평균 매출액과 지출을 따져 보아도 흑자를 내고 있었다. 출판사 사무실과 창고는 서 교수 소유의 건물을 쓰고 있었기에 임대료 부담도 없었다. 그냥 몸만 가면 되기 때문에 내가 손해 볼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출판사 사장이 될 기회였다. 잘 해낼 자신도 있었다. 좋은 기획도 있었고 교류하는 작가도 많았다. 서 교수도 나의 이런 점을 보고서 출판사를 맡겨도 좋을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 사장으로 간다면 책임이 막중한 것은 당연하다. 경영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 이익을 창출하려면 철저하게 장사꾼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글을 쓰는 삶과는 차츰 멀어질 것이다. 고민 끝에 굴러들어온 사장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이따금 그때의 장면들이 기억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 길로 갔다면, 성공했을지 실패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길을 택했었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이다.
 
직장인 대다수가 '파랑새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 직장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참맛을 알 수 없다. 화려하고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한 길이 숱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길일 수도 있고, 울퉁불퉁한 고생길이라고 생각한 그곳에 쏠쏠한 보람과 재미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무릇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법이며, 못 가본 그곳에 파랑새가 살고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행복의 파랑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다.

피천득 선생님을 뵈었을 때 '가지 않은 길' 말고 프로스트의 다른 시 한 수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자작나무'를 말씀하셨다. 시집을 사서 읽어 보니 마음에 와닿았다. 살아오면서 "인생은 꼭 길 없는 숲 같아서"라는 구절을 떠올릴 때가 몇 번 있다. 정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처럼 앞날이 막막하게 생각되던 암울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길을 잃고 헤매던 그때 많은 것을 배웠다.

한때는 곧고 빠른 길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산행을 하더라도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보다는 천천히 이곳저곳 주변을 돌아보면서 갈 수 있는 그런 길을 택하여 걷는다. life라는 단어에는 if가 들어 있다. 이것을 나는 삶 속에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앞으로도 수많은 갈림길을 만날 것이다.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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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