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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선감학원 시찰 모습.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선감학원 시찰 모습.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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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여만에 만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청년 김철화, 그가 초등학교 3학년 중퇴라는 학력으로 어렵사리 구한 일은 신문과 학습지 배달이다. 마흔 곳 넘게 문을 두드린 끝에 구한 직장이었다.

배달을 나가는 그의 손에는 학습지와 함께 늘 책이 들려 있었다. 하얀 종이로 겉표지를 싼 중학교 교과서였다.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공부하기 위해서다. 공부할 시간이 워낙 부족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책이 그의 인생을 색다른 길로 인도하게 된다.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중학교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게 창피스러워 하얀 종이로 포장을 해서 들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학부형들이 저를 재수생으로 오해한 거예요. 어느 날 쌍둥이를 둔 학부모가 자기 아이들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참 난감했어요. 매일 책 들고 다니면서 못 배웠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못 하겠다고 둘러댔는데도, 그 학부모가 '에이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주세요!'하더니 다음 날 초등학교 5학년 된 쌍둥이를 사무실로 보낸 거예요. 정말 난감했어요, 뭘 알아야 가르치죠!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하고는 서점으로 뛰어갔어요."

그가 서점에서 산 것은 참고서다. 그 참고서로 공부하면서 쌍둥이를 가르쳤다. 김철화, 그에게 정말 족집게 강사의 피가 흐르던 것일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과외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성적이 안 오르던 애들이었는데, 10등 하던 애가 반에서 1등을 하고, 30등 하던 아이는 15등 정도를 하는 거예요."

이 소식은 쌍둥이 엄마의 입을 통해서 삽시간에 퍼졌다. 사무실로 책을 들고 찾아오는 아이들 수는 소문이 퍼지는 속도만큼이나 빨리 늘었다. 과외 선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라는 학력이 알려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과외를 그만둘 기회를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학부모들은 발 벗고 나서서 수강생을 모아 주면서까지 그를 붙잡으려 했다. 수강생 수가 불어나 넓은 강의실이 필요해졌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학부모였다.

몇 년만에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꽤 유명한 과외 강사가 됐다. 그의 교실도, 미리 접수하고 기다려야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대학생을 보조 강사로 둘 정도로 규모도 갖췄다. 당연히 돈도 쌓였다. 한 달 수입이 21만 원이나 됐다. 학습지 배달을 21개월이나 해야 만질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었다. 은행 과장 월급이 10만 원 정도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검정고시 본다는 게 소문날까 두려워…

 선감학원 소년들이 입던 옷(선감 역사박물관)
 선감학원 소년들이 입던 옷(선감 역사박물관)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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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외적인 상황만 놓고 보면 이 시기가 인생의 황금기이고 가장 행복한 시절일 것 같은데, 그는 머릿속에는 그렇게 기억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공부를 했어요. 머리가 늘 깨지는 것 같았어요. 누가 묻지는 않았지만, 학벌 문제가 늘 저를 불안하게 했고요. 언젠가는 무엇엔가 홀린 듯 밤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가기도 했어요.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거죠. 그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이 공부하러 올 시간이 된 거예요. 어쩌겠어요, 현실이라는 게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비행기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강의했어요."

학력 때문에 그렇게 불안했는데, 어째서 검정고시를 보지 않았을까?

"아무리 애들 가르치는데 바빴어도, 소문이 날까 두려웠어도 검정고시를 봤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늦은 게 아닌데 그땐 굉장히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으로 사는 사람이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본다는 게 소문날까 두려웠고요. 그러다가 때를 놓친 거죠. 대학도 가고 그랬으면 뛰는 무대도 달랐고 맘고생도 안 했을 텐데, 아쉽죠."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을 해야 할지! 화려하지만 불안한 시간을 끝내준 것은 전두환 쿠데타 정권이다. 전두환 정권이 시행한 과외 금지로 그는 교실을 떠나야 했다. 밥줄이 끊긴 것이다.

그 뒤에 그는 지방을 떠돌며 학습지 영업을 했다. 학습지 구독자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이 일이 연결고리가 돼 그는 경북 영주에서 다시 강단에 서게 된다.

"제가 배달하는 학습지로 공부하는 중학생한테 잠깐 학습 지도를 해 줬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그 애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만 학습 지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그것을 거절하지 못해 다시 강단에 서게 된 거예요. 전교에서 78등 하던 애였는데, 저한테 몇 개월 지도를 받고는 전교 2등으로 점프하는 거예요.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다시 과외 선생님으로 살게 됐어요."

초3 학력 밝혀질까 두려워 강의 실력도 숨겨야!

 선감 나루터, 소년들은 배를타고 이곳에 내려서 선감학원까지 걸었다.
 선감 나루터, 소년들은 배를타고 이곳에 내려서 선감학원까지 걸었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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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자 학원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마흔 살 즈음이었는데, 경북 영주에 있는 00학원이라고, 중학생 전문 학원이었어요. 원장님이 65세 정도 됐었는데 같이 일해 보자고 해서 솔직하게 말했죠, 초3이 학력 전부라고.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자신 있다고 그랬더니 그 원장님이 능력만 있으면 괜찮으니 함께 일해 보자고 손을 잡는 거예요."

그가 가르친 과목은 수학이었다. 그의 강의 실력은 작은 과외 교실보다 50여 명이 앉을 정도로 넓은 학원 강의실에서 더 빛이 났다. 시작할 때 6명이던 학생이 열흘 정도가 지나자 60여 명으로 불어 10명 정도는 서서 강의를 들어야 할 정도로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았다.

"너무 튀면 태클 들어옵니다."

학원 원장이 그에게 한 충고다. 그에게 수강생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강사나 학원 원장이 뒷조사라도 해서 학력이 밝혀내면 큰일이니 더는 아이들이 늘지 않게 하라는 말이었다. 이 충고를 받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원장 하고 내가 수강료를 50%씩 나눠 갖는 구조였는데 튀지 않으면 발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3~4달 고민하다가 그만둔다고 통보해 버렸어요."

"선감학원,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요"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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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학원 강사로 살 기회가 한 번 더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높기만 한 학벌의 벽을 그는 끝내 뛰어넘을 수 없었다.

"성남에 있는 유명한 학원에서 강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용기를 내서 도전한 적이 있어요. 학력은 없지만, 경험은 많다고 했더니 시범강의를 해보라고. 10분 정도 했더니 대번에 손을 잡고 '내일부터 같이 일 좀 합시다' 해서, 그러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 전화해서는 '생각해 보니 자격문제(학력) 때문에 어렵겠다'고. 이렇게 해서 학원과의 인연, 가르치는 일과의 인연이 끝난 거죠."

'학력 때문에 안 된다'는 전화를 받고 그가 어느 정도 아팠을지, 그의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났을지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이라고 비쳤으면, 표정이라도 일그러졌으면 '많이 아팠겠구나!' 느꼈을 텐데, 달관했는지 그는 시종일관 웃는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선감학원에서 '다구리(몰매)' 당하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낼 때도 웃는 얼굴이었고, 대전역 보일러실에서 왕초한테 죽도록 맞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는 얼굴이었다. 일흔 가까운 나이가 되면 저럴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도 그는 선감학원에 끌려가면서 시작된 고통과 그로 인한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선감학원을 제 인생에서 지우고 싶어요. 모든 게 거기부터 시작됐어요. 살기 어려워 비록 구두통을 들었더라도 가족이나 친척들 곁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공부를 했을 거예요. 폭력에 쫓기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그 다음에는 생활에 쫓기다 보니 도저히 미래를 계획할 시간이 없었어요. 공부했더라면, 그리 못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쌍둥이 가르쳤을 때 그 애들 성적이 안 올랐다면, 오히려 형편없이 떨어졌다면, 그게 더 축복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음고생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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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동체부, 경기도 담당. 교육에세이 <날아라 꿈의학교> 저자.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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