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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배치에 반대하며 분신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부인 엄계희씨가 2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며 분신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부인 엄계희씨가 2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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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문재인 대통령님이 사드를 미국 의도대로 하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와 다를 수 있다고 했어요. 대통령이 뜻대로 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이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대화가 마지막 정치적 대화였습니다."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며 분신해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아내 엄계희씨가 고인을 기리며, 입을 열었다. 엄씨는 21일 오전 서울한강성심병원 장례식장에서 "아이 아빠는 평소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문재인 대통령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사드 배치가 결정되고 난 후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라고 했다.

엄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날이 고인이 가장 행복해했던 날"이라며 "사드배치 소식을 듣고는 '왜 첫판부터 밀리지'라며 안타까워했다"라고 밝혔다. 고인을 '통일을 꿈꾸던 사람'이라고 설명한 엄씨는 "자기가 한 몸 던져서 이 나라에 작지만, 힘이 된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도 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이덕우 변호사는 "고 조영삼씨는 평화라는 큰 강물의 마중물이 된 사람"이라며 "이 마중물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말했다.

고인의 장례는 오는 23일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고 조영삼님 시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청와대 앞에서 영결식을 치른다. 이후 주한 미 대사관 앞과 경북 성주 소성리에서 각각 노제를 지낸다. 장례위원회는 22일 오후 6시까지 시민 장례위원을 모집해 영결식을 준비한다.

다음은 엄계희씨 발언 전문.

사드배치에 반대하며 분신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빈소가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뱡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며 분신 사망한 고 조영삼씨의 빈소가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뱡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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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안 오셨네요.
제 생각에는 정권도 바뀌고 해서 많은 신문사 방송국에서 많이 올 줄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 국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들 우리 아이 아빠가 하고자 했던 것들을 많이 알려지지 않을까 흥분된 기분도 있었어요.

앉고 보니 아이 아빠가 이 자리에 섰다면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아직 멀었구나, 한참을 한참을 가야겠구나' 했을 것 같아요.

조영삼씨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사실 종교에서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만났고 그분의 생각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내가 배우고자 했는데 어쩌면 내가 내 모습을 강요하지 않았나 싶어 어제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해서 살면서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이 아빠가 늘 생각했던 거는 우리나라 통일입니다.
제가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을 때, '여보 나는 통일이야. 그다음에는 세계 통일을 꿈꾼다'고 했었어요. 그러면 저는 '진짜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라고 했습니다. 너무 이상주의라고 생각했는데 절대 이상이 아니고 우리 국민의 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 아빠가 사실 독일에 있으면서도 너무 묻히며 살았고, 억눌림을 안고 살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저는 아이가 어리니 천천히 가자고 했고 아이 아빠도 따라줬습니다. 시골에 들어가 살면서 아이가 18세 이상 되면, 그때 시작하자고 천천히 가자고 했어요. 진짜 평범하게 남이 하지 않은 일 해가면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먼저 (한국에) 들어오고 아이 아빠가 늦게 들어오고 나서 많이 힘들었나 봐요. 남자이기 때문에 가장이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못 해서 그래서 힘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때마다 "여보, 그건 중요하지 않아. 100만 원이든 200만 원이든 맞추어 살면 되는 거야"라고 위로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위로만 했고, 아이 아빠의 가슴이 되어보지 못했던 거 같아요. 지나고 보니 내가 너무 참으라고만 했던 걸까 싶기도 합니다.

아이 아빠는 거실에 있으면 항상 멀리 보고 있어요. 너무 멀리 보길래 저는 "여보 너무 멀리 보지마. 가까이만 봐. 거실에서 발코니만 보라"고 했어요. 아이 아빠가 멀리 보려 했던 걸 내가 멈추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정치 얘기했는데, 박근혜 탄핵이 아이 아빠가 제일 기뻐했던 때였어요. 그 순간이 그랬어요. 너무너무 기뻐서 사람이 푼수가 됐다는 걸 느낄 정도로 기뻐했어요. "이제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됐다"고 했어요. "그래, 여보" 하면서 저는 또 너무 아이 아빠가 기대하지 않을까 흥분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래도 조금 영향을 받는구나, 활력소가 생겨 다행이다 했는데, 오래 가지 않았어요.

사드 배치 문제가 터지니까 다시 아이 아빠가 먼 산을 더 먼 산을 보고 있더라고요. "아니야, 아니야 이러면 안 되는데, 첫판부터 밀리면 안 되는데, 왜 밀리지"라고 하면서요. 아이 아빠가 "내가 너무 좋아했고 사랑하는 분들"이라고 했어요. 노 대통령님, 문 대통령님 너무 사랑했던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사드 서명했냐고, 저한테 묻더라고요.

사실 지금 저는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밀양이라는 곳이 도시라 들어갔는데, 가보니 시골이더라고요. 그래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노동자로 살면서 아이와 남편과 살았죠. 여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이 아빠가 "우리가 겨레하나 회원인데, (사드 반대) 서명했어?"라고 물어서 제가 "내가 바빠서 들어갈 시간이 없었네, 미안해" 했거든요. 그래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당신은 했냐"라고 되물었더니 했다고 하고요. 사드 반대 서명에 그 옆에 자기 이름이 나오니까 그걸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러면서 "우리 국민이 미국에 우리가 살아있고 목소리가 있다고 문 대통령님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라고 했어요. 경고를 해야 한다면서, 한 사람 한 사람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고 서명해서 힘을 보태줘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당연히 해야지. 나도 하고, 당신도 하고 많은 사람이 할 거야"라고 했죠.

지금은 문 대통령님이 사드를 미국 의도대로 하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와 다를 수 있다고 했어요. 대통령이 뜻대로 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이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대화가 마지막 정치적 대화였습니다.

박근혜 하야가 지나고, 잠깐의 기쁨 지나고 가슴이 먹먹해 하는 시간 다시 왔습니다. 저는 바쁘게 살아야만 했고. 불안해했어요. 운동가의 아내는 불안합니다. 이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 튈 것인가 싶어서요. 매일 "여보 잘 다녀올게. 잘 있어"하고 인사를 나누었어요.

점심시간에는 늘 제가 전화를 했는데, 글을 좀 쓰냐고 물었어요. 아이 아빠가 글을 쓰고 싶어 했거든요. 아이 아빠는 많은 글이 아니라 하나를 쓰더라도 된 글을 쓰고 싶어 했어요. 저는 "여보 욕심 갖지 말고 작은 것부터 쓰라"고 했어요. 그날도 전화해서 물어보니 못 썼다고 해서 일기라도 쓰라고 했어요.

(사고가 난)그날도 전날처럼 출근했어요. 그 전날 밤 10시에 퇴근해서 아이 아빠에게 (저녁으로) 뭐 좀 시켜먹으라고 했더니 자장면 먹고 밖에 내놓았더라고요. 제가 "요즘은 그냥 내놓으면 안 되고 깨끗하게 씻어 내놔야 한다"라고 말하고 나왔어요. 그리고 그날따라 집에 점심에 전화를 못 했어요. 늘 10시, 12시에 전화를 하는데 그 날만 전화를 못 했어요.

그 날 연장근무 하려고 간식을 먹다 아들이 남긴 메시지를 봤어요. 아이가 '엄마, 엄마. 아빠가 집을 나갔다'며 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라서 "아빠가 왜 어디를 가. 왜 집을 나가"라면서 전화했더니 아들이 아빠가 몇 시에 나갔는지 확인하려고 경찰하고 아파트 CCTV를 확인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서울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들에게 차마 제대로 얘기를 못 했는데, 아들이 인터넷으로 찾아봤나 봐요. 기사를 읽고 "엄마 화상 2도면 괜찮아. 괜찮은 거야"라고 했어요.

집에 가보니 '여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메모지 하나가 쓰여 있더라고요. 우리에게 남긴 건 그거 하나였어요.

알고 보니 지난주에 남편이 아들에게 4장짜리 편지를 복사해달라고 했다더라고요. 복사해 놓고 원본은 갖고 서울에 간 거였어요. 기차 타고 가는데, 아들이 "아빠가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하더라고요. 저도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힘들어했을까 했어요. 그때 아들이 읽어보라면서 편지 전문이 실린 기사를 보여줬어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이 드디어 이 가슴에 있는 것을 토해냈구나 싶었어요. 그 순간부터 먹먹해지고… 제 생각은 그래요. 사드 문제를 갖고 남편이 시작한 길은 조금 전 이덕우 선생님께서 다 말씀하셨어요. 마중물이 되고 싶었던 거죠. 아이 아빠는 많은 분이 오셔서 자신을 추모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모든 사람이 수고하는 걸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자기가 한 몸 던져서 이 나라에 작지만, 힘이 된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언론이나 여러분들 역시 정말 나의 어떤 이익보다는 나를 포함해 다 같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조금 득이 되면 그걸 쫓아가기 마련이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조영삼씨는 콩알만 한 말 한마디, 단어 한 마디라도 이것을 해서 남에게 불이익이 되고 내게 이익이 되면 절대 쓰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검소하고 겸손하고 먹는 거 까지도 제한해서 소식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안 먹으면 저 사람이 먹을 텐데 하면서요.

통일을 꿈꾸던 사람이죠. 우리 아들이 뭐 하나 먹다 흘리면 아프리카로 보낸다고 늘 그랬어요. 먹는 거 버리지 말고, 흘리지 말라고 하면서요. 뭐든지 물도 많이 못 쓰게 해요. 물도 아끼라고 하면서 살았어요. 제가 막 불을 켜놓으면 남편이 끄면서 다녔어요. 참 소박했던 사람이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태그:#조영삼, #사드배치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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