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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한 관계로 중간 쉼터에서 금강 이야기를 진행 중이다.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한 관계로 중간 쉼터에서 금강 이야기를 진행 중이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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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금강은 안개로 덮였다. 최근 들어 매일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4대강 사업으로 보가 막히면서 생겨난 재앙이다.

충남문화재단의 '이제는 금강이다' 금강 문화역사 탐방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주제는 '금강 따라 걷는 옛길 여행'이다. 이번 탐방지는 충남의 산골 마을 청양이다. 청양에 금강이 있는 줄도 모르는 군민들이 태반이다. 충청의 젖줄로 불리는 금강의 총 길이는 394.79km다. 그중 16km 정도가 청양군을 따라 흐른다. 

지난 10일 오전 9시 백일홍이 수줍게 핀 넓은 뜰 모덕사에는 종주단을 이끄는 소설 <금강>의 김홍정 작가, 독도 사진 작가인 이정호씨, 금강의 영상콘텐츠를 제작해온 정경욱 감독, 산악전문가 김성선·조수남씨가 먼저 찾아왔다. 이어 생태해설을 맡은 복권승씨와 이진우 청양문화원장과 회원 등 20여 명이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충남 청양군 모덕사 최익현 선생의 동상 밑에서 시작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충남 청양군 모덕사 최익현 선생의 동상 밑에서 시작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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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금강이다’ 청양 탐사 일행이 최익현 선생의 영정 앞에 참배하고 있다.
 ‘이제는 금강이다’ 청양 탐사 일행이 최익현 선생의 영정 앞에 참배하고 있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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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덕사 최익현 선생 동상 앞에서 김홍정 작가의 탐사단 소개로 이날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전문 산악인으로 종주단의 안전을 책임지는 조수남 부대장을 따라 가볍게 몸도 풀었다. 청양군 소속 문화해설사를 따라 대의관, 춘추각, 고택, 영당을 둘러봤다.

충남 청양군 문화해설사로부터 최익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충남 청양군 문화해설사로부터 최익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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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 소속 문화해설사는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선생님의 유품도 전시되어 있다. 최익현 선생은 이항노의 제자로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었던 분이다. 철종 6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의 벼슬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대원군의 정책을 비난하며 상소문을 올리면서 흑산도로 유배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일본의 죄상 16개 항목을 적어 항쟁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렇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 순국하였다"고 말했다.

일행은 금강이 바라다보이는 '임장교'로 이동했다. 이곳은 수자원공사 공주보 부유물 임시저장소가 있는 곳으로 어림잡아 덤프트럭 50여 대 분량의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게다가 안개가 끼고 저기압 기온 때문인지 강변 우측에 있는 돼지 축사에서 심각할 정도의 악취가 진동했다. 널찍한 강변도로에 까치와 쇠살무사가 차량에 치이고 깔려 죽어있었다. 한적한 도로에 쏜살같이 달리는 차량에 로드킬을 당한 것이다.

생태해설사 손꼽히고 있는 복권승씨.
 생태해설사 손꼽히고 있는 복권승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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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승씨는 "여러분이 상류부터 걸어온 길에 60개 정도의 나루터가 있다. 강변을 끼고 청양군에도 8개 정도의 나루터가 있다. 임장교는 예전에 임씨와 장씨가 들어와서 터를 잡고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95년도 큰비가 왔을 때 다리가 떠내려갔다가 최근에 새로 건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강변에 보이는 하중도(모래톱)는 예전에는 인근 주민들이 뽕나무를 심어서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청양이 비단을 많이 생산했다. 그러나 지금은 군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변 버드나무를 뒤덮은 것은 가시박이다. 2008년 큰비가 왔을 때 대청댐이 열리면서 상류에 잇던 가시박이 떠내려온 뒤부터는 버드나무를 뒤덮고 있다. 5월경 싹이 올라오면 9월까지 나무를 덮어 햇빛이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간다"고 안타까워했다.

풀길을 걷던 어르신이 풀 포기를 잡아 묶는다. 어릴 때 뒤에 오는 사람 넘어트리려고 장난삼아서 했던 일이라고 한다. 강변에 널브러진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도 주웠다. 한 어르신은 참나무 밑에서 국수버섯이라고 불리는 버섯을 땄다.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워하신다.
  
전주이씨 효열 정려각에 도착했다. 다음은 공적비에 적힌 내용이다.

전주이씨는 1908년 공주 구래마을에서 태어나 충남 목면 구수울 마을의 윤인수에게 시집왔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효행과 덕성이 좋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며,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에게는 공경과 순종으로 도리를 다하였다.
남편이 병환으로 죽어갈 시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일이나 생명을 연장하였으나 마침내 사망하니 이때 부인의 나이가 21세이었다. 이후 노모가 병들자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드려 큰 효험을 보았다. 부인의 효열은 사람으로부터 큰 칭송을 받아 정려각을 세워 행적을 기렸으나 세월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 1987년에 건립하였다.

복권승씨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지역 분들이 이 분을 왜 칭송하냐면 시아버님이 아프실 때는 오른쪽 허벅지, 시어머니가 아프실 때는 왼쪽 허벅지의 살을 베어서 약으로 썼다.

그 당시 양반들이 많이 살아서 가마꾼이 있었는데 목면 면장이 자기 아들 장가를 보내려고 여기 가마꾼을 쓰겠다고 했다. 동네 어른들이 네가 왜 남의 가마꾼을 쓰느냐고 거절했다. 그러자 면장이 이 동내의 공출량을 늘려서 괴롭혔다. 동내네분들이 살 수가 없으니까 금강 변 모래밭 뽕나무 아래에 곡식을 숨겼다. 금강이 동네의 식량을 보호해준 곳이다.

그리고 동네 분들이 면장의 횡포에 시달리다 강 너머 (공주시) 운암리로 도망갔다. 그때 전주이씨 부인의 시아주버니도 도망을 갔다. 이에 전주이씨 부인이 시아주버니 봉양을 위해 음식을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졌는데 물속에서 누가 밀어 올려서 살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복권승 생태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강변을 걷고 있다.
 복권승 생태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강변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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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참가자들은 강변을 걸어 우리나라 구기자 첫 재배지인 청양군 목면 신흥리에 도착했다. 청양 출신 한의사인 박관용씨가 1927년 신흥리 167번지에서 최초로 구기자를 재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청양군에서 생산되는 구기자는 전국 생산량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태그:#4대강 사업, #이제는 금강이다, #청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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