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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김충수 순충비와 그의 사촌동생 김예수 순절비, 가문의 15세 김대경 사적비, 김충수의 아버지 김적(22세) 유적비, 그리고 김의택과 김용무 공적비가 김충수의 부인 금성 나씨 정려각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다.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김충수 순충비와 그의 사촌동생 김예수 순절비, 가문의 15세 김대경 사적비, 김충수의 아버지 김적(22세) 유적비, 그리고 김의택과 김용무 공적비가 김충수의 부인 금성 나씨 정려각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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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1315-5 우산사(牛山祠) 입구 도로변에는 비석 일곱 기가 서 있다. 그 중 김예수 순절비, 김충수 순충비, 금성 나씨 정렬비는 임진왜란 관련 비석이다. 나씨 정렬비 뒤에는 정려 비각도 있다.

도로변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김충수 집안의 의병 기념비

김예수(金禮秀)는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비석은 그의 이름 앞에 '충의사(忠義士)' 세 글자를 호처럼 얹어두었다. 죽을 것이 뻔한 진주성으로 스스로 달려가 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선비라는 뜻이다. 1593년 6월 29일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도 마지막까지 용전하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최경회는 김예수의 자형이다.    

일명 서포로 불리는 대굴포는 대굴산(사진 오른쪽) 아래의 포구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 초기에 전라 수군이 주둔했다. 사진은 나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사진 오른쪽 끝의 대굴산 비탈에 수군 본부가 있었고, 정유재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웠던 김충수 의병장의 순절지는 산과 강에 맞닿은 지점의 산비탈 바로 뒤편이다.
 일명 서포로 불리는 대굴포는 대굴산(사진 오른쪽) 아래의 포구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 초기에 전라 수군이 주둔했다. 사진은 나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사진 오른쪽 끝의 대굴산 비탈에 수군 본부가 있었고, 정유재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웠던 김충수 의병장의 순절지는 산과 강에 맞닿은 지점의 산비탈 바로 뒤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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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비석 김충수 순충비의 '순충(殉忠)'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순절했다는 뜻이다. 김예수의 사촌형인 김충수는 1597년 9월 24일 대굴포 일원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순절했다. 당시 김충수는 왜적 1만여 대군이 영산강 중류 몽탄을 거슬러오며 살상과 약탈을 자행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의병을 이끌고 출전했다. 하지만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의병군으로 적을 이길 수는 없었다.

조선 초기 전라도 수군의 본부가 잠시 주둔했던 대굴포에서 배를 띄웠지만 강을 뒤덮은 채 밀려오는 엄청난 적은 처음부터 대적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결국 의병장과 아군은 지금의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산172-6 일대로 밀렸고, 마침내 적에게 체포되었다. 적은 칼을 들이대면서 항복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조선의 신하다. 어찌 왜구들에게 항복하랴!"

김충수가 굽히지 않자 적은 좌우에서 칼을 찌르며 위협했다. 온몸이 피투성이로 변해가는 남편을 지키려고 부인 나씨가 자신을 던져 그의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비심이 생겨날 왜적이 아니었다. 곧 부인 나씨가 먼저 절명하고, 아내를 붙들고 통곡하던 의병장도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우산사 사당. 뜰에 김충수 순충비(오른쪽)와 그의 아버지 김적 선생의 사당이 있었던 자리임을 나타내는 유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이 이 비석을 부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을 들은 가문에서 밤에 땅을 파고 묻어놓은 덕분에 부서지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땅에서 파내어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우산사 사당. 뜰에 김충수 순충비(오른쪽)와 그의 아버지 김적 선생의 사당이 있었던 자리임을 나타내는 유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이 이 비석을 부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을 들은 가문에서 밤에 땅을 파고 묻어놓은 덕분에 부서지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땅에서 파내어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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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에 형 김충수가 군량미 200석과 군마 300필을 모아 조정을 도울 때 함께 활동했던 동생 김덕수(金德秀)는 대굴포 전투 이후 '복수 의병'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고하도에서 식량난을 겪고 있는 충무공에게 군량미 150석을 보내는 등 해상 작전에 기여하였다. 김충수는 종전 이후 선무원종1등공신, 김덕수는 3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김충수의 동생 김덕수도 선무원종공신에 책봉

이 무렵 몽탄 일대에서는 많은 의병들이 순절했다. 대굴포를 지나 북상하는 왜군에 맞서 장성군 남면 마령리 백년산에 진을 쳤던  최욱(崔澳) 의병장은 김충수 부부 순절 사흘 뒤인 9월 27일 지원군 없이 외롭게 싸우다 화살도 돌도 떨어져 의병들과 함께 순절했다. 

박제(朴悌)와 그의 처조카 송박(宋珀)도 무안읍 매곡리 보평산 일대에서 적에 맞섰다. 박제의 부인 송씨는 남편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적군에게 상처를 입인 후 자결했다. 그녀는 동래 부사 송상현의 종고모(아버지의 사촌누이)였다. 송박도 적에게 사로잡혀 항복을 강요받던 끝에 죽임을 당했다. 송박의 아우 송욱(宋頊)은 형에 앞서 몽탄에서 적과 싸우던 중 10곳에 적의 칼을 맞고 마침내 사로잡힐 지경이 되자 스스로 영산강에 몸을 던졌다.

'오늘 보면 아름다운 영산강, 1597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구나!'

김충수 의병장 순절지에 군청이 세워둔 기념비
 김충수 의병장 순절지에 군청이 세워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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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산성 이곳도 정유재란 때의 피해 유적이다. 윤진(尹軫)은 입암산성 중수의 책임을 맡아 공사를 지휘했다. 칠천량 해전 대승 이후 조선을 휘젓고 다니던 왜군 중 도진의홍(島津義弘, 시마즈 요시히로)의 1만 대군이 입암산성으로 몰려왔다. 아군은 몇 백에 불과했다. 윤진은 끝까지 맞선 끝에 순절했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인 권씨도 은장도를 꺼내어 자결하니 슬프고 원통한 전쟁 비극이었다.

남편 윤진이 전사하자 부인 권씨 은장도로 자결

윤진은 변이중 등과 함께 봉암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사적 384호 입암산성 안에 '윤진 순의비'가 있고, 등산로 500m쯤 지점에 '입암산성 순절 제위 위령 제단'과 윤진 순의비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1시간 이상 산을 올라 순의비까지 걷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이렇게 제향 제향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 좋은 정책적 배려라 하겠다.

입암 산성으로 가는 평탄한 등산로를 500m가량 가면(주차장 기점) 비석 두 기와 제단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오른족 비석이 산성 안의 '윤진 순의비'를 복제한 것이고, 왼쪽의 것은 '입암 산성 순절 제위 위령 제단'이다. 가운데 비는 '임시득 청덕비'이다.
 입암 산성으로 가는 평탄한 등산로를 500m가량 가면(주차장 기점) 비석 두 기와 제단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오른족 비석이 산성 안의 '윤진 순의비'를 복제한 것이고, 왼쪽의 것은 '입암 산성 순절 제위 위령 제단'이다. 가운데 비는 '임시득 청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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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500-1의 도로변에 큰 무덤이 있다.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는 이 무덤을 몰뫼, 몰무덤, 말무덤이라고 불러 왔다. 지금은 무덤 앞에 '萬義塚(만의총)'과 '丁酉戰亂萬義士之塚(정유전란만의사지총)'이 새겨진 비석 두 기가 있다.

남원성 함락 이후 엄청난 피해를 겪는 조선 백성들

안내판은 '1597년 발생한 정유재란 때 우리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들과 왜군들이 교전하여 쌓인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마을에 남아 있던 남녀노소 주민들이 시신을 거두어 합장하고 만의총이라 이름 하였다는 구전(口傳)이 전하고 있다.'면서 '옥천 주민들은 그 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10월 10일 향사(享祀)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 무덤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함락으로 전라도 사람들이 입은 피해를 증언하는 상징의 하나로 여겨진다. 

해남 만의총
 해남 만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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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기념물 61호인 '삼세오충렬 유적'은 전북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 131-5에 있다. (같은 삼세오충렬 유적에 '금산 충렬사'가 있습니다. <남북 오랑캐와 싸우느라 3대 5명이 순절한 집> 기사에 삼세오충렬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참고바랍니다.)

익산 삼세오충렬 유적 앞 도로변 표지석에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돌개바람으로 
불꽃 된 님이시여
의혈(義血)이 붉다 못해
삼세오충(三世五忠)
청사(靑史)의
별이 된 님이시여
여기
충렬(忠烈) 기리는 마음 
샘물처럼 흘러라

삼세오충은 3대에 걸쳐 5명의 충신이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삼세오충렬 유적의 외삼문인 충신문 앞 안내판은 마지막 문장을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다섯 충신의 발자취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나라 사랑의 참뜻을 깊게 되새기게 한다.'로 마감하고 있다.

한 집에서 다섯 명이 나라를 위해 순국

문화재청 누리집의 설명을 읽어본다. 삼세오충렬 유적은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해주오씨 오충신(五忠臣)의 무덤과 사당인 충렬사가 있는 곳이다. 충렬사는 조선 숙종 7년(1681)에 세웠고 오응정과 그의 아들 욱과 직, 직의 아들 방언을 모셔 사충사라 하였으나 근래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도 함께 모심에 따라 오충사라 부르고 있다.'

삼세오충렬 유적 전경
 삼세오충렬 유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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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응정은 조선 선조 7년(157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서 공을 쌓았으며 정유재란(1597) 때는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선조 30년(1597)에 아들 욱, 동량과 더불어 남원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참패하자 화약더미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를 기리어 영조 35년(1759)에 용안에서 오응정을 제사하고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아버지와 아들이 남원성 화약고 터뜨려 함께 순절

차남 직은 광해군 때 도원수 강홍집 밑에서 요동 심하 전투에 출전하였으나 강홍립이 후금 군에게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부차에서 적과 싸워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직의 아들 방언은 병자호란(1636)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자 샛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오응정, 그의 장남 오욱, 5남 오동량이 남원에서 함께 순절했고, 차남 오직이 후금 군과 혈전 끝에 전사했으며, 손자 오방언이 병자호란 때 자결하였으니 해주오씨 집안의 3대에 걸친 순국은 참으로 장렬하고 슬프다.

역시 삼세오충렬 유적인 '금산 충렬사'의 사당.
 역시 삼세오충렬 유적인 '금산 충렬사'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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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충수, #우산사, #대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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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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