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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감기가 찾아왔다. 매년 몇 차례 감기를 앓고서야 '한 해가 지나갔구나' 생각할 정도로 감기에 취약한 편인데 올해는 감기가 일찍 찾아왔다.

어렸을 때, 감기에 걸리면 엄마는 바로 약을 먹였고 학교에도 보내질 않으셨다. 흔하디 흔한 개근상 한 번 받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내내 골골한 시절을 보내왔더랬다. 그래서인지 아픔을 견디는 능력도 무척 낮은 편. 활동하는 단체는 일찍 조퇴를 했고, 그날 저녁 알바를 다녀와 다음날은 꼬박 쉬며 앓았다.

그런데 밴드 채팅방과 카톡방 알림이 내내 울렸다. 지난 3일, 광주에서 대대적인 동성애·동성결혼 합법화 개헌 반대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은 활동가 몇 명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나는 내 몸에 찾아온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금 정신을 찾고서야 그 내용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토요일, 연이틀 내내 꼬박 앓고 기운이 생겨 알바를 갔다. 내내 누워있었던 탓에 얼굴은 퉁퉁 부었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때 카운터 바로 앞에 두 테이블을 장악하고 앉은 단체 손님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일 금남로에서 동성애 반대 집회 한다고 문자왔던데. 받았어요?"

아마도 지역 내 교회에서 집중적으로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를 보낸 듯싶었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물었다. 

"받았어요. 태초에..."

이어 시작되는 그녀의 설교. 그는 말했다.

"아니, 자기들이 사랑한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뭔 상관이야"

솔직히 놀랐다. 그는 전형적인 40~50대로 아저씨로 보였기 때문. 계속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동성애로 시작해 현대 교회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가 확장됐다. 나중엔 '그 교회에선 돈 내라고 할 때만 진지하더라는' 시니컬한 비판으로 막을 내렸다.

두 달이 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장 귀를 기울여 들은 대화였다.

'곁'을 볼 수 있게 해준 여성주의

거리에 붙은 '동성애 반대' 현수막.
 거리에 붙은 '동성애 반대' 현수막.
ⓒ 김미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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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사회가 지정한 성별이 일치하는) 헤테로(이성애) 여성이다. 이렇게 나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그렇게 내 존재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올해 대선 토론회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하던 순간, 삭제되고 지워진 수많은 '존재들'을 생각했다. '퀴어'라고 뭉뚱그려진 이미지가 아닌 구체적인 이미지들. 내가 만난 퀴어 당사자들, 그리고 내 곁에 머물며 나와 함께 웃고 울던 내 친구들.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가 떠올랐다.

그날 밤, SNS에 올라온 퀴어 당사자들의 글을 보며 마음이 먹먹했다. 누군가는 좌절했으며, 누군가는 서글퍼했으며, 누군가는 분노했을 그 밤의 공기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어디 이번 일 뿐인가. 군대 내 동성애자를 색출하겠다며 사냥하듯 미끼를 던지고, 그 미끼에 걸려든 이들을 불러다 놓고 '어떤 체위로 했느냐'는 식의 모욕적인 질문을 던진 사건도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수준인가 물을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을 만나며 나는 고통스러웠다. 안다는 것은 아픈 것이라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여성학자 정희진님이 말한대로였다. 여성주의를 보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다면 내가 당연하게 여길 일들에 '왜?'라고 질문을 던지게 됐다. 이를 알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회피하지 않을 용기를 준 것도 페미니즘이었다.

내가 불편하지만 왜 불편한지, 아프지만 왜 아픈지 풀어내지 못했던 걸 명확히 설명해줬다. 이를 통해 조금은 나를 용서할 수 있었고, 나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끝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만나 가장 기쁘고 감사한 점은 중심부에서 배제된 주변부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성을 1로 상정한 사회에서 부차적인 존재인 2로 살아온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즘은 주변부를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각성시켰다.

페미니즘 덕에 내가 비장애인·이성애자 여성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힘과 권력을 생각하게 됐다. 배제되고 뒤로 밀려난 이들에게 언제든 폭력을 가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조금 더 예민하게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더 나아가, 매일 낮이면 천막에서 미사를 드리며 제주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하는 저 제주의 강정마을 사람들이, 내 탯자리인 이곳에서 살아온 그대로 살아가고 싶다며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하는 밀양의 할매·할배들이, 지금도 이 땡볕 아래 발사대 추가 배치를 막고자 싸우고 있지만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고 고운 별빛이 아름다운 성주 소성리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마음이 갔다.

또 전국 곳곳에서 천막을 치고 싸우는, 이름도 잘 호명되지 않는 소규모 노조의 싸움이 더 마음을 괴롭혔다.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 길을 가는 이들의 수고가 항상 나를 울렸다.

그래서 지난 겨울, 광장이 열렸을 때 적어도 그곳에서 정부의 퇴진만큼이나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제들이 더 이야기 되길 바랐다. 그 안에서 모두가 동일한 1의 발언권을 가질 수 있길 바랐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 민주주의의 '민' 속에서 혹시나 삭제되고, 지워지고 있는 존재들이 있는 건 아닌지 세심히 살펴보길 바랐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함께 더 성장할 수 있길, 그럴 수 있길 말이다.

모두가 함께 어깨동무하는 그 순간을 그린다

나의 팔찌들.
 나의 팔찌들.
ⓒ 김미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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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에 생긴 작은 염증, 발가락에 생긴 작은 물집. 그런 것들은 온몸의 신경을 그곳으로 모이게 한다.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 되듯,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성소수자 인권이 우리가 함께 싸워야 할 그 중심에 서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나는 몸이 아파 그 집회에 항의하러 가지 못했지만, 나의 친구들은 그곳에 있을 게다. 혐오의 대상으로, 존재를 삭제당하는 현장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서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아린다.

몇 달 전, 지인들과 <런던프라이드>라는 영화를 보았다. 1984년 영국, '왜 경찰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왜냐? 그 경찰들이 다 파업 중인 광부들을 진압 중이었기 때문.) 영화는 유쾌하게 성소수자와 파업 중인 광부들의 연대를 그린다.

맞아본 사람이 그 고통을 안다. 탄압받는 파업 광부를 돕겠다며 모금을 시작한 이들과 그들의 돈이라면 받기 어렵지 않겠냐는 광부들. 하지만 그들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서로의 친구가 되어간다.

어떤 낯선 존재가 아닌, 내 옆에서 함께 숨쉬는 사람. 나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추억을 공유한 친구로 만나는 이들. 영화의 마지막, 처음엔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배제하던 동네 사람들이 런던프라이드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 지역에서 진행된 혐오 집회가 22일 다시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날, 많은 성소수자들의 친구들, 앨라이(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들이 그 거리에서 행진하는 풍경을 상상한다. 어제 우리 가게에 찾아와 "자기들의 사랑인데 누가 무슨 간섭이냐" 일갈하셨던 그 아저씨와 수많은 이들이 '사랑으로 혐오를 이길 수 있다'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린다.

런던 프라이드의 마지막 장면처럼 즐거운 행진곡에 맞춰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걸고 혐오세력을 향해 보란 듯이 행진하는 모습. 이 얼마나 멋진가. 아픔이 아픔에 연대하는 그 멋진 일이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길. 그러려면 일단 나부터 건강해져야지. 밥도 든든히 먹고. 흠흠흠.


태그:#성소수자, #인권,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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