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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에도 동시에 연재합니다.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고, 후원금은 벌금을 대신 내는 데 쓰입니다. - 기자 말

☞이전기사 : [노역장 가는 길②] "엉덩이 좀 보죠",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1주일 간의 자진노역 투쟁 기자회견을 마치고 즐거워 하고 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1주일 간의 자진노역 투쟁 기자회견을 마치고 즐거워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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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빗발쳤다.

"네, 잘 나왔어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부슬비가 내리는 7월 24일 오전. 이형숙씨의 전화가 쉬지 않고 울렸다. '희망의 시작, 서울구치소입니다'라고 쓰인 정문을 막 지나온 터였다. 7박 8일의 노역을 살아낸 형숙씨는 그를 마중 나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과 한참을 얼싸안았다.

일정은 빠듯했다. 서울구치소가 있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형숙씨를 태운 차량은 서울 중구로 향했다. 한 시간 만에 도착한 국가인권위원회 빌딩 앞에는 30여 명의 친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궂은날, 우비를 입고 휠체어를 밀고 지하철을 두세 번 갈아타며 모인 이들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을 조성하는 서울구치소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그 무엇도 투쟁을 막을 수 없다!'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가운데, 형숙씨가 외쳤다. 장애인권운동을 벌금으로 탄압하는 국가와, 사람의 권리는 사라지고 죄만 남은 서울구치소를 향한 외침이다.

그의 친구들은 케이크를 준비했다. 서울구치소에서 8일을 버텨내고 나온 그를 위로하고 축하하기 위해서다. 친구들은 두부도 준비했다. 형숙씨는 크게 한 입을 베어 먹었다. '장애인의 발을 보장하라' 외쳤다는 이유로 재판과 벌금을 낼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며, 차별의 고통을 더는 외치지 않기를 바라며 두부를 삼켰다.

그는 바로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있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으로 향했다. 쉼 없는 스케줄이 이어졌다. 바로 다음 날인 25일 서울시민청에서 '부글부글 결심대회'가 있었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 투쟁 5주년'을 맞아 열린 행사다. 형숙씨는 이 투쟁을 이끌어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공동행동'의 공동집행위원장이다. 5년간 답 없는 곳을 향해 무수히 외친 날의 기록이다.

오전 10시 30분께 서울구치소 정문을 나온 형숙씨의 하루는 오후 8시 30분, 김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장애와 인권, 차별을 종일 읊조린 하루였다. 이렇게 산 세월이 어느새 10년이다.

그에게 학교는 고통이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1주일 간의 노역을 마치고 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1주일 간의 노역을 마치고 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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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시절, 형숙씨의 손에는 늘 가시가 박혀 있었다. 바늘로 가시를 빼는데 능숙한 십 대였다. 1980년대 학교는 바닥도 계단 손잡이도 모두 나무였다.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1급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다리 보조기의 도움을 받았다. 보조기를 찬 다리는 굽혀지지 않는다. 일자로 뻗어있는 다리로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손잡이는 절대적이다. 여기에 기대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다. 나무로 거칠게 만들어진 손잡이 곳곳에 삐죽 나와 있던 가시가 작은 손에 박혔다.

손에 박힌 가시야 바늘로 해결하면 됐지만, 마음에 박힌 가시는 빼낼 방법이 없었다. 형숙씨는 초등학교 때 늘 1반이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그랬다. 교실 역시 1층 같은 자리였다. 다른 반 친구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형숙씨와 1반 친구들만 일층에 머물렀다.

"니가 위에 못 올라가잖니.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거야."

언젠가 한 번, 왜 늘 1반이냐고 형숙씨가 물었을 때 선생님이 답했다. 선생님과 학교는 나름의 배려와 친절로 택한 방법이었다. 그 배려는 형숙씨를 다른 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이 위층으로 올라갈 때 형숙씨 역시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반을 1층에 덩그러니 뒀다. 쉽고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이었다.

매일 고역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 더 지독한 시기도 있었다. 생리였다. 중학교 때는 화장실을 가려면 3층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보조기를 찬 굽혀지지 않는 다리로 쉬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화장실을 자주 못 가는 형숙씨를 위해 엄마는 몇 장의 수건을 챙겨줬지만 역부족이었다. 형숙씨의 교복치마는 때마다 붉어졌다.

불편은 참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말하고 듣고 쓰는 것 모두 할 수 있는데, 다리가 조금 불편할 뿐인데' 이 정도는 노력하며 참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형숙씨가 20대와 30대를 비장애인 세계에서 살아낸 이유다.

"끼어 있고 싶었어요. 비장애인 세계에 끼고 싶어 아등바등 살았어요. 차별받고 있지만 차별인지 모르고 그 속에서 머물렀어요. 나의 차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싫었죠. 알고 싶지 않았어요."

비장애인으로 살고 싶은 그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또렷하게 다가왔다. 취직이 어렵지 않던 시절, 친구들은 대학을 가거나 취직을 하거나 명확하게 걸어 나갔다. 형숙씨는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집안 형편상 대학은 꿈도 못 꿨고, 돈을 벌어야 했는데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만 가능하니 선택지가 없었다.

한 달에 15만 원을 받으며 한복집을 하는 이모 밑에서 바느질을 배웠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답답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앉아서 이십 대를 보냈다.

장애는 내 탓이 아니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자진노역 기자회견을 마치고 딸의 격려를 받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씨는 서울 구치소에 노역을 위해 수감 되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자진노역 기자회견을 마치고 딸의 격려를 받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씨는 서울 구치소에 노역을 위해 수감 되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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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가 태어난 1994년 때까지만 해도 형숙씨는 보조기를 착용하고 자동차를 운전했다. 아이를 낳고 취미활동이 필요했다. 그때, 장애인 복지관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이 없고 문턱이 낮은 곳을 찾다 보니 그곳뿐이었다.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다가 장애인 여성모임을 알게 됐고, 그렇게 장애를 인정하고 바라봤다. 2009년, 전동 휠체어를 받아들였다.

형숙씨가 휠체어를 탄 건 자신의 장애를 인정한다는 결심이었다. 나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불편'을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스스로 구차해 보여 숨기고 싶었던 불편을 똑같이 겪고 있는 '우리'가 복지관에 있었다. 형숙씨는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앉아있었고 손잡이도 잡았지만 버스가 급정거할 때 코뼈가 부러졌다. 다리 힘이 부족했다고 자책할 게 아니구나, 나 혼자 안간힘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불편하다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럴 권리가 있었다.

"보조기를 차고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썼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 혼자 이겨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장애가 있다면 국가가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줘야 하는 거였더라고요. 이동이 쉽게 저상버스도 만들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도 만들어야 하고. 국가의 할 일이라는 것도 있더라고요."

억울했다. 장애는 내 탓이 아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이동에 제한을 받아선 안 된다. 활동 보조인도 필요했다. 하지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나. 질문이 이어지자 행동이 시작됐다. 형숙씨는 '장애인에게 발을 달라'고 외쳤다. '등급을 매겨 장애를 판정하지 말라'고 소리 냈다. 장애의 짐을 오롯이 그 가족에게 감당하게 하고 사회적 책임은 나 몰라라 하는 국가를 향해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고 호소했다.

형숙씨의 두 번째 노역은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1주일 간의 노역을 마치고 구치소를 나와 장애인 이동차량에 오르고 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1주일 간의 노역을 마치고 구치소를 나와 장애인 이동차량에 오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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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자진노역 기자회견을 마치고 동료들의 격려를 받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씨는 서울 구치소에 노역을 위해 수감 되었다.
 장애인 활동가 이형숙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자진노역 기자회견을 마치고 동료들의 격려를 받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씨는 서울 구치소에 노역을 위해 수감 되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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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인권을 이야기하면, 늘 돈 얘기가 나왔다. 지자체는 그랬다. 2014년, 용인시는 용인경전철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 활동보조인 서비스에 쓸 돈이 없다고 했다. 2013년 한 약속을 참 쉽게 저버렸다. 형숙씨가 활동했던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20일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집회신고도 내고 시청 앞에서 노숙 농성을 이어갔지만, 용인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농성을 마무리하며 시장 면담을 요청하려 했다. 50명이 모여 시청 1층에서 면담을 요구하려 했는데 그들을 맞이한 건 경찰이었다. 형숙씨는 경찰에 연행되고 재판에 넘겨졌다. 벌금 100만 원이 선고됐다. 형숙씨가 2015년 수원구치소에서 처음 노역을 하게 된 이유다.

비슷한 재판과 벌금 선고는 매년 반복되고 있다. 이번 두 번째 노역도 단지 외쳤기 때문이었다. 형숙씨는 2015년 광화문사거리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고 외쳤다. 한 명이라도 더 들어주길 바랐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외치고 싶었지만, 15분을 넘기지 못했다. 법원은 '일반교통방해'를 선고했다. 벌금 100만 원을 내지 못하면 10만 원을 1일로 환산해 노역을 살라고 했다.

친구들은 두부를 주며 '더는 구치소에 가지 말라'는 바람을 전했지만 이 바람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지난해만 해도 여러곳을 점거하고 농성하며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 말했다. 이 때문에 재판 중인 사건이 5개가 넘는다. 다시 벌금형이 선고되면 세 번째, 네 번째 노역장을 가야할지도 모른다.

"의료적인 시각으로 장애를 보면요, 한 손을 쓸 수 있으면 활동보조인을 쓸 수 있는 장애 판정이 안 나와요. 한 손으로 쌀은 씻을 수 있죠. 그런데 한 손으로 밥통에 쌀을 넣을 수는 없어요. 한 손으로는 휠체어도 못 밀어요. 장애등급제는요, 장애인의 실제 불편과 차별이 아닌 행정적으로 잣대를 지어 구분하는 제도입니다.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외쳐야죠."

재판과 벌금, 노역이 무서운 게 아니다. 형숙씨의 외침은 차별을 방조하는 나라, 편견을 만들어가는 국가, 장애를 뒷전으로 치워버린 곳곳으로 향한다. 그의 휠체어는 다시 광화문 농성장으로 간다.


태그:#노역,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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