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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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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밥을 지지한다', 라고 썼다 지운다. 혼밥은 지지하고 말고 할 찬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혼밥이 논란이다. 논란의 시작은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지난 4월, TBS의 라디오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혼밥은 자폐'라는 발언을 한 것이 밝혀지며 시작되었다.

일단 '자폐'라는 질병을 부정적인 의미로 끌어들여 쓴 것부터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로 공분을 살 만하다. 이를 차치하고라도(황교익은 논란 후에도 '거북해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회적 자폐는 혼밥에 대해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하다고 SNS에 밝혔다) 혼밥을 '정신이 이상한', '소통 능력이 결여된', 즉 '문제가 있는' 행위라며, 혼밥을 하는 사람을 폄하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황교익 본인은 언론이 '왜곡보도'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곡해하고 있으며, 자신의 발언을 문제 삼는 이들은 단어 하나를 꼬투리 잡아 자신을 물어뜯는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혼밥은 사회적 자폐' 발언이 논란이 되는 것은 단순히 단어 선정의 문제뿐 아니라 '맛 칼럼니스트'로서 혼밥이 '잘못된 문화'라고 말하는, 그 '꼰대니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황교익은 왜 '혼밥'을 배척할까?

1인 삽겹살집에서 생삼겹살 1인분과 소주 한 병, 공깃밥 하나를 주문했을때의 상차림
 1인 삽겹살집에서 생삼겹살 1인분과 소주 한 병, 공깃밥 하나를 주문했을때의 상차림
ⓒ 김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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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의 발언 일부를 보자.

김어준(아래 김): "그래서 지금 혼밥 문화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지적하고 싶으신거죠?"

황교익(아래 황): "맞습니다."

김: "인간 공동체를 무너트린다 이거죠?"

황: "혼자서 밥을 먹는 이것은 인간의 유구한 칠백만 년 육백만 년 동안의 인간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이죠.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일단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사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한 예를 본 적이 있는데 밥 먹을 때 소통을 거부하는,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분들이죠. '노숙자'"

김: "아 그래요?"

황: "저는 인간이 밥 먹는데 모든 부분은 다 관찰하니까 노숙자들 틈에 끼어서 같이 무료 급식을 이렇게."

김: "일부러? 사람이 먹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문화적 심리적 특징을 분석해보려고 노숙자분들하고 끼어 가지고 밥을 같이 먹는 거까지 이야... 문화인류학까지 가시네요."

황: "밥을 나눠주시는 분들한테 양해를 구했죠. 그래서 같이 한 끼 먹게 해달라."

김: "그런데 그런 분들은 특히 혼밥을 하시더라?"

황: "줄을 서서 식판에 밥을 받았죠. 밥을 받고 난 다음에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으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둥글둥글 앉아서 밥을 먹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죠. 그런데 식판들을 들고 그분들은 일제히 벽 쪽이나 화단 쪽을 향해요.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오로지 밥만 먹습니다. 옆에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인간들 간의 소통하는 방법을 완전히 잃으신 거죠."

김: "혹은 거부하시거나 일시적으로."

황: "뇌에 큰 고장이 발생하신 거죠. 노숙자라는 분들이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그런 것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굉장히 큰 거죠. 다른 사람들하고 소통하지 않겠다라는 그런 적극적인거 때문에."

김: "밥은 한마디로 같이 먹어야 되는 거라고."

황교익은 노숙자들이 '뇌에 큰 고장'이 나 소통을 하며 같이 밥 먹기를 거부한다는 말로 또 다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있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기로 했으니 '혼밥'에 대한 의견만을 보자.

그에 따르면 혼밥 문화는 '인간 공동체를 무너트리는' 문화이며, 혼자 밥을 먹겠다는 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그러니까 반사회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오늘 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혼자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덮밥을 먹어야지!"라고 결심한 순간, 나는 세상을 향한 소통을 거부하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되는가?

심지어 내가 이런 혼술, 혼밥을 즐긴다면 사회 부적응자로 공동체를 무너트리는가? 이 문장 자체가 이상해서 내가 황교익의 발언을 비약한 것이 아닌가 눈을 크게 뜨고 점검해 보아도, 혼밥에 대해 '사회적 자폐'니, '뇌에 큰 고장'이니, '공동체를 무너트린다'고 한 것은 황교익이다.

이런 발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개인의 자유와 즐거움을 부정하는 '집단주의', 그리고 '맛'을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만 해석하려는 고집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혼밥과 같이 먹는 밥 중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각자가 가지는 장단점은 확실하다. 혼밥을 하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자신만의 페이스로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식사를 하느라 '감정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 황교익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황: "그렇습니다.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은 소통을 거부하겠다라는 인간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인 소통의 방법을 거부하는 그런 일이 될 수가 있거든요."

김: "이런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그렇게 인간관계가 주는 스트레스 있지 않습니까."

황: "있죠."

김: "감정노동... 그게 싫어서 그냥 나는 좀 단절되더라도 혼자 밥을 먹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황: "그걸 극복을 해야되는 거죠."

김: (웃음)

황: "싫다고 해서 나는 나 혼자서 어떤 일을 하겠다, 점점 안으로 숨어들겠죠. 그게 자폐인 거죠."

김: "사회적 자폐."

황교익에 따르면 밥을 먹는 것은 사회적인 소통이고, 거기에 따라오는 감정노동이 있다 하더라도 '극복'하고! '최대한 혼밥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감정노동을 안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우리는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삶의 많은 시간을 감정노동을 하며 보낸다. 솔직히 말해서 거지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가끔은 그런 감정노동에서 벗어나 혼자 즐기는 느긋한 식사가 간절하다. 감정노동 없이 혼자 밥 먹는 즐거움, 이를 '사회적 자폐'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는 누구인가. 식사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교류, 인간으로서의 소통의 장이라면 그 테이블에는 당연하게도, 사회적 위계와 권력이 작용한다.

'떼밥'이 즐거운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화 <날아라 펭귄>의 회식 장면
 영화 <날아라 펭귄>의 회식 장면
ⓒ 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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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은 아마 높은 확률로 그 테이블에서 권력의 윗단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 밥상에 숟가락을 깔아야 하는 부담도(이것도 얼마나 웃기는 문화인가?), 윗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웃어넘기며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테이블에서 감정노동과 밥 시중을 맡는 일은 나이가 어릴수록, 그리고 남자보다 여자일수록 그 확률이 확연히 높아진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 보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이느라 자신은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쩔쩔매는 부인과, 그 옆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남편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부인은 제발 단 하루라도, 혼자서 즐거운 식사를 하고 싶지 않을까? 그런 바람은 '사회 부적응자'의 생각일까? 또. 꼰대 같은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상사와 밥을 먹느라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모래 씹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권력의 우위에 앉아 밥상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이라면 혼밥보다 '떼밥'이 즐거울 것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다는 자각을 쉽게 하지 못한다. 권력은 '편한 것'이기에 없어지면 불편할 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사라지려 할 때, 이에 겁을 느끼고 '그건 틀렸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혼밥이 사회를 무너뜨리는 문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밥상머리에서 누리는 것들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사람이다. 가만히 있어도 밥을 차려주고 밥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며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얼마나 무서울까.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댄다. '밥상 머리 교육은 엄마가', '설탕세대론', '엄마의 손맛, 엄마의 집밥'... 이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며 '공동체'를 앞세워 그 착취를 정당화하고, 그 착취를 문제 삼고 벗어나려는 이들을 힐난함으로서 묶어두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설사 '개인의 희생'이 있을지언정, 집단을 위해, 사회를 위해, 대의를 위해 참아야 한다고 한다.

맛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맛 칼럼니스트?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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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의 잣대로 판단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 혼밥을 좋아하는 이들이 '떼밥'을 즐기는 이들에게 '떼밥'은 정신적인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혼밥'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맛 칼럼니스트'로서 맛을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만 풀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미식'이 주는 가치를 떨어트린다는 것에 있다. 미식은 궁극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고 즐기는 행위로 이는 우리의 생존과 동떨어진 취미의 영역이다.

그런데 혼자 즐기는 '맛'은 도저히 취미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결국 미식에서 방점은 '맛'이 아니라 '사회적인 소통과 교류'에 찍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미식에서 맛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닌, '같이 공유하는 즐거움'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맛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맛 칼럼니스트'라니 이상하다.

혼밥을, 감정노동을 거부하는 '수동적인' 행위로만 보는 것도 문제다. 온전히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느긋하게 먹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은 더 이상 수동적인 행위가 아닌, 나를 위한 능동적인 행위다. 인간은 사람과 교류하기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감히 (나 빼고) 너 혼자 즐거울 수 있다니 용서 못 하겠다, 아니 그것은 진짜 즐거움도 아니라고!'라는 뒤틀린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 없다.

일드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일이 끝난 후, 숨어 있는 가게를 찾아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낙인 사람이다. 지친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나를 위한 시간, 그 시간만큼은 머리 아픈 일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다. 오로지 나와 눈 앞의 맛있는 음식이 있을 뿐이다. 이 또한 '사회적인 자폐'라고 할 것인가? 물론 누군가는 그렇다고 하겠지.

나는 이를 '사회적 자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과 밥을 먹느니 굶고 말겠다. 아니 그보다는 혼밥을 즐기겠다. 혼자 밥을 못 먹어서, 혹은 그를 즐기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보다는 혼자라도 당당하고 즐겁게 밥을 먹는 사람이 훨씬 성숙한 인간 아닐까.


태그:#황교익, #혼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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